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지만, 함께라면
그녀는 꽃을 좋아한다.
그러나, 쇠질은 잘 모른다.
나는 쇠질을 좋아한다.
그러나, 꽃은 잘 모른다.
아니, 잘 몰랐었다.
우리가 동거하기 전까지는.
내가 쇠질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건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았던 때였다.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여름방학 때마다 한국에 들어오곤 했지만, 당시 가족 여행 일정 때문에 한국에 가지 않아서 딱히 할 것이 없던 방학이었다. 가끔 가족과 함께 농구를 하거나 탁구와 볼링을 치려고 집 앞 체육관에 가곤 했는데, 그곳에 있는 헬스장에 들어가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운동 기구들과, 만지면 손에 쇠 냄새가 배기는 덤벨들과 바벨들에 둘러싸인 나에게는, '길 잃은 어린양'의 수식어가 딱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르는 그 어떤 것에 이끌려 나는 그날 이후로 매일 유튜브를 통해 운동할 때의 정확한 자세와 운동 기구들을 사용하는 방법들을 숙지하며 그 헬스장을 다녔다.
사실 이때만 해도 내가 여행을 갈 때 숙소에 헬스장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조금 말랐던 체구를 가진 내가 운동을 하며 얻는 신체적인 변화와, 그 변화로부터 오는 시선의 변화들은 내가 운동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그 무엇인지 모르는 어떤 것을 뚜렷하게 해주었고, 나는 그것에 중독되어 버렸다. 운동을 많이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3대 500 정도는 가볍게 치는 사람들 중 한 명은 아니고 단순히 헬스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꾸준히 헬스를 할 때도,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헬스 안 하고는 못 사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집에서 그녀가 사준 치닝디핑 철봉으로 홈트를 하거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 회사 내 헬스장을 다녔다. 그러다 재작년 5월, 집 앞 헬스장에 그녀와 함께 등록했다.
사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헬스, 아니 어떤 운동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야근을 하고 밤 10시에도 헬스장을 가는 남자친구,
숙소를 예약하는데 헬스장이 있는지 확인하는 남자친구,
맛집 메뉴 중에 고단백 메뉴가 있는지 확인하는 남자친구,
주말에 일찍 일어나서 데이트하기 전 헬스장을 가는 남자친구
와 같이 산다면 같이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지금도 헬스장 가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그녀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고 싶은, 그 마음으로 오늘도 운동화를 신는 그녀다.
나는 꽃을 사본 적이 있다.
주로 소중한 사람의 기념할 만한 날이었겠지만, 다 합해서 다섯 번도 사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은 당연히 있다.
그녀를 만나고 처음 맞은 발렌타인데이었다.
그날은 내가 예전 회사에서 하고 있던 현장 OJT 첫 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금요일이었다.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유칼립투스를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잠실의 어느 한 꽃집에 전화 예약을 하여 구매한 후, 잠실역 지하상가에 있는 꽃집에서 다시 예쁘게 포장을 하여 준비했던 선물과 함께 그녀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녀에 의하면 나는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많이 없었다.
이것은 그녀와 같이 살고 나서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꽃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마 그녀는 나를 만나면서 그녀가 좋아하는 나로부터 꽃 자체라기보다 꽃이 상징하는 특별함을 받아, 나에게 그녀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꽃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은 날, 평소 같은 어느 날, 꽃 선물을 받기 원하고 그녀와 같이 사는 집에도 꽃이 있기를 바란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꽃 선물을 많이 하지 않았던 건 전혀 의도되지 않았다. 내가 꽃에 관심이 많이 없다 보니 그녀가 내게 꽃을 받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않고 넘겨왔던 것이다.
그녀의 쌓인 서운함을 달래줘야 했다.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주말 데이트할 때 "짠~" 하며 서프라이즈 꽃 선물을 하기는 힘들었고, 퇴근길에 사 오는 방법이 있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괜찮은 꽃집을 발견해서, 나는 그곳에서 종종 그녀에게 줄 꽃을 직접 하나하나 골라 사곤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집에 꽃을 담아놓을 장식 도구가 필요했다.
네이버에서 화병을 태어나서 처음 사보기도 했고, 가끔 가던 꽃집의 사장님께 자문하여 받은 화병을 집에 가져와 그녀에게 사준 꽃을 손수 다듬어 화병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몇 번 꽃을 정기적으로 배송해 주는 'Kukka'를 알려준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주말 아침에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볼 수 있도록 꽃을 주문하기도 했다. 꽃을 제대로 다듬을 수 있는 원예 가위와 함께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그녀 지인들과 함께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주말 새벽에 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꽃시장을 간다고 했다. 주말 새벽에 일어날 생각에 괴로웠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그녀와 가보지 않은 곳에 가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그녀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른 아침 그녀와 지하철을 타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장소에 도착하여, 서로가 다른 길을 주장하다 조금 헤맨 후에야 꽃시장에 도착했다. 생각 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누가 봐도 한두 번 꽃시장을 다녀보신 것 같지 않은 분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고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분들이셨다. 우리는 꽃시장 입문자 중에 입문자로서 마음에 드는 꽃을 제값에 주고 사기 위해 이런 분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장들 위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였고, 서로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꽃을 골라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와 다르고, 나는 그녀와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머리로는 알고 있다.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은 정말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따라서 나는 나의 '헬스장' 만큼, 그녀의 '꽃시장'을 좋아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