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만 무료

'행인 1'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까지

단기전 대신 장기전에서 빛나는 내향인의 관계법

by Quat


바야흐로 자기 PR의 시대다.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더 이상 특수한 순간에만 필요한 능력이 아니다. 입사 면접, 회의 자리, 네트워킹 모임, 심지어 취미 모임이나 소개팅까지, 어떤 관계에서든 첫 만남의 인상이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대부분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다.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인상 깊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는지가 곧 ‘매력’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내향인들은 출발선부터 조금 뒤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들은 처음부터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다. 목소리도 크지 않고, 먼저 리드하지도 않는다. 자기주장을 또렷하게 펼치기보다 분위기를 살피는 데 더 익숙하다. 누군가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는 타입이라기보다, 옆에서 조용히 흐름을 따라가며 상황을 파악하는 쪽에 가깝다.






이성 간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여러 명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내향인의 포지션은 영화로 치면 ‘행인 1’과 비슷할 때가 많다. 화면 안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하지만, 이름도 대사도 없는 인물. 처음 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크고, 내적으로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의 내향인은 사실 내가 봐도 매력을 쉽게 느끼기 어려운 타입이다.



대화를 시도해도 “네” 혹은 “아니요” 같은 짧은 대답이 돌아올 때가 많고, 특별한 호감이 있는 상대를 제외하고는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모임이 끝난 뒤 누군가 내향인에 대해 묻는다면 돌아오는 반응은 종종 비슷하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른 뒤 “그분이 어떤 분이셨죠?”라는 말과 함께 곤란한 표정이 따라온다. 그 자리에 분명 함께 있었지만, 기억에는 흐릿하게 남거나 아예 남지 않는 사람. 한 번의 자리에서 강한 인상을 남겨야 살아남는 게임에서 내향인은 패배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의 매력은 애초에 단기전을 위해 만들어져 있지 않다. 내향인의 진가는 ‘짧은 만남’이 아니라 ‘오래 보는 관계’에서, 여러 명이 섞여 있는 자리보다 일 대 일의 자리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다수의 내향인들은 의외로 누군가와 단둘이 있을 때 말을 잘하는 편이다. 많은 사람 앞에서는 입을 떼기까지 한참을 망설이지만, 신뢰가 쌓인 상대와 마주 앉으면 생각보다 말수가 적지 않다. 질문을 던지는 능력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태도도, 조용히 공감해 주는 반응도 이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배려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향인들은 누군가 자신을 과하게 챙기거나 지나치게 신경 쓰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상대를 배려할 때도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도움을 줄 때도 상대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만, 챙겨줄 때도 상대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까지만 손을 뻗는다. 이 ‘적당한 거리감’이 어떤 이들에게는 참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좋아진 언변과 부담스럽지 않은 배려 덕분에, 내향인들은 만나는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진가를 더욱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넓게 흩어진 관계에서 두루 좋은 인상을 남기기보다는, 좁지만 깊은 관계 안에서 오래 곁을 지키는 사람. 단기전에서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수 있지만, 장기전에서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래서 내향인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만남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우연한 계기로 자주 마주치게 되고, 조금씩 마음이 풀리면서 이야기가 길어지는 관계. 소개팅 자리나 번개 모임보다는, 회사 동료나 동호회 사람처럼 시간이 쌓이며 가까워지는 방식 말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런 환경이야말로 자신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런 만남이 편하니까, 이게 나에게 잘 맞는 유일한 방식이다’라고 단정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어필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입사 면접이나 프로젝트 발표 자리처럼 준비된 자기소개가 필요한 상황도 있고,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야만 이후의 기회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자리가 너무 불편하다’라는 이유로, 그런 상황에 대해 아예 생각해보지 않거나 매번 피하려고만 한다면, 막상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단지 내향적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지 자체를 좁혀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자신에게 잘 맞는 환경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색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훈련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단기전에서 이겨야만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경기장 밖에 서 있는 사람으로 남지는 않기 위해서다.



모든 자리에 나서서 중심이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이 지나치게 조심하는 습관, 상대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아예 선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는 태도만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내향인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단기전에는 여전히 약할지 모르지만 그 약함이 곧 패배를 뜻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들여 관계를 쌓아갈 줄 알고, 오래 볼수록 더 많은 면을 보여줄 수 있으며, 상대를 숨 막히지 않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장기전에 강한 내향인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의 삶은 생각보다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에 더 가깝다.

keyword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brunch membership
Quat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일상 속 느끼는 생각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꿈입니다. 제안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1,30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6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9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7화내향인의 배터리는 왜 이렇게 빨리 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