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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미남편 Apr 24. 2024

day18 베르시아노스-만시아

연!차!수!당!

산티아고 순례길 18일차 (베르시아노스-만시아)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발걸음을 서둘러 보았다. 이틀 전 발목이 아파서 잠시 뒤처졌던 날부터 보이지 않았던 산악인 아저씨, 아만다, 벨로리 등등을 조금 빨리 걸으면 혹시나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 일찍 일어나 빠른 속도로 길을 걸어 보면 어떨까 싶었기 때문이다. 속도의 차이가 나더라도 하루에 걷는 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목적지나 중간 중간 bar에서 만날 법도 한데 이틀째 보이지가 않았고 나름 보름간 함께한 까미노 동지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게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걸음을 재촉해 보았지만 만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었다. 


피로가 누적되어 발저림과 발목통증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내와 나는 이제 걷는데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을 걸을 때 서로간 간격이 벌어지지 않았고 언젠가 부터 둘이 걷는 속도가 비슷해져서 발을 맞춰 이야기를 나누며 걷게 되었다. 


과거의 반성을 새까맣게 잃어버린채 나는 또다시 담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한동안 잘 참아 왔는데 주먹밥 커플 중 한 명이 담배를 태웠고, 어제 같이 저녁을 먹은 한국인 아저씨가 산티아고는 자유의 길이라며 담배를 다시 피우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잠시간 수그러 들었던 흡연 욕구가 엄청나게 커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보 길을 걸을 때는 너무 힘드니깐 그냥 담배를 피우게 해 주고 대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그때는 진짜 끊어볼게"

"오빠 지금 다시 피우면 그동안 참은 보름이 너무 아깝잖아"

"아니야 전혀 아깝지 않아 다시 피우면 행복할걸?"

"그럼 오빠 지금 딱 한대만 피우고 다시 안 피우면 안 돼?"

"그냥 산티아고 도착할 때까지는 허락해주자"

"아냐 오빠 지금 피우면 앞으로 다시는 끊지 못할 것 같은데"


당시 나는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고 속상하게 하면서 담배를 계속 피울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게 하면 아내는 당연히 속상해할 것이고, 아내의 허락을 통해 담배를 피운다면 그만큼 나도 죄책감이 없어지고 아내도 속상함이 덜 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집요하게 아내에게 담배피우는 것에 동의를 요구 했다. 하지만 아내는 완강 했다. 


아마 아내가 제안한 한까치 의 담배를 피웠다면 까미노 길 내내 담배를 피웠을 테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열변을 토해놓고도 다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오전내 담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다 보니 아내도 어느새 내얘기에 지쳐 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담배 이야기를 멈추고 다른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걸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담배 얘기만 계속했다.

오늘도 어제 처럼 날이 따뜻했다. 따뜻하다 못해 햇볕이 뜨거웠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스페인의 날씨 인것 같았다. 베르시아노스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만시아까지의 거리는 27Km의 짧지 않은 거리이지만 날이 너무 좋았고 한동안 느꼈던 발 저림과 발목의 통증도 거의 없어서 오랜만에 좋은 컨디션으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길을 걷다 보면 당연히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게 된다. 처음엔 우리 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어느샌가 정치, 경제, 문화 등 폭넓은 주제들로 화제가 전환되기도 한다. 걔중에 우리가 가장 신나게 이야기했던 주제는 음식인 것 같다. 이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고, 우리나라 음식이 그리워질 때쯤이라 우리는 먹고 싶은 음식을 상상해보면서 서로가 무엇이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걸어 나갔다. 아내는 가장 먹고 싶었던 메뉴가 칼칼한 짬뽕과 수제비 라고 했다. 

오늘도 하늘은 파랗고 날씨가 좋았다.

긴축 정책을 하고 있던 우리의 자금은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 보다 빠른 속도로 소진되고 있었다. 메세타 평원 이전에는 마을도 많고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여건도 좋아서 계속 만들어먹는다는 계획을 세웠었지만 그건 메세타 평원을 모르고 생각한 계획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사 먹었어야 했으며 우리의 뜻과 다르게 세탁기를 돌려야 했고 공립 알베르게보다는 값이 조금 더 비싼 사립 알베르게에 묵는 경우가 더 많이 있었다. 우리의 의지와 다르게 계획한 것보다 많은 지출을 하는 상황이 지속 되고 있는 상태 였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세분화해서 통장에 넣어 두었었다. 얼마는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빠져나갈 공과금, 얼마는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나서 당분간 살아야 할 생활비, 또 얼마는 매달 매달 빠져나가는 보험료와 기타 등등 고정비 그렇게 우리는 탈탈 털어서 여행을 준비했었고 젊음의 패기 였는지 모르겠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남겨 두었던 통장에는 비상금 조차 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여행을 준비하고 시작했었다. 


날씨가 좋아지고, 몸의 컨디션이 조금 좋아졌던것 때문인지 한동안은 머릿속으로 아껴야지 라는 생각만 하다가 오늘에서야 얼마나 남았는지 혹시나 통장에 넣어두었던 돈들은 잘 빠져 나가고 있는지 또 우리가 돌아가서 써야할 생활비에서 얼마나 땡겨서 써야 이 여행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있는건지 현실적인 고민들이 머릿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버틸 거 같은 상황이 되어 여행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서 써야 할 생활비중 일부를 우선 사용 해야만 했었다. 


이날따라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bar 에 앉아 wi-fi를 잡고 생각난김에 잔고를 정리하고 오랜만에 은행 어플을 확인해 보았다.  


"어? 이게 모지?"

"오빠 왜 무슨 일이야?"

"우리 통장에 돈이 불어나 있는데?"

"응? 무슨 돈이 불어나?"

"원래 남겨둔 돈보다 잔고가 더 많아"

"입출금 내역 확인해봐바"


통장을 확인해보니 우리가 남겨두었던 돈보다 약 200만원 이상이 더 불어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시작할 때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했고 퇴직금까지 정산받았기에 더 이상 돈이 불어날 게 없다고 생각 했었는데 뜬금없이 올해 사용하지 않은 연차 수당이 회사로부터 입금 되어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었다. 3월에 퇴사를 하였기에 올해 사용할 연차가 꽤나 많았던 상황이었고 그 사용하지 않았던 연차수당이 퇴직금과는 별개로 퇴직한지 한달도 지나서야 통장으로 들어와 있었다. 퇴직금을 줄 때 같이 준 건 줄 알았는데 생각지 않게 여윳돈이 생긴 상황이 되어서 금전적인 부분에서의 힘듦이 갑자기 한 번에 해결이 돼버렸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것 같다.


한동안 걸으면서 따뜻한 날씨를 애타게도 갈망하던 우리였는데 막상 너무나도 뜨거운 햇볕과 바람을 만나니 아침과는 다르게 많이 지쳐 버렸다. 더운 날씨는 bar에서 먹는 시원한 콜라 한잔과 곳곳에 있는 그늘에서 쉬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지금까지는 돈이 부족 하다는 생각에 콜라가 마시고 싶어도 3번 참고 하나를 마셨고 하나를 시켜서 둘이서 나눠 먹었는데 오늘 만큼은 둘이서 각각 하나씩 시켜서 마실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를 고르라면 많은 메뉴들이 있겠지만 얼음이 띄워져 있는 콜라는 최강인 것 같다. 갑자기 생긴 생각지 않았던 여윳돈으로 인해서 이제는 길을 걷다 보이는 bar의 유혹에도 당당할 수 있었다.


날도 따뜻하고, 나도 아내도 아픈 곳이 없고, 금전적인 여유까지 생겨서 컨디션도 좋았다. 그간 못 봤던 사람들을 다시 마주치고 싶어 일찍 출발하고 빨리 걸었던 탓에 아주 훨훨 날아 만시아 알베르게에 도착 했다.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아직 알베르게에는 우리말고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조금 기다리다 보면 15일간의 동료들이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긴축정책에서 해방된 우리는 오랜만에 사치를 부리기로 하고 제대로 된 점심을 사 먹기로 했다. 저녁이었다면 10유로는 거뜬히 할 것 같은 메뉴가 점심이기 때문에 런치메뉴로 5유로 정도에 판매되고 있었고, 만들어 먹는 금액 만큼 저렴했던 덕분에 쉽게 결정을 할수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 저녁은 만들어 먹을 것이니 지금의 소소한 사치가 크게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점심은 외식' 을 외치며 알베르게 앞 BAR에서 점심을 먹고 있자니 오랜만에 부리는 여유에 아내도 나도 꽤나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점심을 다 먹고 나올 때쯤 주먹밥 커플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장을 보러 나갔다. 어제 못먹었던 삼계탕을 먹으려 했지만 생닭을 팔지도 않았고 오전에 아내가 노래했던 수제비 이야기가 기억나 내가 수제비를 만들어 먹자고 제안했다. 마트에서 밀가루를 사고 저녁에 마실 와인을 몇 병 산 뒤 내일 먹을 아침과 간식까지 두둑하게 챙겨 나왔다. 


역시 돈이 최고인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정말 필요한 몇몇 가지만 샀을 텐데 젤리에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사먹었다.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은 우리나라보다 외국 것이 더 맛있는 것 같다. 주먹밥 커플과는 조금 있다 저녁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아내와 나는 혹시나 다른 일행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만시아를 조금 돌아다녀 보았지만 역시나 보이지가 않았다.

이 메뉴가 단돈 5유로 

오늘의 저녁 멤버는 어제도 함께한 6명이었다. 주먹밥 커플 중 남자는 전직 요리사 출신 이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기 전 우리 집 음식담당은 아내가 아닌 나였기에 남자 둘이서 주방을 주도했다. 운이 좋게도 한국인 여성분이 북엇국 수프를 내밀어 국물은 북엇국 수프로 맛을 냈고 마트에서 산 밀가루로 반죽도 하고 나름 냉장고에 한 시간 정도 숙성도 시켜가며 수제비를 끓였다. 또 계란을 몇 개 사와 스크램블도 만들고 오랜만에 든든한 흰쌀밥도 만들었다. 


음식을 다 만들고 식탁에 차리고 보니 성대한 한식 만찬이 만들어졌다. 수제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꽤나 맛이 좋았다. 그리고 수제비 반죽을 한 숟가락 먹어보니 이런! 반죽이 수제비의 쫀득쫀득함이 아닌 푸석푸석한 식감이었다. 중력분인지 박력분인지 아마도 주식이 빵인 이곳 스페인에서 메인으로 판매되는 빵을 만드는 밀가루였나 보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어를 알지 못했기에 이게 밀가루네 하고 집어 온 것이 수제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밀가루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도 그리고 나머지 한국인들도 참 맛있게도 저녁을 먹었다. 아내가 수제비 수제비 노래를 했었고 맛있게 잘 먹길래 한 그릇을 다 비워 갈 때쯤 나는 또 한국자 떠서 아내 그릇에 덜어줬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수제비였지만 반죽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한 그릇 이상 먹기가 싫었단다. 대신 국물이 꽤 맛있어서 얼른 먹고 국물에 밥 말아서 스크램블이랑 먹어야지 생각을 했는데 내가 갑자기 한국자를 더 떠줘서 당황 했다고 한다. 

제대로 차렸던 한식 만찬

우리가 저녁을 먹은 식탁의 옆자리에는 마침 브라질 사람, 아르헨티나 사람, 포르투갈 사람이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갑자기 네이마르 메시 호날두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손흥민과 박지성을 이야기했다. 말이 100프로 통했던 것은 아니지만 바디랭귀지를 하면서 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거의 90프로 이상은 서로 통했다. 


나중에는 알베르게 호스트가 동참하게 되면서 그 재미는 몇 배로 더 늘어났다. 정말이지 알베르게 호스트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정말 유쾌한 사람이다. 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곳 알베에 잘 묵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알베르게 호스트가 아픈사람이 없는지 우리에게 물어왔다. 


"혹시 발에 물집이 잡히거나 발목이 아픈 사람은 없나요?"

"제가 발목이 조금 아파요"


라고 했더니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더니 어디서 톱을 가져와서 발을 잘라버리는 시늉을 한다.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더니 이번에는 어디서 유아용 한국어 교재를 들고 와서는 까미노를 찾는 한국인이 많아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며 '안녕하세요' 라고 어눌한 한국 발음으로 인사를 한다. 이 먼 스페인 땅에서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 줘서 고마웠다. 알베르게의 호스트 덕분에 그리고 같이 앉아있던 유쾌한 사람들 덕분에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저녁 먹은 것을 설거지를 하고있자니 알베르게 안쪽에 있는 정원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우리도 그곳에 앉아 노래를 함께 불렀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보니 하늘에 별이 가득히 떠있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기타와 노랫소리에 감미로왔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낭만이 가득한 만시아에서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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