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치혜 Aug 30. 2024

歌痕18. 初秋斷想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열대야와 무더위, 그리고 잦은 비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엊그제 출근길에 문득 하늘을 봤는데, 맙소사. 구름 한 점, 티끌 하나 없이 파.랬.다! 햇볕은 비록 며칠 전까지의 따가움은 없이 여전히 뜨거웠지만 하늘만으로 충분히 가을이었다.



   초추의 양광.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옛날 교과서에서 읽었던 안톤 슈낙의 글이 떠올랐다. 슈낙은 삶의 변화를 느낄 때마다, 우리 안에 깃드는 고요한 슬픔을 표현했다. 그 글이 단순한 문학적 감수성 혹은 아포리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초추의 양광처럼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면서 실생활에서는 쓰지 않을 의고체의 단어가 떠올랐다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각일까.     


   지지난주 중고등부 전국연합회가 주최한 찬양 대회의 사회자로 행사를 진행했다. 10년 가까이 이 역할은 내게 큰 설렘과 즐거움을 주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사회자로 서게 되리라는 생각이 스치니 조금 쓸쓸했다.

   사회자로서 진행용으로 학생들에게 줄 선물을 구입하러 스타벅스에 들러 텀블러를 샀다. 엄청 비싼 텀블러. 내가 보기에도 참 예쁘고 탐난다. 거부하기 어려운 물질문명의 찬란함이여. 지난 경험으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이다. 텀블러를 사니 사은품이라며 음료 쿠폰을 주었다. 매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고 개인 용기를 가져오면 테이크 아웃도 가능하단다. 

   아르바이트 청년은 심지어 가격 제한 없이 비싼 음료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지만, 도대체 스타벅스에서 비싼 음료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프라푸치노를 이야기해 주었는데, 나야 마셔본 적이 없었다. 마실 일이나 있을까 싶기도 했고. 그저 에스프레소나 뜨아, 아아, 가끔 라떼 종류나 마셨을 뿐이니. 도대체 세상에 이렇게 알 수 없는 음료와 음식, 놀거리 먹거리 등등의 이름은 왜 이리 창궐하는가, 어지러울 정도로.

   그 며칠 후 퇴근하다가 더운 날씨에 홀린 듯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가방에 텀블러가 있었고,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골랐다. 

   "아이스 프라푸치오, 갖고 갈게요.“

   맙소사. 아이스 프라푸치오라니! 프라푸치노가 본래 차가운 음료에 얼음까지 더한 것인데 아이스 프라푸치오라니. ‘차가운 아아주세요’라고 한 것이다, 맙소사. 더구나! 프라푸치오라니! Frappuccino라고 스펠링까지 외우고 있는 내가 ‘프라푸치.오.’라니. “갖고 갈게요.”라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해지며 음료를 받자마자 빠르게 들고 나왔다.

   텀블러를 쪽쪽 빨며 길을 걷다가 – 쪽팔려도 더운 건 더운 것이므로 - 깨달았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게 예전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말해 정말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낯선 것에 도전하는 데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해졌다는 현실이 안톤 슈낙이 말한 바로 그 '고요한 슬픔'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고. 


   뇌로 가는 혈액의 양이 전체 대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머리를 쓸수록 혈액이 체력을 소모하는 양이 많아지므로 나이가 들수록 학습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의지와 집중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이제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영상 편집이나 그래픽 프로그램, AI 프로그램을 배우겠다고 책을 사놓고도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내 자신을 보며, 나는 "게을러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그게 나이가 들어감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 때문임을 안다. 주변을 보면, 우리 또래들은 아직도 생기가 넘치고, '늙었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너무 이르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점점 버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부인할 수 없는 것 또한 고요한 슬픔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의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 아직도 발랄하고 발칙하고 삐딱한 시선을 유지해 보고 싶다. 당당하고, 활기차게, 엉뚱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배울 것은 많고, 부러워할 대상도 많다. 눈과 입으로 익혀야 할 온갖 놀거리, 먹거리들과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아 태어나는 수많은 단어들이 넘쳐난다. 그래픽과 영상으로 확장되는 세상은 얼마나 오묘하고 아름다운가. 어느 시인이 청춘은 인생의 특정한 시기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가슴이 뛰고 용기가 있는 한 여전히 청춘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청춘’하련다.    

 

   가만.

   그런데 젊은이들은, 청춘들은 스스로 청춘임을 이렇게 힘주어 명명하고 정의하고 자부하지 않잖아. 그냥 있어도 청춘이고 젊은이므로. 중언부언하는 나는 그리하여 역시 늙어진 것인가? ‘초추의 양광’ 하에 잠시 고민해 보는 ‘청춘’인 것이다!


https://youtu.be/vHXrZGPFlVI?si=hbhqFsYs3BEHhGed

매거진의 이전글 歌痕17. 換골脫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