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나는 먼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난나는 정원에서 여름 꽃을 꺾고 있었어요.
-난나. 왜 꽃을 꺾는 거야?
나뭇가지 위에 있던 새가 난나에게 물었어요. 난나는 꽃을 꺾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새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답니다.
“먼 곳에 있는 여신님께 바치려고 하는 거야.”
-왜 여신님께 꽃을 바치는데?
“소원을 빌려고.”
-그렇구나.
새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난나는 꽃을 마저 꺾었어요. 그녀는 금세 멋진 꽃 한 다발을 만들어냈답니다. 난나는 완성한 꽃다발을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집에 들어간 난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어요. 새 신발과 빵 몇 덩어리, 병에 담은 물과 작은 주머니칼 ……. 짐을 챙기고 있던 난나를 향해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가왔어요.
“난나야. 내 손녀. 정말 여행을 떠날 거냐?”
“여신님에게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잖니.”
난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난나가 여행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답니다. 두 분은 늙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건강하고 행복했고, 난나가 빌려고 하는 소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또 여행길이 험난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소중한 손녀가 걱정되기도 했고요.
“할머니,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결심했어요. 우리가족 셋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로요.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신님께 그 소원을 빌 거예요.”
하지만 조부모의 만류에도 난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결국 난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난나에게 그들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어요.
“난나야. 이걸 받아라. 어쩌면 여행 중에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겠구나.”
먼저 할머니가 난나에게 작지만 아름다운 보석구슬을 건넸어요. 일곱 가지 색으로 빛나는 보석구슬은 한눈에 봐도 몹시 귀하고 값비싼 것이었어요.
“할아비는 이걸 주마.”
할아버지는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를 건넸어요. 상자의 입구에는 열쇠구멍대신 세 자리의 비밀번호를 맞춰 넣는 잠금장치가 되어있었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난나에게 상자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는 않았어요. 난나가 왜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사실 상자의 잠금장치는 고장 나 있어 비밀번호를 맞춰도 열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어요.
“난나야. 조심히 다녀 오거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난나를 문 앞까지 배웅했어요. 그렇게 난나는 한손엔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짐 가방을 들고 여행길을 떠났답니다.
난나가 돌담으로 만든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마을 밖 오동나무 아래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어요. 난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오동나무 아래를 자세히 보았더니, 어느새 연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등이 굽은 마녀 한 명이 서 있지 않겠어요?
“난나야.”
마녀가 자신을 부르자, 난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나무 밑의 마녀에게로 다가갔어요. 모르는 마녀였다면 난나도 경계했겠지만, 난나는 그 마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한 때 마을에 살았던, 그러나 이제는 마을에서 쫓겨나 뒷산 어귀에 살고 있는 마녀였답니다.
“난나야.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난나를 보며 마녀는 자신의 검은 망토 안쪽을 뒤적거렸어요. 마녀는 곧 망토 안쪽에서 금실로 짠 손수건을 하나 꺼냈답니다. 그 손수건은 무언가를 단단히 싸매고 있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을 감싸고 있는 듯 그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천대했을 때, 너만이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 나는 너에게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선물을 주마.”
마녀는 난나에게 들고 있던 손수건을 건네주었어요.
“이 손수건 안에 있는 것은 용기란다. 여행 중에 분명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을 거다. 그 때 이 손수건을 풀고, 안에서 용기를 꺼내거라.”
난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마녀의 선물을 받았어요. 난나는 마녀의 배웅을 받으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어요.
난나는 그렇게 세 가지의 선물을 가지고 여행길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날이 저물었어요. 마을을 찾지 못한 난나는 어쩔 수 없이 길옆의 큰 나무 근처에서 하룻밤을 쉬고 다시 여행길을 떠나기로 했답니다. 난나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두 눈을 감았을 때, 갑자기 수풀 안쪽에서 누군가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난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숲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지요. 저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어요. 수풀을 헤치고 숲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달빛 아래에서 사자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답니다.
-나는 죽을 거야. 나는 죽을 거라고.
사자를 본 난나는 뒤를 돌아 도망치려고 했어요. 그러나 사자의 울음소리가 너무 구슬펐던 데다가, 사자가 뼈와 가죽밖에 없을 정도로 깡마르고 힘이 없어 보여 난나는 도망치는 대신 사자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어요.
“사자야. 왜 울고 있니?”
난나가 조심스레 묻자 사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어요.
-이제 나는 죽을 일밖에 남지 않아서 울고 있단다.
“왜 죽을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잇병이 나서 이가 모두 빠져버렸거든. 이대로는 사냥을 하지 못하니 굶어죽을 수밖에 없어.
얘기를 들어보니, 난나가 생각하기에도 사정이 참 딱했어요. 난나는 고민하다가 사자에게 자신의 꽃다발을 나누어 주기로 했답니다.
“사자야. 내가 내 꽃다발을 조금 나누어 줄 테니, 먼 마을에 있는 여신님에게로 찾아가 보는 건 어떠니? 그 여신님은 몹시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진심으로 비는 이는 그 누구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셔. 가서 이 꽃다발을 제단에 바치고, 새로 이가 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봐.”
-그게 정말이니? 정말 고맙구나.
사자는 난나에게서 꽃다발 조금을 나누어받았어요. 꽃다발을 나누어 받은 사자는 난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쌩하니 바람처럼 숲속을 달려 빠져나갔어요. 그리하여 더는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난나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난나는 다시 길을 떠났어요. 태양이 머리 위에 떠있을 시간에 난나는 작은 개울 앞에 도착했어요. 제대로 된 다리 없이, 징검다리만 있을 정도로 작은 개울이었어요.
그런데 그 개울 가운데에서 웬 남자가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었답니다. 난나는 처음엔 물장난 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지만, 가만 보니 꽤 오랫동안 물속에 집어넣은 머리를 꺼내지 않고 있어서 곧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물 밖 남자의 몸이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난나는 얼른 그에게로 달려가 물속에 잠긴 머리를 꺼냈답니다.
“어푸. 어푸.”
남자는 물속에서 나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키며 코와 입에서 물을 뱉어내기 시작했어요. 난나는 그런 그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그가 어느 정도 진정을 한 다음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어요.
“괜찮으세요? 왜 그러고 계셨던 거예요?”
남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난나를 쳐다보았어요. 남자는 좋은 옷을 입고 값비싼 장신구를 달고 있는 것이, 난나와 같은 평범한 평민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인어를 보려고 하고 있었어요.”
남자는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난나의 질문에 대답했어요. 남자의 말에 난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답니다.
“인어라니요? 이 개울은 인어가 나오긴 조금 얕지 않나요?”
“하지만 동생들이 이 개울에는 인어가 나온다고 했는걸요. 이 알약을 먹고 개울에 들어가면, 숨 막힐 일 없이 인어와 놀 수 있다고 했어요.”
남자는 난나의 손에 동그란 무언가를 건넸어요. 남자는 그것을 알약이라고 했지만, 난나의 눈에는 평범한 레몬사탕처럼 보였어요. 혹시나 해서 살짝 맛을 봤더니, 역시 레몬 사탕이 맞았어요.
“이건 알약이 아니에요. 그냥 레몬 사탕이잖아요?”
“뭐라고요?”
난나의 말에 남자가 깜짝 놀랐어요.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깐 고개를 흔들다가, 곧 슬픈 표정을 지었답니다.
“또 동생들에게 속은 것 같네요.”
남자는 징검다리 위에 망연히 앉아 자신의 사정을 난나에게 털어놓았어요. 그는 이 지방 영주의 첫째 아들이었는데, 머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배다른 동생들과 아버지 그리고 새어머니에게 걸핏하면 놀림과 경멸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난나는 남자를 불쌍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난나는 남자에게 사자와 같이 자신의 꽃다발을 나누어 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제가 제 꽃다발을 조금 나누어 줄 테니, 이걸 가지고 먼 마을의 여신님께 가보면 어떻겠어요? 여신님께 꽃다발을 바치고, 똑똑해지고 싶다고 빈다면 여신님은 분명히 들어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네. 이 꽃다발을 받으세요.”
난나는 자신의 꽃다발을 남자에게 조금 나누어주었어요. 남자는 그 꽃다발을 가지고 신이 난 듯한 모습으로 난나를 앞질러 뛰어갔어요. 난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본 뒤, 다시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답니다.
난나는 며칠 동안 걸었어요. 그리하여 난나는 여신의 신전이 있는 먼 마을에 거의 다 도착하게 되었어요. 드디어 먼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난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렀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곧 발을 멈추게 되었어요. 커다란 남자가 길 위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남자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의 시체를 옆에 두고, 비통한 표정으로 길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어요. 상황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기에, 난나는 조심스레 남자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답니다.
“방금 전에 내 형이 죽고 말았다. 어이없게도 고기 뼈가 목에 걸려 손쓸 새도 없이 죽고 말았어.”
“그것 참 안 된 일이군요.”
“형과 평생 함께 지냈었는데, 형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난나는 자매나 남매가 없었지만, 남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것, 난나 또한 그것이 두려워 이 먼 길을 온 것이기 때문이었어요.
“가엾게도. 제가 이 꽃다발을 나누어드릴게요. 바로 저 앞에 여신의 신전에 이 꽃을 바치고 소원을 빌어보세요. 상냥한 여신님은 당신의 소원을 반드시 이뤄줄 거예요.”
“그게 정말이냐?”
남자는 난나의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난나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아 버렸어요. 그는 난나에게 꽃다발을 빼앗고, 형을 어깨에 걸쳐 맨 뒤 난나보다 앞질러 먼 마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답니다. 한 순간에 꽃다발을 빼앗겨 버린 난나는 당황해서 그 자리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어요. 제물 없이 여신에게 소원을 빌 수는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하늘이 착한 난나를 도운 것일까요? 난나는 바닥에서 떨어진 꽃 한 송이를 발견했어요. 남자에게 꽃다발을 빼앗기면서 바닥에 떨어진 꽃이었어요. 난나는 꽃에 묻은 흙먼지를 조심스레 털고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았답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지 20여분이 지나, 난나는 드디어 먼 마을에 도착했어요.
여신의 신전 앞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꼬박 반나절을 줄을 선 다음에야 난나는 여신의 제단 앞에 설 수 있었어요. 난나는 파란 색의 꽃 한 송이를 여신의 제단에 바친 뒤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었답니다. 그렇게 기도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제단의 너머에 앉아있던 여신상이 입을 열어 난나에게 말을 걸었어요.
-난나야. 너는 참으로 착한 소녀구나. 내가 너의 제물을 흡족하게 받겠다.
난나가 제단 앞에 올려두었던 파란 꽃이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난나가 올려놓았던 파란색 꽃과 꼭 같은 색깔의 작은 파란색 병이 나타났답니다.
-이것은 네가 바라던 불로장생의 묘약이란다. 다만 이것은 뚜껑을 열면 효과가 빨리 사라지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절대로 뚜껑을 열면 안 된단다. 집에 도착한 다음 뚜껑을 열어 이것을 너와 너의 조부모에게 바르거라. 그렇다면 네가 원한대로 너의 조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영원토록 살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감사합니다.”
-난나야. 내 말을 명심하거라. 절대로 집에 도착하기 전에 뚜껑을 열면 안 된단다.
여신상은 난나에게 한 번 더 충고의 말을 하고, 다시 입술을 굳혀버렸어요. 난나는 여신님께 수십 번 감사의 인사를 하며 파란색 병을 가방 속에 소중히 넣고 신전을 나왔어요. 신전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지만, 난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마을에서 쉬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답니다.
난나는 먼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에서 멈춰 섰어요. 황혼을 등지고 서 있는, 온몸이 검게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난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어요. 자세히 보니, 남자는 오늘 아침 자신이 도와주었던, ‘형이 죽었던 남자’였어요.
“어머. 또 만났네요. 축하드려요. 여신님이 당신의 형을 살려주셨나봐요.”
“그래. 덕분에 형이 되살아났지. 정말 고맙다.”
형제 중의 동생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난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어요. 난나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소름끼친다고 생각했답니다. 조금 무서워진 난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어요. 그리고 그 덕분에 난나는 형제의 근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견했어요.
“네가 나를 살리는 걸 도왔으니, 너는 죽이지 않겠다. 대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놓고 이곳을 지나가라.”
이럴 수가. 난나는 온몸이 피가 차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난나가 도운 사람은 형제 살인강도단이었던 것이었어요. 난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방을 꼭 쥐었답니다. 가방 안에는 여신님께 받은 불사의 묘약이 있었어요. 난나는 이것만큼은 절대로 형제에게 빼앗길 수가 없었어요.
“뭐야? 빨리 가방 안 내놔? 죽고 싶어?”
형제들이 난나를 윽박지르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난나는 다급하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답니다. 그들이 난나에게 고작해야 여섯 걸음 안쪽으로 다가왔을 때, 난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다급하게 가방 속에 손을 넣었어요.
난나는 가방 속에서 할머니가 주신 보석 구슬을 꺼내 형제들 사이로 던졌어요. 난나에게 다가오던 형제들은 보석구슬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보석 구슬을 향해 각자 손을 뻗었어요.
“보석 구슬이다!”
“일곱 가지 빛으로 빛나고 있어. 정말 귀한 물건 같은데!”
형제들이 동시에 보석 구슬을 뻗었기 때문에, 공중에서 두 사람의 손이 부딪쳐 둘 중 누구도 보석 구슬을 잡지 못했어요. 그러자 두 형제가 서로를 노려보고 싸움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내가 가져야겠다. 내가 형이니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내가 가져야지. 내가 오늘 형을 살렸잖아.”
서로가 보석 구슬을 가져야 한다고 말다툼을 하던 형제는 곧 허리춤에서 각자의 칼을 꺼내들었어요. 말싸움이 몸싸움, 칼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순간이었어요. 그리고 난나는 그 틈을 타 형제들이 있는 길목에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답니다.
살인자 형제들에게서 슬기롭게 도망친 난나는 며칠 동안 별다른 일없이 착실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답니다. 난나는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일은 난나의 희망대로 풀리지 않았어요. 난나는 언젠가 그녀가 도와주었던, 영주의 첫째아들이 있던 마을에 도착했어요.
난나는 개울 앞에서 더는 가지 못하고 멈춰 섰어요. 누군가가 개울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그 뿐만이 아니었어요. 개울에는 나란히 세 명의 시체들이 개울물 안에 머리를 박고 죽어 있었답니다.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영주의 첫째 아들은 무시무시한 칼을 든 채로 난나를 아는 척 했어요. 난나는 그녀의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남자와 시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남자는 그런 난나를 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상황을 설명했답니다.
“내가 그들에게 선택을 하게 했지. 개울물 속에서 인어를 찾아 볼 건지, 아니면 이 칼에 맞아 죽을 것인지. 모두 개울물 속에서 인어를 찾아보겠다고 하더군.”
“당신의 형제들과 새어머니를 죽인 건가요?”
“비밀이지만, 아버지도 죽였어. 내가 이제 이 영지의 주인이다.”
남자가 어떤 식으로 아버지를 죽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가 자신이 영주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살인의 티가 나지 않게 은밀하게 아버지를 죽인 것이 틀림없었어요. 남자는 여신에게서 소원을 빌어 얻은 영리함을 이처럼 사악한 일에 쓴 것이었어요.
“나는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고, 경멸했던 모든 이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제게도 복수를 한다고요?”
“그래. 너도 나를 동정했잖아.”
남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난나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그를 가엾게 여긴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불쾌하게 여길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남자는 난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곧 그 얼굴의 불쾌감을 지우고 뒤이어 마치 재판장 같은 엄격한 표정을 지었어요.
“하지만 네가 아니면 나는 평생 내 가족들을 죽이지 못했겠지. 고마움의 뜻으로 너에게는 가장 가벼운 복수를 하마. 너는 이 길을 지나갈 수 없다.”
하지만 가벼운 복수라고 해도, 난나에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답니다. 난나는 난처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재고를 부탁했어요.
“그건 곤란해요. 이 길을 지나야 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에요.”
“복수란 원래 그런 거야. 남의 사정을 봐주는 게 아니지.”
남자의 마음은 변할 것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는 큰 칼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난나는 그를 피해 징검다리를 건널 수도 없었어요. 난나는 고민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답니다.
“당신은 여신님의 힘으로 똑똑해졌죠?”
“그럼. 나는 이 영지의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지. 아버지를 죽이고도 아무런 의심 없이 영주 자리를 계승받은데다가, 몇 개월이나 밀려있던 아버지의 일도 하루 만에 처리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상자를 푸는 것도 당신에겐 어렵지 않겠군요.”
난나는 가방에서 할아버지께 받은 은상자를 꺼냈어요. 난나는 비밀번호 장치가 걸려있는 그 상자를 남자에게 건넸답니다.
“제 할아버지가 제게 주신 건데 도저히 풀 수가 없어요. 안에 정말 귀한 보물이 들어있다던데.”
남자는 난나에게서 은상자를 받고 유심히 살폈어요. 그는 상자에 흥미가 생긴 듯, 난나에게 질문을 했어요.
“상자 비밀번호에 대해 할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신 적은 없나?”
“글쎄요. 여신님과 관계있는 숫자라고 하신 것 같아요.”
난나의 할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지금은 그냥 난나가 아무렇게나 말을 지어낸 것이었어요. 난나의 가족 중에 그 누구도 상자의 비밀번호를 알지 못했어요. 사실 저건 고장 난 상자였으니까요. 누군가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잠금장치가 고장 난 이상 번호를 맞추는 방식으론 결코 상자를 열 수 없을 터였어요.
“여신과 관련이 있다고? 어쩌면 여신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연도일지도? 그것도 아니면 여신이 처단한 악마의 숫자일수도? 아니면 그런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한 숫자일수도 있겠군.”
남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상자의 비밀번호를 맞추기 시작했어요. 곧 한손으로 비밀번호를 맞추는 것이 어려워진 남자는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자의 번호를 맞추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난나는 남자가 상자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남자의 곁을 지나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넜어요. 난나가 징검다리를 건너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남자는 상자의 번호를 맞추느라 난나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답니다.
난나는 두 번의 고난을 힘들게 헤쳤어요. 그리하여 난나는 마침내 마을 가까이까지 왔답니다. 하루만 더 걸으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숲길을 걷는 도중, 난나의 눈앞에 커다란 사자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사자는 난나가 꽃다발을 나누어주었던 그 사자였어요.
-또 만났구나.
사자가 난나에게 아는 척을 했어요. 사자의 입에는 포대기에 쌓인 어린 아기가 물려 있었어요. 사자의 입에 물린 아기는 경기를 할 듯 요란스럽게 울고 있었답니다.
-네 덕분에 다시 이가 나게 되었어. 정말 고맙다.
난나는 아기 울음소리에 있는 대로 겁을 먹어, 사자가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어요. 난나는 그 자리에 굳어서 숨만 겨우 쉬고 있을 뿐이었어요.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이 길을 지나는 인간은 모두 다 먹으려고 했는데, 내게 도움을 준 너를 먹을 수는 없지.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줄 테니 얼른 갈 길을 가도록 해.
사자는 난나에게 어서 지나가라는 듯 길옆으로 비켜섰어요. 난나는 주춤거리며 사자의 옆을 지나갔답니다. 사실 사자가 그 아이를 잡아먹을 것인지 궁금했지만, 난나에게는 그것을 물어볼 담력이 없었어요.
난나의 등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어요. 아이는 불쌍하지만, 난나는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난나는 눈을 꼭 감은 채 조심조심 길을 걸어갔답니다.
난나가 겨우 사자의 옆을 지나왔을 때였어요. 갑자기 난나의 가방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어요. 그건 마녀가 난나에게 선물해주었던, 손수건에 쌓인 용기였답니다. 용기가 난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방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었어요. 용기는 손수건을 헤치고 나와 순식간에 난나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 순간, 난나는 떨고 있던 등을 곧게 펴고 가방에서 주머니칼을 꺼냈답니다.
“못된 사자 같으니라고! 아기를 놔주지 못해?”
난나는 사자를 향해 용감하게 외쳤어요. 그리고 주머니칼을 손에 단단히 쥐고, 사자에게서 아기를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용기는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어요.
자신을 향해 겨눠진 칼을 본 사자의 눈이 번뜩이며 빛났어요. 사자는 난나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고, 갈고리 같은 발톱을 꺼냈어요. 난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자에게 갈가리 찢기고 말았답니다.
난나가 더는 숨을 쉬지 않게 되었을 때, 사자는 자신 앞에 찢겨진 난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답니다.
-안타까운 일이야. 나에게 친절했던 사람이었는데…….
사자는 한숨을 푹 쉬고, 갈가리 찢긴 난나의 몸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자가 난나를 먹는 사이, 바닥에 떨어진 난나의 가방에서 파란색 병이 굴러 나왔답니다.
그 병은 난나의 잘린 오른 손 옆까지 굴러왔다가, 돌부리에 걸려 깨지고 말았어요. 깨진 병에서 불사의 묘약이 흘러나왔고, 그 묘약은 잘린 손이 있는 곳까지 흘러갔답니다.
묘약이 난나의 손을 적신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갑자기 잘렸던 피투성이의 손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답니다. 손은 검지와 중지를 마치 다리처럼 써서, 엄지와 소지를 팔처럼 흔들며 그 자리에서 달아났어요. 그리고 사자는 난나의 오른손이 달아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요.
그렇게 난나의 오른 손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원히 이 세상을 떠돌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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