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명작 중의 명작
디에고 로드리게즈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Las meninas. VELÁZQUEZ, DIEGO RODRÍGUEZ DE SILVA Y. 시녀들. 1656. P1 S00]
이 그림은 예술사적 자취 속에서 언급한다면 존재하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를 보고 “피리 부는 소년”을 그렸던 마네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바라보고 나서 “화가 중의 화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조르다노”는 이 작품을 가리켜 “회화의 신학”이라고 표현했다. 19세기 토마스 로렌스 경은 “예술의 철학”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 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회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무리요의 그림에서 언급을 하겠지만, 벨라스케스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리요의 그림과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펠리페 4세와 스페인은 유출 방지의 정책으로 철저하게 봉쇄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19세기가 되어서야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을 했고 오늘날도 수많은 연구가 일어나는 작품이 바로 이 “라스 메니나스”, “시녀들”이다.
펠리페 4세의 첫 부인인 부르봉 가의 이사벨 왕비는 1644년에 사망하였으며, 그들 사이에 난 외동아들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역시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게 되자 펠리페 4세는 1649년 마리아나 왕비와 두 번째로 결혼하였으며, 마르가리타 왕녀는 그들의 첫 아이이자 그림이 완성될 당시의 유일한 자녀이다. 마르가리타 왕녀 이후로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5살 때 사망)와 카를로스 왕자가 있었으며, 카를로스 왕자가 4살 때 왕위를 물려받아 카를로스 2세로 등극하였다.
벨라스케스는 마리아나 왕비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펠리페 4세 자신은 만년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이 작품에는 자신이 등장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하였다. 1650년대 초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죽은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살았던 방을 하사하여 이를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시녀들'이 전시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펠리페 4세는 이곳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놓고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엄격한 궁내 예절로 인해 다소 제한적이긴 했지만, 예술을 사랑했던 이 왕은 벨라스케스와 평범하지 않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의 죽음 이후, 펠리페 4세는 왕위 후계자 선택을 위해 작성한 비망록에 "난 희망을 잃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
이 작품의 최초의 이름은 “가족”이었다. 그 근거는 스페인 황금시대의 바사리라고 불렸던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완성한 스페인 화가들의 일생을 기록한 작품집에 나와 있다.
이 작품은 왼쪽과 양쪽 모두가 잘려나갔다. 1734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알카사르가 완전히 불타 없어지면서 이 작품 역시 피해를 보았으며, 이후 왕실 소속 화가인 후안 가르시아 데 미란다가 복원하였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왼쪽 볼 부분은 안료가 크게 소실되어 완전히 새로 채색하였다. 화재에서 빠져나온 이후 이 작품은 1747년부터 48년까지 왕실 소유가 되었는데, 이때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왕녀가 이복 자매인 마리아 테레사로 잘못 밝혀졌으며 이러한 실수는 1772년 새 마드리드 왕궁에서 이 작품을 접수한 후에도 반복되었다(적외선 관찰 결과 자잘한 펜티멘토. 즉, 작가가 작품을 수정한 흔적) 들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작품 속 벨라스케스의 머리는 원래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794년에 작성된 왕실 소유 작품 목록에서 이 작품의 이름은 '펠리페 4세 가족' 이었으며, 1814년에 작성된 목록에도 같은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1819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 제작된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전 내부에 있는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천정이 높은 방은 실비오 가끼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소실점이 하나인 구도를 잡을 수 있는 단순한 박스형 공간"이다. 앞부분 중앙에는 인판타 마르가리타 왕녀가 서 있다. 당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 사이에 난 유일한 자식이었던 이 다섯 살짜리 공주는,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였다. 왕녀는 두 명의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이 중 왕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가 도나 이사벨 데 벨라스코, 왕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금쟁반 위의 붉은 컵에 담긴 음료수를 건네고 있는 시녀가 도나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데 소토마요르이다. 왕녀 오른쪽에는 두 명의 난쟁이가 있다. 그중 한 명은 왜소증에 걸린 독일인인 마리 바르볼라(마리아 바르볼라), 그리고 장난스럽게 발로 개를 깨우려 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인 니콜라스 페르투사토이다. 이들 뒤로 상복을 입은 채 호위병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이(호위병의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음) 왕녀의 샤프롱인 도나 마르셀라 데 울로아이다. 그리고 저 뒤에 문 앞 계단에 서 있는 사람은 호세 니예토 벨라스케스이다. 마지막으로 왼편에 이젤 앞에 벨라스케스와 문과 벨라스케스 사이의 거울에 등장하는 두 인물 펠리페 4세와 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이다. 그리고 뒤 어두운 곳에 있는 두 개의 그림은 야콥 요르단스의 “아폴로와 판”과 루벤스의 “아테네와 아라크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시녀들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이 움직임이다. 1/3이 인물로 차 있지만, 2/3는 빈 곳이다. 이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벨라스케스는 오른편의 창가에서 들어오는 빛과 뒤에 서 있는 호세 니예토가 열고 있는 문의 빛을 통해 완벽한 구도를 완성했다. 특히, 벽에 걸린 그림, 거울, 열린 문과 등장인물들의 자세에 빛의 효과로 인해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을 했다. 이 움직임은 벨라스케스, 아구스티나, 마르가리타를 중심으로 한 구도와 이사벨, 마리 바르볼라, 니콜라시토의 구도로 양분되어 자리를 잡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지금 설명했던 것처럼, 어느 구도에서 봐도 피라미드 구도로 형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절대적인 안정감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로 인해 공간의 허전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게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이 위대한 작품 시녀들이 “알라 프리마 기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밑그림 없이 바로 붓 터치로 물감을 사용해서 바로 채색을 했다는 것이다. 티치아노와 카라바지오도 이 기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녀들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시녀들은 거리감에 의해 그림의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펠리페 4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거울의 모습은 로베르트 캉팽의 세례 요한의 그림과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거울의 기법이 그대로 적용된다. 어찌 보면, 거울을 보고 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등장인물들은 전부 한 곳을 향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앞에 있는 왕과 왕비를 바라보고 있다. 공주 역시 자신이 준비한 차를 부모님께 대접하려는 모습이다.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이 그림의 벨라스케스 시녀들에 등장하는 마리가리타 공주와 왼편에 보면 10년 차를 두고 다른 화가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그렸다면 두 공주 머리의 가르마는 다르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녀들과 같은 방향이다. 최근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직접 시녀들의 장면을 연출하며 행위 예술로 보여준 면이 있지만, 그래도 역시 이상한 부분이 이 작품이다.
최근 많은 연구를 통해 거리적 공간감 등 많은 논문과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며, 벨라스케스의 특유의 재능인 순간포착과 공주와 뒷 문의 호위무사 사이의 공간적 개념이 연구되어져 이 그림이 3D적 완성도를 높인 이유를 찾아내게 되었다(이 부분은 추가 작성)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벨라스케스가 붓을 들고 있는 손은 마치 화상을 입은 듯 붙어 있다. 그리고 0층 메리 튜더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담과 이브를 만나러 가기 전에 산체스 코에요의 왕실 왕자와 공주들의 그림을 보면 섬세함 그 자체이다. 보석도 하나하나 그 방향과 선이 다 살아있다. 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시녀들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시녀들의 옷자락이나 공주의 비단 공단에 있는 붓 터치는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려서 무슨 위대한 화가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더 황당한 것은 마리 바르볼라와 니콜라시토의 발아래 자는 강아지이다. 이 강아지는 후에 소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공주의 좌우편에 있는 두 시녀 역시 소설에 등장한다. 추리소설 [벨라스케스의 거울],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에서 라스 메니나스 속의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강아지에게 일어난 붓 터치를 자세히 보자. 어떤가? 뭔가 발견했는가? 얼굴을 먼저 보자. 오른편은 숫자 8을 넓은 붓으로 그린 느낌이다. 세밀함은 전혀 없고 대충 칠한 듯 느껴진다. 그리고 목 부분을 보면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장난을 한 것인지? 붓 터치가 어색하고 끊어져 있고 매끈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5cm, 10cm, 1M, 5, 10M의 거리감 속에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현대 아이들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상황을 일일이 다 설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현대에 나오는 모든 3D 책들은 어떠한가? 책을 펴면 장면들이 일어나 입체감을 더해 준다. 바로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이런 그림이다. 이런 관점으로 맨 앞과 중간 그리고 맨 뒤에서 본다면 보는 형태가 달라진다. 클로에가 가이드를 할 때, 이 “라스 메니나스” 앞에서 소름 돋는다는 말과 함께 주저앉아 울었던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은 벨라스케스의 완벽한 구도와 기법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그림이 눈에 가득 차 왔기에 그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맞다. 쉬는 날, 벨라스케스의 작품 앞에 서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있다 보면 그림의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지나가는 현지 스페인 가이드가 웃으며 “그런다고 보이니?”라고 말할 때 이제는 이렇게 말을 한다. “응. 확실히 벨라스케스가 큰 사람은 큰 사람이야!”라고 말이다. 한번 벨라스케스의 매력에 푹 빠져 보기를 바란다. 이 책에 시녀들의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했지만, 시녀들만 가지고 2시간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량이라 후에 클로에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
왼편의 빛과 뒷문에서 비쳐오는 빛으로 인해 결국 황금선 기법은 최종적 완성을 이룬다. 브레다 함락에서의 빛의 움직임과 불카누스에서 느껴지는 섬세함 그리고 올리바레스의 기마상에서 보았던 모든 부분이 종합적으로 하나의 작품 속에 담겨있다. 물론 시녀들 좌우편에 있는 그림 하나하나에도 시녀들이 왜 완성된 최고의 작품인지 다 설명이 담겨있으니 벨라스케스의 방은 꼼꼼히 보기를 바란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면은,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템페라의 기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강아지의 그 뭉뚱그린 얼굴과 가벼운 터치가 빛에 의해 오히려 털이 살아 바람결에 움직이는 듯 느껴지게 되고, 공주와 시녀들의 옷은 더욱 화사하게 눈이 부신 햇살에 빛나는 비단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0층에서 보던 그 섬세함은 곧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데, 멀리서 보고 있으면 그저 빛의 이야기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빛의 효과가 톨레도 대성당의 트란스파렌테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이후 가우디의 음각 기술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위대한 근대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한 말이 있다. “이 그림 앞에만 서면, 왜 사람들은 전부 무지하다고 느껴지는 거지?”라고 말이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근대 인상주의 화가들이 가장 높이 샀던 부분인 단 몇 번의 붓질로 공주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부드러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하는 시각효과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실주의적 기법은 후에 에두아르도 로살레스 가이나스[이세벨 여왕의 유언. 이 책 뒷부분에 설명되어 있음]에 의해 다시 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독특한 시각 그리고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색의 조화는 마네, 들루크루아, 피카소, 베이컨 등 수많은 후대화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특히, 피카소가 그린 시녀들의 모작은 카탈루냐 미술관에 있지만, 정확하게 중간 시기의 그림은 여기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특별전 외에는 잘 전시에 나오지를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2019년 200주년 기념행사에 등장. 피카소의 옷을 벗은 마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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