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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oha Apr 05. 2023

엄마, 나는 아직 어린아이인가봐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들어간 곳에는 어린 시절 여자가 봤던 살림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 물건들에는 기억들도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큰엄마가 들고 온 접시 몇 장을 외할머니가 버리는 날 엄마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냈었다. 다음 날 시장을 다녀온 외할머니 손에는 접시 몇 장이 들려 있었는데 큰엄마가 준 것과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그것을 보고 어린 여자는 왠지 가슴 한켠이 찡해졌었다. 여자가 엄마에게 선물한 접시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집집마다 다 있다는, 엄마들의 혼수접시라 불린다는 꽃그림이 화려한 그 접시를 여자는 엄마도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미련하리만치 무겁게 들고 왔던 기억이 났다. 이국의 할인점에서 헐값에 팔고 있었던 화려한 접시들을. 처음 부모님이 집을 장만하고 집들이를 하기 위해 홈쇼핑에서 주문한 그릇세트도 있었다. 그 집들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던 딸들 덕분에 며칠 동안 집에서 큰소리가 끊이지 않기도 했었다. 엄마는 그 모든 것들을 구석에 처박아 두고, 천 원, 이천 원 하는 접시를 가격표도 떼지 않고 사용하고 있었다. 바닥에 다 타버린 냄비도 손잡이가 떨어진 냄비도 다 예전부터 봤던 것이었다. 


  여자는 결혼을 하고 나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시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시부모님을 보면서 여자는 부러웠던 건지도 몰랐다. 마음껏 투정 부리고 기댈 수 있는 부모, 평범한 주방에서 때 맞춰 더운밥을 차려내는 엄마도... 여자에게 오랜 시간 당연하게 느껴졌던 모든 것들이 슬퍼지기 시작했던 건 그 때문이었을까.

  기억은 여자를 5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으로 끌고 갔다. 그날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괜스레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연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을 재촉하는 남편을 보며 여자가 뱉어낸 대답이란 게 겨우 '배가 고파서'였다.

  "뭐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짓는 남편을 보며 여자 역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5월이면 며칠 동안은 잠잘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해야 만 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시기를 무사히 잘 넘기고 난 뒤 여자를 기다리는 건 잠시의 안도감과 함께 뜻밖의 극심한 배고픔이었다. 

  "밥 할 기력도 없는데 배가 고프잖아. 그러니까 내가 밥을 안 하면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을 데가 없다고 생각하니깐..."

  "밥 먹을 데가 왜 없어? 나가서 먹어도 되고, 귀찮으면 시켜 먹어도 되고. "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사 먹는 밥 먹었잖아. 아니 사실은... 엄마한테 가고 싶은데..."

  온 사방에 먹을 것이 널린 세상이라도 여자는 '엄마의 밥'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를 기다리는 건 밥만이 아닐 테니까.

  그래, 엄마. 기억 속을 헤매던 여자는 마침 쓰레기봉투에 담으려던 다 타버린 냄비를 손에 쥔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야... 내가 아직도 어린아이인 거야.' 그 순간 여자는 마흔을 넘긴 자신이 여전히 그리고 조금도 엄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일이 잘되도 여자는 언제나 왠지 모르게 기가 죽었다. 

  "내가 노력하면 뭘 해. 이런 쓰레기 집에서 살고 있는 걸 알면, 이런 엄마 딸이란 걸 알면 손님들이 다 도망가 버릴 거라고."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여자를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그때마다 부모를 부끄러한다는 죄책감도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여자는 자신의 괴로움을 다 엄마 탓으로 돌리면서도 여자는 엄마가 그리웠고, 엄마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면서도 엄마와 멀어지기 위해 또 죽기 살기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병원에 있던 두 달간의 시간 동안 여자는 부모님 집과 병원을 부지런히 오갔다. 하루종일 쓰레기와 씨름을 한 날이면 지쳐서 여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여자는 또 어김없이 엄마의 흔적 앞에 서 있었다. 화가 났고 또 치쳤지만,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여자는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아직도 엄마한테 화가 나는 건, 여전히 나를 바라봐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내가 이쁨 받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말이야."

  어린 날의 그때처럼. 여자가 집을 깨끗하게 치워 놓으면 엄마는 여자를 칭찬해 주곤 했었다. 그 칭찬이 여자를 얼마나 기쁘게 했던지, 집을 치우는 어려움이나 고단함쯤은 단숨에 날려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행복했는데... 그건 진짜 행복이었을까.

  하지만 여자는 사실 엄마를 마음속 깊이 미워하고 있었다. 엄마가 자신을 칭찬해 주는 그 짧은 순간이 지나가면 엄마는 또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아, 엄마가 너무 형편없는 엄마는 아니지?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너희 아버지 좀 봐라. 그래도 엄마는 한다고 하는데..."

  어린 여자는 엄마를 달래고 위로하며 엄마가 쏟아놓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양분 삼아 자라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마음은 뒤틀리고 비뚤어져 아직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이제 정말 다 커버렸는데...' 그 말을 읊조리던 여자는 자신이 오랜 두려움 속에 갇혀 자신이 이제는 다 자라 홀로 설로 수 있는 어른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이 어떤 모습이었든간에 부모님은 부모님 인생을,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생각까지도 잊은 채 말이다.

  더 이상 엄마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엄마로부터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럼 더 이상 엄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지. 나도 내 인생을 찾아갈 수 있을거야. 정말 그럴 수 있겠지.

  그래... 이제 그만... 엄마 고마웠어, 하고 홀가분하게 뒤돌아 서면 되는거야. 그럼 친구처럼 엄마한테도  웃어 줄 수 있다고.

     

  켜켜이 쌓인 엄마의 지층들을 다 허물어뜨리고 나면, 여자도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한 걸음씩 빠져나 올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몸을 지닌 생명체처럼 여자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여자의 몸과 의식 곳곳에 스며들어있었다.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하나까지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하지만 여자는  쓰레기들을 주워 담으며 그 기억들도 쓸어 담고 있었다. 환한 햇살이 드는 자신의 인생을 상상 하면서 말이다. 




#독백 #자기암시 #자기만의싸움

#내인생은나의것 #어른이된다는것

#어른아이 #엄마의그늘 #독립 #자립

#홀로서기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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