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딜로스 데 로스템플라리오스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카미노 23.3km
나는 그러고 보니 순례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름 알아보고 왔는데, 막상 걸으며 처음 알게 되는 게 많았다. 알고 있던 것도 정말이지 대충 알고 있어서 그 순간이 되어야 ‘아!’ 하며 알아채곤 했다. 아무튼 나도 휴대전화로 검색하기 시작했고, 어떤 성당에서 인증서를 발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침, 혼자 온 중국인 ‘역’이 앞쪽에서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에 심취해 있던 그녀는 아주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녀 또한 내게 인증서를 발급받았는지 물었다. 어디인지 찾고 있다는 말에 정확한 위치를 알려줬다.
스페인의 성당은 왜 마을의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이유를 유추해 보면, 사람보다 높은 곳에 신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 같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조용한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조그마한 부스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인증서 3유로’라고 커다랗게 쓰여있다. 거창한 대화도 필요 없었다. 돈과 내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을 주면 알아서 써준다. 받고 보니 그냥 A4 크기의 종이다. 이걸 반 접어 배낭에 넣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동그란 통을 가리키며 ‘2유로’라고 짧게 말했다. 장사 잘하네!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 골목 곳곳에 장미가 뿌려져 있었다. 무슨 축제가 있었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에 미리 꽃을 뿌려두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흔적을 보니 아마도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간 것으로 보였다.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라는 이 마을은 지금까지 본 곳 중에 가장 오래된 집들이 많았다. 한국의 옛 시골에서나 보던 흙집이 꽤 많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묵게 될 알베르게가 그런 집이었다. 침대에 누워 팔을 벽에 비비면 흙이 묻어났다.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기부제 알베르게여서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저녁 준비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난 돕고 싶었지만, 그놈의 언어가 문제였다. 오히려 방해될 거 같아 잠자코 있었다. 유럽 사람이나 남미 사람들은 요리하고 돕는 걸 좋아했다. 그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고 난 슬그머니 동네 산책하러 나갔다. 사람이 살긴 하는 걸까? 너무 조용했다. 도착했을 때 나를 반갑게 맞아준 고양이가 내게 다가왔다. 그냥 가지 말고 좀 만져달라고 내게 몸을 비벼댔다. 한번 쓰다듬어 주고 난 일어났다. 인제 그만! 좀 씻고 와.
저녁 식사는 렌틸콩 수프였다. 유럽인의 식사에 빠질 수 없는 바게트와 과일도 있었다. 소박한 저녁 식사였지만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바게트로 싹싹 발라 먹었다. 이제 유럽인이 다 되어 가나보다. 식사하며 옆에 앉은 아일랜드에서 온 가족과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나의 매우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긴 대화는 할 수 없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특히 한국인의 동안(童顔)에 대한 이야기는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였다. 식사 후 잠시 마당에 나갔다. 일몰이 예쁜 마을로 소문이 났던데, 오늘은 일몰이 없다. 갑자기 심술 난 듯 구름이 잔뜩 끼더니 찬 바람마저 불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PS. 잘 모르고 간 순례길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이 나를 오히려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너무 많이 알고 준비해 간 곳은 이미 익숙해져 감동이 덜하다고 느꼈다. 오히려 물어보기 위해서라도 사람들과 한마디라도 더 하게 되었고, 휴대전화로 검색하는 대신 대화를 통한 소통과 정보 습득의 즐거움이 훨씬 컸다. 국적과 나이, 인종은 제각각이지만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걷는 동지애 또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친구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모르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나에게 있어 매우 큰 도전이었지만, 나를 조금 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계기이기도 했다.
Tip. 중간지점 인증서는 반드시 발급받을 필요는 없다. 그냥 기념이다. 더군다나 인증서 내용도 별거 없다. 인쇄된 인증서 종이에 영문 이름을 써주고 3유로다. 추천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