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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미남편 Mar 26. 2024

day10 산토도밍고-토산토스

4km 만 먼저 갈께요

산티아고 순례길 10일 차(산토도밍고-토산토스)


시간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것 같다. 벌써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10일째 되는 날이다. 아직까지는 크게 아픈 곳 없이 무탈하게 잘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 잠을 자기 전에 일기예보 에서 오늘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10일 동안 한 번도 비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비 예보를 접하고 비가 오는 날이 처음이라 일일 옷을 비닐봉지에 넣어 싸고, 젖으면 안 되는 물건들은 지퍼팩에 담아두고, 배낭 방수커버를 씌우고, 우의도 따로 준비하는 등 나름의 완벽한 준비를 했다. 사실 어차피 우의를 입을 것이고 배낭에 방수커버를 씌울테니 이렇게 까지 과하게 할 필요는 없을텐데 처음 만나는 비예보에 mbti 가 j 인 나는 만발의 준비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다행인지 아침엔 비가 오기 전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바람 많이 부는 먹구름 낀 날씨를 매우 좋아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덥지 않으며 쾌적하게 걸을 수 있었기에 아침부터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좋아하는 날씨에 좋은 컨디션에 하지만 좋은 기분과는 별개로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와 나는 먹구름 속으로 조금씩 걸어 나아갔다. 처음 출발할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한 시간 정도를 걷다 보니 드디어 비가 오기 시작했다. 10일간 우의를 한 번도 썼던 적이 없어서 가방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배낭을 무겁게 하고 있는 우의에 대해 무언가 불만이 있었는데 오늘 우의를 사용하면서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우의를 뒤집어쓰고 비를 맞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우산이 없이 내리는 비를 '그래 그냥 다 맞아버리자' 하고 철없이 비를 맞았던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항상 비가 올때는 우산을 챙기거나 우산이 없을땐 비를 최대한 덜맞기 위해 뛰어다니기만 했던 한국에서의 삶과 는 상반되는 행동은 오랜만에 느끼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비는 그리 오래 오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비를 맞는 행위가 모든것을 내려놓았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이 생각보다 꽤나 좋은 기분이었다. 빗속에서 아내와 큰소리로 떠들며 웃으며 걸었던 길이 아직까지도 너무 행복하게 머릿속 한켠을 자리잡고 있다. 

멀리 먹구름속으로 가야한다.

출발일 전날 항상 다음날 목적지를 어느 정도 정해놓고 길을 걷는다. 원래 오늘의 목적지는 벨로라도 라는 곳이었다. 벨로라도는 산토도밍고에서 20Km 정도만 가면 도착하는 곳이었는데 아침에 조금 일찍 출발한 덕분인지 아니면 어느새 걷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걷는 속도가 빨라진 덕분이었는지 벨로라도에 도착한 시간이 12시도 안된 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기다렸다 마빈이랑 인사라도 하고 오는 것이었는데... 비가오는 길을 걸어본적이 없어 아침부터 바쁘게 준비하고 나오면서 마빈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길을 나선 우리였다.


12시도 안된 시간에 목적지 였던 벨로라도 알베르게에 가보니 지금은 너무 이른시간 이고 1시가 되면 문을 연다고 했다. 비가 오다 그쳤지만 아직은 구름이 많이 있어 해를 가려주었기에 덥지 않은 날씨덕인지 짧은 거리를 걸었던것 때문인지 아내와 나도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컨디션이 꽤 좋은 상태 였다. 알베르게가 문을 열때까지 1시간을 이곳에 기다리며 일정을 끝내기 보다는 걸을 수 있을때 조금더 걸어보자는 생각에 벨로라도에서 4Km 뒤에 있는 토산토스라는 마을에 가기로 아내와 협의했다. 토산토스는 아주 작은 마을로 웬만한 순례객들은 그냥 지나쳐가는 마을인데 우리는 오늘 조금 더 가면 내일 조금 덜 걸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걸어 가보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여보 컨디션 어때 괜찮아? 더 걸을 수 있겠어?"

"응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가 날도 시원하고 다리도 안 아프다"

"그럼 다음 마을까지 4km 정도니깐 그냥 마을 하나 더 갈까?"

"좋아"


아내도 나도 좋았던 컨디션에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던 이후 처음으로 계획대로 하지 않고 마을 하나를 더 가고자 했다. 역시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다. 그냥 우리가 하고싶은대로 하면된다. 하지만 웬일 벨로라도를 체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난 듯이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벨로라도 알베르게에서 고작 10분 정도를 더 걸어왔는데 너무 많은 비가 내려서 순간적으로 그냥 벨로라도 에서 하루 묵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벨로라도에서 묵으려면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야 했다. 고작 10분을 다시 돌아가는 되는 것이지만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이미 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인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아마 누구도 왔던길을 다시 걸어가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가야 할 길이 돌아 가는 길보다 먼 길임이 확실함에도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당장 내일 걷는 거리를 조금 줄이고 싶어 목표했던 마을을 지나쳐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정말 순간의 선택이 많은걸 좌우 하는 것 같다. 너무 좋은 컨디션에 마을을 하나 더 가자고 말을 꺼냈던건 아내가 아닌 나 였다. 결국 내 발언으로 인해 폭우를 맞아야 하는 아내를 보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여러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났지만 그럼에도 발걸음은 조금씩 토산토스를 향하고 있었다. 가방 속에 넣었던 우비를 다시 급히 꺼내 입었지만 우비는 있으나 마나였다. 신발이 젖기 시작했고, 주변에 비를 막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미 마을을 벗어나서 허허벌판 속을 걷는데 비 피할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비는 점점 거세져 천둥에 번개까지 내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재난영화의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재난 영화 속에는 언제나 컴컴헌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보인다. 우리에게도 영화 에서처럼 5분 정도를 더 걷자 마치 사막 속에 오아시스처럼 주유소가 하나 나타났다. 아내와 나는 주유소 처마 밑에서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서로를 보고는 웃었다. 우리 말고도 주유소에 발이 묶인 외국인이 있었는데 그들도 우리를 보며 웃었고, 우리도 그들을 보며 웃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신발이 다 젖고 머리가 다 젖어도 우리는 그냥 웃을 수 있었다. 아마 한국 이었다면 비를 맞았다는 생각에 온갖 짜증을 다 냈을 텐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언제 어떤 상황이 와도 웃어넘길 수 있었던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주유소 처마밑에서 30분정도를 기다리니 다행인지 비가좀 잦아들었다. 아마도 벨로라도에 그냥 멈춰있었다면 지금쯤 알베르게를 들어가 쉴수 있었겠지만 토산토스까지 조금더 걸어갸야만 했다. 조금더 기다리니 비는 완전히 멎었고 그렇게 우리는 40분정도를 더걸어 토산토스에 도착했다. 


토산토스는 작은 마을이라서 알베르게가 두곳 뿐이었다. 알베르게는 공립 알베르게 1곳과 사립 알베르게 1곳이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도네이션 제도 이다. 말그대로 정해진 금액 없이 알베르게에서 숙박을 하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비용을 지불 하면 된다. 금전적으로 힘들어진 상태를 인지 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무료 수준에 잘 수있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어야 할지 10유로 가격에 사립 알베르게에 묵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잠자리에 조금 예민한 편인 나는 공립 알베르게의 시설이 너무 좋지 않아 보여 결국 사립 알베르게로 갔다. 사실 자금 사정을 고려했다면 공립 알베르게에서 10유로보다는 조금 적은 돈을 내고 묵었어야 했지만 아내에게 현재의 우리 재정상태를 알리지를 못한 상황이라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며 다른 쪽에서 비용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립 알베르게를 들어가게 되었다.


규모가 작은 마을이다 보니 알베르게가 거의 없었고,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곳의 마을이 아니었기에 토산토스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다. 사립 알베르게를 급하게 검색해서 들어오긴 했기에 복불복 이었지만 다행이도 알베르게의 컨디션은 생각보다 꽤나 괜찮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마자 우선 비 맞은 옷을 모아 세탁기를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내일을 위해 손빨래를 하겠지만 비맞은 옷가지를 일일히 다 손빨래 하고 말리기도 어려워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이용했다.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의 알베르게 에서는 보통 세탁기 3유로, 건조기 3유로 정도의 금액으로 유료 사용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보통은 그돈을 아끼기 위해 손빨래를 하지만 오늘만큼은 비용을 지불 하더라도 문명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샤워를 마친 우리는 마을을 산책하러 나왔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언제 비가왔냐는 듯 해가 쨍쨍 나고 있었다. 토산토스는 마을 한 바퀴 스윽 돌아봤는데도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작은 마을 이었다. 차라리 벨로라도에 그냥 머물었으면 좀 더 마을을 보는 재미도 있었을 것 같고, 인프라도 토산토스 보다는 좋았을 테니 저녁도 장을 봐서 만들어 먹을 수 있었겠지만 순간의 선택으로 더비싼 알베르게에서 묵었고 세탁기 건조기에 비용도 지불 해야했었고, 마트가 없었기에 저녁도 사먹어야만 했었다.  


나헤라 이후로는 머릿속에서 비용을 계속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상황이 생각한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비용을 줄여야 겠다는 생각만 하고 오늘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 더 걸은만큼 내일은 조금 덜 걸어도 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만족 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식당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자 메뉴가 있다. 순례자 메뉴는 와인과 물 중 한 병을 제공해주고 에피타이저, 본식, 디저트를 차례대로 제공해준다. 가끔 에피타이저는 없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10유로 정도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와인 값도 포함하여 10유로니 한국과 비교해도 정말 저렴하게 식사를 제공해주는 편이다. 토산토스는 마을이 너무 작아 마트도 없고 오늘은 늘 같이 저녁을 먹던 한국 사람들도 없어서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를 주문해 먹어야만 했다. 돈을 아껴야 겠다는 이유로 아내만 먹이고 나는 먹지 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여보 난 오늘 배가 별로 안고픈데 여보만 저녁 먹을래?"

"그렇게 걷고 어떻게 배가 안 고파 같이 먹자"

"아냐 난 괜찮아"

"오빠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래"


인간의 3대욕구중 하나가 식욕이라고 하던데 돈을 아끼는 것 보다 당장의 배고픔을 이기는것이 너무 힘들었던 탓인지 못이기는척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직 아내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말은 못 했으니 아내는 저녁식사 외에도 아이스크림을 더 사먹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를 또 무시 할 수가 없었다. 조만간 아내에게 우리의 재정상황을 공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 같았다면 저녁을 만들기 위해 장을 보러 갔어야 했고,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만들어야 했고, 먹고 나면 먹고 남은 식기들을 또 치워야 했지만 저녁을 사먹기로 한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호텔을 갔을때도 느꼈지만 역시 돈이 최고다.

순례자 메뉴에 포함된 와인


"물 드릴 까요? 와인 드릴까요?"

"와인 주세요"


아내도 나도 그렇게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사실 술을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 헌데 산티아고 순례길에 와서는 어쩐 일인지 홀짝홀짝 와인을 잘도 마신다. 왠지 물 또는 와인이 공짜라는데 와인을 선택하지 않으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것 같다. 둘 다 술을 마시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공짜라는 말에는 안 먹으면 손해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와인을 시키게 되는데 여기는 보통 와인 한잔 정도를 주는게 아니라 한 병을 그냥 다 준다. 그럼 또 우린 술은 남기는 거 아니라고 하면서 한 병을 꾸역꾸역 다 마신다. 개인적으로 술마시면 몸이 꽤나 힘들어 하는 편인데 그렇게 술을 마셔놓고는 또 좋다고 막 웃는다. 


와인으로 분위기를 내며 남이 차려주는 저녁을 먹는데 꽤나 맛이 좋았다. 에피타이저로 러시안 샐러드가 나오고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등이 함께 나오는데 한국에 와서도 이때 먹었던 샐러드가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이곳에서 먹은 저녁은 아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30여 일 중 가장 맛있는 저녁으로 기억 되었다.


잠시 비가 그쳤던 하루는 저녁이 되자 다시 비가 왔고 마을을 산책하던 잠깐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비가 왔기에이제 비는 충분히 즐겼으니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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