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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떠도는 자의 노래 Jan 03. 2022

한국의 서낭당 - 쉬어가는 글②

서낭당? 성황당?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흔히들 우리네 전통 마을의 한가운데나 뒷동산,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 제당을 성황당(城隍堂)이라고 부른다.  비록 근자에 들어서는 '서낭당'이라고 한글 현판을 달아놓는 마을 제당이 아주 드물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열에 아홉은 모두 '성황당'이나 '城隍堂'으로 표기되며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부지불식간에 이러한 오독(誤讀)을 확산시키는 것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표기가 잘못된 것이며, 그 오류의 내력 또한 무척 오래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황당'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주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 역사를 같이 해온 전통적인 마을 신앙, 공동체 신앙의 성소인 '서낭당'과는 그 어원과 의미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쉬어가는 글은 왜 '성황당'이 '서낭당'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성황(城隍) 그리고 성황당(城隍堂)


중국 성황묘의 제신인 성황

성황(城隍)의 원 의미는 축성과 해자 조성을 위해서 땅을 파낸 흙으로 높은 담장을 쌓아놓은 것(城)과 그 흙을 파낸 자리에 물을 채운 것(隍;해자)을 일컫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해자 안쪽에 물을 채운 것을 지(池)라고 부르고, 물이 없이 말라 있는 상태의 해자를 황(隍)이라고 부른다. 《說文解字》 


성황(城隍)은 원래 도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며, 성황(城隍)의 원형은 아무것도 없는 토단(土檀)의 형태였다고 전한다. 성황(城隍)은 일찍이 주(周)나라 때부터 가을 수확 후, 매 해의 세밑에 여덟 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고대 중국 풍습의 일환이었으며, 여덟 제신 중의 일곱 번째 신이었던 수당신(水唐神)이 바로 성황신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수(水)는 황(隍)이요, 당(唐)은 성(城)을 의미한다. 성황에 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곳은 《주역》이며, 《양서》에서는 성황에 대한 수리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周易》 “城复于隍城隍神,勿用师” “城复于隍,其命乱也” 

《梁書》 "其党转相诳惑,有众万余人。将出攻郡,襄先已帅民吏修城隍"


현재도 중국에서는 매 달 12일경에 성황신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으며, 대체로 성황신을 모시는 풍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도시는 고대부터 형성된 오래된 도시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중국에서의 성황(城隍)은 신격으로 받들여 지기보다는 일종의 관직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간에서는 성황신을 성황 할아버지(城隍老爷: 청황라오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황은 수호신이자 법관이며, 사자(死者)의 공과를 판별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또한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관장하며 선한 행동은 상을 내리고 악한 행동에는 벌을 내리는 판관의 역할까지 한다고 한다. 중국의 성황은 신격이라기보다 인격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마을 제당의 서낭은 인격이라기보다 신격에 가까운 존재로 모셔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이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는 마을 제당(서낭당)에서 모셔지는 제신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과 성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사한 점이라고는 발복(發福)과 제액(除厄)을 기원하는 대상이라는 점뿐이다.


善来此地心无愧 恶过吾门胆自寒
요녕 금주성 성황묘에 걸려 있는 대련(對聯). 선악을 판별하는 존재로서의 성황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구다.


성황이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수입 이후에는 중국과는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고려代에는 국가에서 성황을 설치하고 관리하였고 그런 관행은 조선代까지 이어졌다. 당시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어 조정이 중요하게 관리했던 제의가 있었다. 대사는 종묘와 사직이고. 중사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악(嶽), 해(海), 독(瀆) 등을 모셨으며, 소사는 영성(靈星), 명산(名山), 대천(大川) 등을 섬겼다. 이중에서 성황은 풍운뇌우와 함께 제의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통치 이념이 유교(성리학)로 정립되면서, 무속 신앙에 습합 되어 폐단이 끊이지 않았던 관치 성황사가 음사(淫邪)가 횡행하는 악의 소굴처럼 폄훼되어 유림들 사이에서는 혁파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물론, 무당과 박수들이 전횡을 일삼으면서 혹세무민하고 악행을 일삼았던 것은 사실이고, 그런 추악한 모습이 선비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도입된 성황(城隍)은 우리가 서낭당이라고 부르는 마을 신앙/공동체 신앙의 성역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관치읍성의 부속사당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다만 도입 초기의 관치(官置) 사당이 세월이 흐르면서 무속 신앙과 민간 신앙이 뒤섞인채로, 그 성격이 모호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황당(성황사)이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관제(官制)에서 유래된 것이고, 고려나 조선의 조정에서 성황이나 국사당을 관리하고 설치한 근거도 중국 역대 왕조의 예법 전서들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의 서낭당을 성황당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 고유의 공동체 신앙의 성역에 엉뚱하게도 다른 나라의 관제와 습속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셈이며, 비유하자면, 김치를 '다꾸앙'이라고 부르거나 우리의 한복 저고리를 '슈트'라고 부르는 꼴과 다름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명명(命名)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마을 제당에 성황당(城隍堂)이라는 현판이나 성황신위(城隍神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것일까?


이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낭'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격을 문자화 하다 보니, 유사한 발음과 개념의 성황(城隍)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관치 성황사의 예법과 개념도 부지불식간에 민간 신앙의 영역에 도입되어서 오늘날의 유교식 제례(독축-헌작-배례)의 체계가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글에 대한 폄하 의식이 팽배했던 당시 시대적인 의식구조 탓에, 학자然 선비然 유사然 하기 좋아하는 유림의 습속이 영향을 끼쳐, 우리 고유의 신앙의 영역 안에 중국式 / 한자式의 표기가 계속 잔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서낭당 현판. 한글로 씌여졌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일지라도, 성황당으로 오기(誤記)하고 있다. 그나마도 서낭당을 새로 신축하면서 한글에서 한자로 환원되었다. - 양양


성황당(城隍堂)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어이없지만,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서낭당을 서랑당(西郞堂) 수랑당(守郞堂)등의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한자化 시키는 경우까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이규경(李圭景)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우리나라 도처의 고갯마루에는 선왕당(先王堂)이 있는데 이것은 성황이 잘못된 것”이라는 구절을 들어서 서낭당의 원형이 성황당이라는 논지를 전개하기도 하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이규경이 무슨 근거로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우리 공동체 신앙의 성소 명칭을 단정지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며, 성황의 발상지(發祥地)인 중국에서도 그 유래와 성격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성황당과 우리의 서낭당의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는 명백한 잘못인 것이다.




우리네 마을 신앙의 원류인 '서낭당'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단군신화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단군 신화의 핵심은 


① 천손(天孫:하늘)   ② 나무(神壇樹:신단수)   ③ 모계(母系)의 부각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특히 신(神)+단(壇)+수(樹)는 세계목(World Tree), 우주목(Cosmic Tree)등의 개념 용어보다는 더욱 구체적이고 명징하게 우리 서낭당의 원형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단어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언제나 나무와 돌담으로 이뤄진 마을 서낭당을 목도할 때마다, 태백산 신단수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런 연유로 하나하나 만나게 되는 고래의 서낭당들은 모두 신비롭고 환상적인 존재로 나에게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쉽게 꺼내놓지 않는 이유는, 단군과 위서를 근거로 삼아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무리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될까 봐 저어되기 때문이다. '서낭당'과 '단군 신화'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시 기술해 보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왜 성황당(城隍堂)이 우리式의 이름 지음이 아닌지 살펴보았지만, 사실 성황당이 오류라는 것을 논증하기보다는, 먼저 우리 '서낭당'의 기원과 성격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잘못 불리고 있는 성황당이라는 오명을 탈피하는데 더욱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서낭당이라는 말의 어원이 선왕당, 천왕당 등에 있다는 설(說)이 있기는 하지만, 표음/표기의 관점에서만 접근했을 때는 사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거론되는 연원들 모두 자의적인 해석과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심지어는 노변 서낭당(누석단)과 마을 서낭당(동제당)에 대한 개념적 구분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나 또한 서낭당이란 말의 기원을 밝혀 보고는 싶지만, 개인적으로도 근거가 불명확한 서적들을 근거로 연원을 살펴보기에는 마뜩지 않고, 반대로 근거가 확실한 문헌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황당(城隍堂)은 우리의 마을 제당을 지칭하는 데에는 사용하기에 부적절한 이름이라는 것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음이다.




#「쉬어가는 글」세 번째 편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이는 관치 성황(官置 城隍)의 성격과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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