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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미남편 Apr 23. 2024

day17 템플라이오스-베르시아노스

9시의 예술

산티아고 순례길 17일 차 (템플라이오스-베르시아노스)


오랜만에 날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비가오고, 우박이쏟아지고, 강풍이 불기도 했고 너무 추웠는데 오늘만큼은 정말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과 구름이 평소보다 더 예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본 하늘 중 가장 예쁜 하늘을 본 것 같은 날이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현실로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에 공감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 같았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정말 동글동글하고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해가 떠서 그런지 하늘은 아주 깨끗한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길의 양쪽으로 나있는 밀밭 길이 왼쪽은 초록색 오른쪽은 연두색으로 아주 예쁜 물감으로 그려놓은 듯 한 그림 같다. 하늘의 파란색과 구름의 하얀색의 조화는 사진을 찍는 그 순간 액자에 걸어 두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동안에도 아마 이런 풍경들을 보았을텐데 너무 추워서 비가와서 몸이 아파서 이런 풍경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을 오늘의 날씨가 이런 풍경을 눈으로 즐기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 일정중에는 '사하군'이라는 곳을 지나게 된다. 사하군은 프랑스길 800Km의 중간인 400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한다. 오늘로써 벌써 전체일정의 절반을 지나가는 날이었다. 사하군은 아무것도 없는 메세타 평원을 지나 오랜만에 만나는 대도시이기도 하다. 메세타 구간을 점프하는 사람들이 중간지점인 이 사하군에서 내려서 다시 걷기도 하고 반대로 사하군부터 레온까지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 점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절반 지점인 이곳은 나름 의미가 있는 곳이긴 하지만 사하군이 오늘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어제 헤어졌던 일행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을을 샅샅이 뒤지면서 길을 걸었다.

동키 서비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이 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원하는 목적지까지 옮겨다 준다. 우리는 아직까지 동키 서비스를 이용한 적은 없지만 전날 만난 주먹밥 커플 덕에 동키 서비스를 간접 체험하게 됐다. 배낭의 한계가 있어 많은 짐을 함께 붙이지 않았지만 적당히 무겁고 부피는 작은 몇몇 가지들을 그들이 이용하는 동키 서비스 배낭에 함께 넣었다. 덕분에 오늘은 조금 무게가 줄어든 가방을 메고 걸을 수 있었다. 대신 가는 길에 오늘 저녁을 같이 만들어 먹기 위해 마늘과 양파를 우리가 조금 준비해 가기로 했다.


며칠간 정말 추웠던 날씨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가방도 조금은 가벼워졌고 아팠던 발목은 전직 간호사 출신의 아내가 붕대를 감아준 덕분인지 아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려움 없이 템플라이오스를 떠나 두 세시간 정도를 걸었을 때 사하군이 나타났다. 사하군은 기차역이 있는 대도시 였다. 평소 같았으면 일정을 조절해 대도시에서 머물렀을 법도 한데 오늘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마을일 뿐이었다. 


사하군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마트를 찾았다. 작은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대도시에만 있는 큰 마트에서 저녁꺼리로 우리가 준비하로 했던 양파와 마늘을 먼저 손에 집어 들었다. 그리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려고 빵도 하나 집어 들고 마트를 둘러보면서 배낭을 메고 뒤로 돌다가 내 배낭이 진열해둔 종이팩에 담긴 음료수를 건드려서 음료수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음료수는 운도 없게 음료수 종이팩이 터져버렸다. 


우리가 마시려고 했던 음료수는 아니었기에 내가 다시 올려 두려고 하자 아내는 그러면 안된다며 터진 음료수 팩을 우리가 사가야 한다고 말을 했다. 순간적으로 아내에게 나는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아내에게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많은것을 아내에게 배우고 있고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양파, 마늘과 함께 바게트 빵 그리고 터진 음료수를 사서 마트를 나왔다. 음료수는 3개가 1묶음으로 되어있는 상태였기에 하나가 터졌어도 2팩이 남아 둘이 마실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동안 저녁을 먹을만한 식당이 없거나,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세탁기나 건조기를 돌려야 해서 예상한것 보다 비용 지출이 많이 됐던 관계로 지출을 줄이기 위해 가장 저렴한 바게트를 점심으로 먹었는데 생각보다 이게 맛있었다. 


"오빠 바게트가 왜 이렇게 맛있지?"

"제일 싼 거 사 왔는데 뭐가 맛있어"

"아니야 진짜 맛있어 음료수랑도 잘 어울려"


바케트 하나에 고작 1.5 유로 짜리의 빵이었고 이 빵하나가 우리 둘의 점심으로 대체되는 상황이었다. 아내 말을 듣고 나도 한입 베어 먹으니 우리나라에서 먹던 바게트와는 맛이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아내의 그 말이 나를 위한 배려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내는 지금까지도 로그로뇨에서 먹었던 크루아상과 사하군에서 먹었던 바게트가 제일 맛있었다며 다시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간 지점 이라는 표시석

오늘의 목적지인 베르시아노스에 도착하게 되면 주먹밥 커플과는 알베르게에서 삼계탕을 끓여 먹기로 했다. 기분 좋은 날씨와 함께 저녁에 맛있는 삼계탕을 먹는다는 생각이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어 주었다. 사하군을 빠져나와 베르시아노스로 가는 길의 풍경이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동안 비가 오고 날이 춥고 몸이 힘들어 제대로 경치 감상을 못했는데 하늘의 색깔은 너무나 아름다운 색이었고 구름은 처음 보는 모양의 구름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호락 호락 하지만은 않았다. 하늘은 우리를 시샘하나 보다.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여기 길가에 사람들 없으니깐 내가 가려줄게"

"아냐 저기 앞에 마을 보이니깐 그냥 참고 걸어가 볼게"

"저기 보이는 마을에 언제 도착할지 몰라"


실제로 메세타 평원에서는 가까이에 마을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생각보다 꽤 멀리 있는 경우가 많았다. 10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 거리에 있는 마을은 한 시간을 가도 아직 더 가야만 하는 상황이 자주 온다. 게다가 마을은 있지만 폐가만 잔뜩 있고 bar 가 없는 마을도 꽤 자주 나온다. 조금 더 참고 걸어보겠다는 아내가 참을만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그냥 걷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을은 멀어지는 느낌이었고 아내도 조급해졌는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기 길에 사람들 없는데 그냥 잠시 볼일 봐 내가 잘 가려줄게"

"아냐 싫어 조금 더 참을 수 있어"

"아니 그럼 짜증을 부리지 말던가 참을 수 있으면서 왜 짜증을 내는데"


그렇게 그 길을 걷는 도중 아내와 나는 잠깐이지만 아주 별 것 아닌 이유로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었다. 화장실이 가고싶다던 아내는 마을과 bar가 나타나지 않아 결국 2시간을 꾹 참으면서 말이 없어진채로 길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간판뒤에서 볼일을 보라고 했지만 아내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한바탕 소동을 마치고 나서야 오늘의 목적지인 베르시아노스에 도착을 했다. 우리가 원래 가려고 했던 알베르게는 약 10인 정도가 머무를 수 있는 알베르게였고 이곳은 주먹밥 커플과 만나기로 한 알베르게였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알베르게는 오늘의 수용인원이 마감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대도시를 지나 온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가 2곳뿐이었고 또다른 알베르게 로 가서 주먹밥 커플을 만날수 있었다. 시설은 조금 더 열악 했지만 언제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듯이 알베르게의 스텝들은 너무나 친절했던 알베르게였고 이 마을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였다.


헌데 안타깝게도 공립 알베르게는 쿠킹을 할 수 없는 알베르게였다. 원래 가려고 했던 알베르게에 가보니 주먹밥 커플이 알고 있는 한국인이 두 명 있었다. 한국인 두 명을 핑계 삼아 알베르게에 우리 오늘 다른 알베르게에 묵고 있지만 여기서 묵는 우리의 일행도 있으니 저녁에 주방을 이용할 수 있냐고 물어봤으나 당연히 대답은 "no"였다. 삼계탕을 끓여 먹자는 성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게 되버렸다. 


공립 알베르게에서는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저녁을 제공해준다고 했지만 사립 알베르게에 묵고 있던 한국인 두 명과 우리 부부 그리고 주먹밥 커플 이렇게 6명은 각자의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다 같이 모여 bar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내는 이 풍경을 보면서 화장실이 가고싶는 말만 했다. 

한국인 2명 중 1명은 우리와 피레네를 넘을 때 팜플로나를 지날 때 어쩌다 한 번씩 봤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던 남성분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우리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지만 조금씩 쉬어 가며 걷고 있다는 여성분이었다. 우리는 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모두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와인을 곁들이며 식사를 했다. 각자 까미노에 왜 왔는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서로의 생각들을 이야기하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주먹밥 커플을 제외하고는 처음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동지애가 생겼으며 서로 힘이 될 수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던 한국인 남성분은 원래 몸이 조금 아팠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자유를 얻고 있다고 했다. 몸 때문에 끊었던 술과 담배도 이곳에서는 허락하고 있다며 지금 금연 중인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듯이 아내에게 이 자유의 길에서 흡연의 자유도 허락해 주라고 했었다. 나도 동조하긴 했지만 끝내는 피우지 않았다. 


각자의 이야기들을 하며 와인을 한잔씩 하다 보니, 그리고 서로가 동지라는 알 수 없는 유대감에 우리는 조금은 진솔한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6명 중 결과적으로 우리만 둘이 같이 왔고 나머지 4명은 모두 혼자 왔었기에 우리를 그렇게도 많이 부러워했다. 사실 나도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그게 자부심을 주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저녁을 마친 우리는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부부와 주먹밥 커플은 꽤나 궁합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식사를 다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베르게 앞 벤치에 앉아 와인을 조금 더 마시기로 했다. 그동안에 항상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알베르게에서 다음날 갈 목적지를 확인하고 침대에 누워 쉬기만 했던 우리였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뒤 처음으로 저녁시간에 무언가를 하게 되는 순간 이었다.


우리가 갔던 스페인의 4~5월은 8시가 되면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고 9시가 되면 노을이 생기고 10시가 되면 해가 완전히 졌다. 그동안에 스페인에서 우리는 9시반이면 잠을 청했고 5시에 일어나는 얼리버드 였기 때문에 아침에 뜨는 해는 자주 봐왔지만 저녁에 지는해를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주먹밥 커플과의 와인 덕분에 처음으로 노을과 지는해를 보게 되었다. 처음본 메세타 평원에서의 노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까미노에서의 9시는 예술이라며 찬양을 하며 시간을 즐겼다. 


원래 나는 한국에서 술을 정말 마시지 않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큼은 와인을 참 많이도 자주도 마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날 와인을 마시면서 봤던 풍경은 순례길에서 봤던 풍경중 best 3 안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우리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항상 해가 지기 전인 10시 이전 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자는 것이 아쉬웠다.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한잔 하며 저 멀리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낭만이 있고, 분위기가 있고, 정말 그 어떤 날보다 멋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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