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오늘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루간 휴식을 하며 재충전을 하기로 한 날이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새벽 6시에 눈이 떠져 버렸다. 길을 나서기 위해 알베르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소리에 나도 잠을 깨버렸지만 어떻게던 더 누워 있어 보려고 애를 써봤다. 여유를 부려도 되고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함을 느끼며 이불속에서 버텨 보았지만 8시가 되니 누워있는 것도 힘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주말 아침 늦잠의 행복함을 아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평소보다 몇시간 더잤다고 눈이 퉁퉁 부운채로 세수만 대충하고 어제 까르푸에서 샀던 씨리얼로 아침을 해결 했다. 아내와 앉아 오늘의 일정을 세우며 확인하니 아쉽게도 일기예보상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레온을 둘러보며 관광을 하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제대로 구경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고 하필 우리가 관광 하기로 한 오늘 비가 온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니 비 오는 날씨에 길을 걷는것 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는 비가 오니 좋다고 하더니 오늘 날씨처럼 내 마음도 오락가락 하나보다. 다행스럽게도 알베르게에서 우산을 빌려줬고 우리는 우선 아직은 오지 않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비를 대비해 우산을 들고 배낭을 메지 않고 관광객의 마인드로 길을 나섰다.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나면 영국에서 조금더 여행을 하다가 귀국 하려고 일정을 세워 두고 있었다. 아내는 산티아고가 끝나고 영국을 관광을 할 때 쓰려고 준비했던 화장품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얼굴이 많이 타서 화장품을 발라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 투덜 거리더니 그나마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생기 있는 얼굴이 됐다고 만족해 했다. 괜히 나땜에 힘든 길에 와서 피부도 상한 것 같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좋지 못했다.
알베르게를 나올땐 다행이 날이 맑았고 햇볕이 따뜻했다. 날이 좋으니 기분도 좋고 무거운 짐도 없겠다 아내와 오랜만에 사진을 수십장 찍어댔다.
오늘 우리의 첫번째 목적지는 레온 대성당이었다. 레온에는 어제 도착했지만 레온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 숙박을 해서 레온을 도착했음에도 아직 레온 대성당을 보지는 못한 상태였다. 일부러 성당에 찾아가 보니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성당과는 달리 규모가 꽤나 큰 성당이 있었고 성당의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1인당 6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다. 예전에 부르고스 에서 성당에 들어가서 구경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웠었기에 이번에 레온 성당은 입장료를 아끼지 않고 성당 내부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이렇게 큰 대규모의 성당을 들어가 본적이 없었는데 성당 안에 들어가보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압도 되는 기분이 들었다. 성당을 장식 하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너무나도 예뻤고, 해가 비추면 그 아름다움은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스테인드글라스 안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그림들은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스테인드 글라스 밑에 해설이 붙어 있지만 언어를 잘하지 못하니 그저 눈으로 그리고 사진으로만 담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안에서 같이 호흡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보다 보니 성당 안에 부르고스를 나올 때 부터 만나왔던 LA부부가 앉아 있었다. 서로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레온까지 우리 모두 성공했다 라는 무언의 인사를 했다. 종교적인 의미의 산티아고 순례길 이기에 우리가 들르는 대부분의 마을에는 성당이 있었기에 때로는 성당에 가서 미사도 드리고 때로는 순례자용 여권인 크레덴샬에 스탬프를 찍기 위해 성당에 들렀는데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 남은길을 건강히 잘 마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 오늘 역시 레온 성당 한켠에 앉아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 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만약에 레온에 도착한다면 꼭 가야하는 곳으로 점찍어 둔곳이 두곳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중국 마트였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아내가 그토록 염원하고 있었던 중국 마트이다. 중국인들은 어느 나라를 가던지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말은 중국 마트이지만 사실은 아시안 푸드 마트 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마트에 도착해서 보니 이것저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음식들이 많이 있었고 우리의 목표물 이었던 라면도 종류가 많이 있었다. 이것도 먹고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 아내는 마트 안에 진열돼 있는 음식들 중 진라면 매운맛2, 순한맛2, 북경짜장2, 참깨라면2 총 8봉을 빛의 속도로 골라서 손에 안고 있었다. 언제 또 중국 마트를 보게 될지 모른다며 욕심을 부리는 모습이 그저 귀엽게 보였다. 이제 남은 순례길 중 라면을 파는 곳이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아내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헌데 라면 8봉을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닌데 앞으로 이 8봉을 배낭에 넣고 다니면 무게도 무게거니와 부피를 무시 못하기 때문에 내가 4봉만 사는 것이 어떤지 걱정하는듯이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자신이 4봉은 어떻게든 짊어지고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포기 할 수 없다고 말을 했다. 부피는 꽤 되지만 무게는 그렇게 많이 나가는 것들이 아니기에 나도 못이기는척 그럼 모두 사자고 하고 8봉의 라면을 촤르르하며 계산대에 올리자 중국인 사장이 웃었다. 이렇게 많이 사냐는 그런 표정을 읽고 나도 함께 웃었다.
우리의 세 번째 목적지는 바로 중국식 뷔페 wok 였다. wok 은 우리의 세 번째 목적지이자 순례길을 걷는 내내 기다려 왔던 곳이다. wok 역시 중국식 뷔페라고 하지만 현실은 아시안 푸드 뷔페다. 한식 중식 일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있는 날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기 전에 준비하며 봤던 블로그나 여러 채널들을 통해서 wok 은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곳 이었다.
역시나 버스를 타고 가는 것 보다는 아무런 생각없이 또 걸어가는 선택을 하게 된다. wok 까지 가는 길은 1시간을 걸어야 했지만 wok을 향해 길을 걷는데 예쁜 건물들이 많이도 보였기에 걷는 것 자체가 관광의 일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은 가우디의 나라라고도 들었는데 이 예쁜 건물들이 가우디 양식의 건물이라고 했다. 실제로 가우디가 지었다는 건물들도 있다고 했지만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난 가우디가 누군지 가우디 양식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이 그렇다길래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레온 시내를 1시간을 걸어 드디어 wok에 도착했다. 12시 20분쯤 도착했는데 뷔페에 들어가려 했더니 1시부터 오픈을 한다고 했다. 어제 kfc 도 오픈시간이 1시더니 wok 도 1시인걸 보니 이곳의 점심시간이 우리나라와는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40분을 기다려야 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아내와 wok 근처의 벤치에 앉아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주먹밥 커플에게 연락이 왔다.
"wok 갔어요?"
"우리 지금 wok이에요 1시부터 오픈이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도 지금 갈게요 1시까지 도착할 것 같아요"
오늘도 주먹밥 커플과 끼니를 같이 한다. 벌써 며칠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식사를 같이 하니 식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난 외국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향신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라 중국이나 동남아 음식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베트남 쌀국수도 꺼려하는 편이다. 기다림의 시간을 마치고 들어간 뷔페에서 우선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뭐가 있는지 스캔 해보았다. 그동안 빵과 스테이크 말고는 사 먹는 음식 대부분 잘 먹지 못해 왔었기에 한식이 있다는 기대가 가득해서 들어가서 본 메뉴는 내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대부분 향신료가 들어가 있는 것 처럼 보였으며 음식 비쥬얼이 내가 생각했던 것 과는 참 다른 메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잔뜩 기대 하고 온 곳이었지만 제대로 음식을 먹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나의 아내는 너무 맛있다며 그리고 주먹밥 커플 역시 너무 맛있다며 맛있게 먹었다. 비록 나는 제대로 못 먹었지만 아내가 잘 먹는 모습에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기, 새우, 오징어 등을 즉석에서 조리해주는 음식이 있었는데 그나마 그게 먹을만했고 일부 디저트 류만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이었다. 식사를 다 마쳐갈 때 아내가 물었다.
"오빠는 뭐가 제일 맛있어?"
"아이스크림"
"음식이 이렇게 많은데 겨우 아이스크림?"
"여보만 맛있게 잘 먹으면 됐어"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아침에 확인했던 일기 예보 대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레온을 조금 더 관광을 해도 좋았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도시는 그냥 도시일 뿐이었다. 이런저런 공부를 하거나 가이드 투어 같은 게 있었으면 참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때는 레온에서 데이투어를 해주는 가이드를 해볼까?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까미노 에인절" 이름까지 나름 정했었다.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휴식과 정보를 제공해주며 레온이나 부르고스 같은 대도시의 데이투어를 같이 하면 꽤 장사가 잘될 것 같았지만 그저 상상만 할뿐 이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바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비가 오기도 했고 어제 한번 버스를 경험해본 덕분에 wok 부터 알베르게 까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바로 알베르게로 들어가 쉴 수 있었지만 점심을 배부르게 먹었기에 소화를 시킨다는 명목하에 아내와 알베르게 앞에 있는 까르푸를 한번더 들렀다. 내일 아침으로 먹을 햄버거를 만들기로 하고 빵과 계란 그리초 햄과 치즈까지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 왔다.
레온에서 1박을 더하며 무언가 많은 것을 보거나 알찬 휴식을 할 것만 같았지만 사실 특별히 한건 없었다. 하루의 휴식을 보내고 생각해 보니 내일은 또다시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레온에서의 휴식만을 기다리며 길을 걸었는데 내일부터는 다시 산티아고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걸어나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오늘처럼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겠지? 오늘과 같은 날을 다시한번 꿈꾸며 또다시 열심히 길을 걸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