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시작이다

... 항암 치료

by 무위




수술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하루하루 병원 생활이 지겨워서 안달이 날 때쯤 암통합 검진 센터로 옮겼다. 주치의가 바뀌었고 위 전절제 후 생활과 항암치료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네? 항암 치료를 해야 된다구요?”

“암세포가 위벽을 뚫고 나오기 직전이었어요.”


주치의는 암세포가 혹시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항암치료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더 나쁜 상황과 맞닥뜨리는 것보다 항암치료를 하는 게 조금은 안전한 방법이라고 했다. 항암약을 8차에 걸쳐서 먹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도 방사선 치료가 아닌 게 어디야하며 안도했다.

마음은 이미 항암치료를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운에 맡기며 항암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건 합리적이지 않았다. 어차피 힘든 수술을 했고 더 나쁜 상황이란 죽을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됐다.

약을 먹는 처음 3개월 정도는 아무런 부작용과 문제가 없었다. 이런 거였어? 이 정도면 항암치료도 받을 만하네 하고 거만을 떨었다. 신은 어김없이 내 거만함을 두고보지 않았다.

항암약은 암세포든 정상세포든 새로 생겨나는 신생 세포들을 모두 죽였다. 이게 암에 대항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의심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몸에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콰다당…”


새벽에 욕실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놀란 아내와 딸이 달려 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문고리를 잡다가 얼굴을 문짝 모서리에 찧었다. 다시 일어나려다가 현기증이 나서 변기와 휴지통을 팔로 잡고 버티다가 같이 뒹굴었다. 아프기보다 부끄러웠고 부끄럽기보다 비참했다.

넘어진 이유가 잠에서 덜 깼기 때문이라고 현기증 때문이라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그랬다고… 놀란 가족들에게 이유를 설명하느라 횡설수설했다. 얼굴과 손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아내가 속상해했다. 제발 새벽에 화장실에 갈 때는 자기를 깨우라고 했다. 사고 이후 내가 조금만 뒤척여도 아내는 선잠을 깼다.

항암약을 먹은 지 10개월이 되자 부축을 받지 않고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혼자서 일어나려했다. 나에게 정신은 자존심이었다. 가장으로서 쓰러지지 않겠다는 자존심. 하지만 몸은 솔직해서 숨길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리다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거꾸러졌고 도서관 서가에서 쪼그려 앉아 책을 찾다가 완전히 기절한 적도 있었다. 혈압이 심하게 떨어졌다. 기립성 저혈압은 항암 치료 내내 나를 괴롭혔다.

일곱 살 아들은 엄마가 없을 때 아빠가 또 쓰러지지 않을까 욕실까지 따라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은 엄마의 엄명을 받고 아빠가 몰래 몸에 나쁜 음식을 먹지 않는지 감시하며 따라 다녔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기력한 가장이었다. 나는 보호받아야 할 한 마리 어린 짐승일 뿐이었다. 삼시세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아내가 차려준 건강밥상을 먹었다. 가족의 사랑을 받아 먹었지만 마음은 늘 허기졌다.


체온이 떨어져서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 몸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죽음은 냄새로 찾아온다. 말기 암환자의 마지막을 본 적이 있었다. 임종을 앞둔 외사촌 형 방에 그득 배어 있던 죽음의 냄새를 기억한다. 기억을 털어내고 싶어서 잠자기 전에 매일 샤워를 했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매일 조금씩 흉하게 일그러져 갔다.

몸 전체 피부가 검게 변했다. 얼굴 군데군데 피어난 검버섯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 같았다. 그래도 거울 보는 걸 피하지 않았다. 건강할 땐 거울을 거의 보지 않고 살았다. 당신은 거울도 안 보느냐는 아내의 핀잔을 종종 들었다. 욕실 배수구 거름망엔 언제나 빠진 머리카락이 한 움큼 걸려 있었다. 빠진 머리카락을 꼿꼿하던 자존심 한 움큼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