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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Jun 29. 2024

歌痕17. 換골脫때

Changes   - Black Sabbath

   해본 일보다 안 해본 일이 훨씬 많은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히 해봤을 것 같은데 해본 적이 없는 일들도 있다. 내게는 목욕탕에 가서 세신사분에게 몸을 맡겨 때를 미는 것이 그런 일 중의 한 가지이다.  - 사실 이 세신사(洗身士)라는 단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과공비례로 쓸데없이 한자를 만들어서 붙인 느낌이 든다. 옛날에는 그냥 때밀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지나치게 비하하는 말이라서 또한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때미는 분 정도로 그냥 쓰면 어떨까? -

   요새 계속 피곤이 쌓여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가 냉탕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다가 사우나에서 땀을 쭉 뺀 후 때를 시원하게 밀고 한잠 자고 나면 피곤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코로나 이후로 대중목욕탕을 간 적이 손꼽을 정도이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 목욕탕 가는 일이 1년에 손꼽을 정도로 중요한 이벤트였음을 떠올려보면 사는 게 발전한 건지 아닌 건지 다 거기서 거기인 건지 모를 일이다.

   온탕에 앉아서 한참을 몸을 불리고 또 수중 안마기에 - 그게 안마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 몸을 맡기고 있다가 또 냉탕을 들락거리다 때를 밀려고 샤워꼭지 앞에 앉았다. 온몸에 기운이 너무 없어 축 쪼그라들었는데 문득 ‘세신’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세신’ 2만 원부터 시작해서 무슨 무슨 마사지 등등 해서 3만 원, 4만 원, 5만 원 하는 그런 서비스였다. 세신까지는 모르겠고 등을 민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런 서비스가 있으면 해보려고 찾아봤는데 없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래 한번 내 몸을 맡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이제까지 몇 차례 해보긴 했지만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왠지 내 몸을 나랑 연배가 비슷하거나 높을 어떤 분에게 적은 돈으로 맡긴다는 것 자체가 좀 건방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남자로서 특정 부분이 돌출되어 그 부분을 대놓고 드러내 보이는 것이 민망하다는 생각이었다. 복부비만 정말 큰 문제다. 뱃살 빼려고 엄청 신경을 쓰건만 효과는 미미하고, 몇 달을 낑낑거려 겨우 붙잡았다 싶다가도 단 몇 차례의 과음 과식이면 도로아미타불이니 이처럼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이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간지럼을 많이 타는 편이어서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만지는 것에 되게 민감한 편이다. 때미는 분이 열심인데 간지러워서 못 참으면 어떡하나 하는 이런 좀 아이 같은 걱정도 있었다.


   때 미실 분은 벨을 누르세요. 눌렀다. 잠시 후에, 나보다 조금 더 연세가 들어 보이는, 파란색 반바지를 입은 분이 와서 세신하실 거냐고 물었다. 잠시 멈칫, ‘네’ 했다. 그분은 목욕대(?) 혹은 마사지대(?)라고 할 넓적한 침상에 바가지로 더운 물을 시원하게 뿌려 닦아내고 나더러 거기에 똑바로 누우라고 했다. 왠지 좀 부끄러운 느낌에 수건이나 바가지를 떠올렸지만 그대로 누웠다. 한편으로 ‘그래 이렇게 누워서 때를 밀어주는 동안 느긋하게 한잠 잘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때를 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좀 부드럽게 때를 밀 것이라h 막연히 예상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굉장히 터프한 손길이 내 몸을 정말 ‘쓱싹쓱싹’ 훑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오른손등부터 시작했다. 내가 손에 힘을 빼고 맡기고 있자니 내 손이 자꾸 툭툭 떨어졌다. 때미는 분이 팔에 힘을 주라고 말했다. 잠들기는 틀렸구나, 힘을 줬다. 손가락 끝부터 시작해서 손등, 팔뚝, 어깨까지 그분은 때를 밀어냈는데 부위별로 부분 부분 미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쭉쭉 거침없이 밀어냈다. 민망해서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때가 마치 지우개 똥같은 익숙한 모양으로 후두둑거리며 떨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목욕탕에 와서 때를 민 지가 벌써 몇 개월 만이니, 그야말로 추풍낙엽이렸다.

   전문가의 손길은 계속되었다. 오른팔을 다 마친 그분은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가슴과 배,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쓱쓱싹싹 너무나 시원하게 밀었다. 한편으로는 좀 아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 경미한 통증이 스친 자리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하고 시원한 느낌이 화~하고 불어오는 듯했다. 가려운 등 한가운데를 효자손으로 정확히 짚어 긁었을 때의 시원함과는 다른 시원함. 여름의 뜨거운 날 농구 한 게임하고 벌게진 얼굴을 찬물로 두 뺨을 토닥거렸을 때의 청량감? 칼 면도를 마친 피부 위에 멘넨 스킨브레이서를 바르고 난 후 느껴지는 짙은 알콜향의 휘발감? 아무튼 상쾌했다.

   나는 순서대로 똑바로 누웠다가 옆으로 누워보고 그다음에 자세를 바꿔서 다시 똑바로 눕고 또 왼편으로 돌아 옆으로 눕고 마지막으로는 엎드린 자세로 몸을 맡겼다. 느낌만으로도 내 몸에 지난 몇 개월 동안 쌓였던 죽은 세포들이 다 밀어져 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얼마나 때가 밀렸나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정말 민망하기도 했고, 행여라도 산처럼 쌓인 한 무더기를 보기라도 한다면 너무나 창피할 것이라서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중간중간 물을 내 몸에 뿌려 닦아내고 밀고 하더니 때미는 분은 거품을 내어 내 등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까지, 샤워는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때를 미는 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이다. 샤워는 내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봤는데 온몸에 고루 약간 발그스름하게 자극이 주어진 흔적이 보였다. 손으로 팔뚝이며 가슴이며 배를 쓸어봤더니 정말 매끈했다. 맞다. 나는 원래 이렇게 비단결 같은 피부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불과 15분 20분 남짓 만에 이렇게 새로운 생명체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어메이징~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에 아버지와 목욕탕에 같이 가서 아버지가 때를 밀어주었던 아마 초등학교 한 1, 2학년 정도까지를 제하면 거의 나 혼자 가서 목욕을 했다. 가끔 사촌 동생이나 친구들이랑 같이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 이외의 내 몸 구석구석은 온전히 내 손길만이 허락되었다. 40여 년 동안 비장되었던 내 몸 구석구석을  이 때 밀어주는 분은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파악하여 말끔하게 밀어낸 것이었다. 전문가의 내공, 생활의 달인. 목욕을 마치고 나와 요금 2만 원을 드리고 커피 한 잔 드시라고 5천 원짜리를 한 장 드렸더니 그 분은 내 손이 무안할 정도로 지나치게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때미는 서비스를 이용하며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2만 원이라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과 20여 분 안팎의 시간으로 이렇게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정밀 기계로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내 온 몸이 탈피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더욱이 때를 다 밀고 나서 그분이 머리와 어깨 등을 마사지 혹은 지압으로 눌러주었는데 그야말로 '피로야 가라!' 소리가 절로 나올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무게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후한 서비스의 댓가가 2만 원인 것은 지나치게 싸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사람값과, 그렇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 사이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해타산과 공리는 함께 설 수 없는 것인가.

   두 번째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그냥 전해들은 이야기나 추측이 실제와 얼마나 어긋나는가 하는 평범한 사실의 재확인이었다.

  나는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에서 접했던 기억으로 때를 미시는 분들이 박수를 두 번 탁탁 치면 돌아눕고 또 두 번 탁탁 치면 돌아눕고 이러리라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프로의 세계는 박수 대신 정중함과 친절함이 있었다. 그는 돌아누우세요 옆으로 누우세요 안내를 했고, 그것이 때를 밀기에 가장 적절했다. 착각이나 와전이라는 단어로 단순 포장하여 나는 그간 얼마나 많은 편견과 왜곡으로  수많은 것을 재단해 왔을까. 백문이 불여일견, 경험보다 좋은 선생은 없다.

   마지막으로 나의 성적 지향은 스트레이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내 온몸을 이렇게 남의 손길이 훑고 지나갈 때 만의 하나라도 어떤 이상한 감정이나 혹은 반응이나 하는 것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면 얼마나 민망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잠깐, 아니 심각하게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럴 겨를이 없게 몸을 긴장시키고  아프다 할 정도의 정도의 자극이 있어서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민망할  감정이 일나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하긴 때 한  밀고나서 이런 정의와 분석을 하는 게 뭔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주절주절 그렇단 이야기이다.


   때를 이렇게 시원하게 밀어 본다는 걸 봤다는 것이 어찌 보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거의 최초가 아닐까 싶다. 때를 밀다 보면 기운이 빠져서 어떤 부분은 그냥 대충 하기도 한다. 아니면 뭐 '오늘은 상체까지, 다음엔 하체 중심' 같은 헬스클럽에서나 함직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볼품없는 육신을 구획정리하기도 하고. 오늘은 그야말로 탈피한 아기곤충의 기분이 이럴까 할 정도의 상쾌함과 개운함이 온몸에 퍼졌다.

   換골脫때! 생각을 바꾸어 때에서 탈출하다!


   다음에 또 때미는 분에게 내 몸을 맡길까? 기분으로는 그렇게 하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아직은 내 몸을 이런 씻는 일 따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정도가 되면 안되겠다 싶다. 지금은 조금 더 움직여야 되고, 조금 더 힘을 쓰고, '나는 건강 하다'는 자위를 해야하는 그런 나이인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 내 때를 밀어준 분은 내 앙상한 허벅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아니다라며 혹시라도 비웃지는 않았으려나, 상상을 해보면서 새삼 운동을 해야겠다라는 각오를 '또' 다져본다. 

   몸이 너무 내 몸이 아니다. 그야말로 초라한 몽뚱아리, 보기에 초라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몸을 쓰고 움직이기가 너무 남루해져버린 이 몸뚱아리를 더 괴롭히고 좀 더 힘을 불어넣어야 하겠다. 힘을 불어넣는 방법은 운동밖에 없다. 열심히 '좀' 하자!


https://youtu.be/sNgiN8hXK6M?si=aD-5ovaIRdXDd5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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