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속에 잠겨 있었다. 여보, 화난 거야? 여자의 불안한 얼굴과 침묵이 신경 쓰였던 남편이 드디어 말을 꺼냈다. 며칠 전에 전화드렸어. 혹시 돈 갖고 계시면 좀 보태달라고. 은행에도 가 봤는데 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돈이 많이 부족하더라고. 부모님께 의논 드리면 혹시 길이 있을까 하고 그런 거야. 왜 그랬어? 우리가 처음 시작할 때 약속했던 게 부모님께는 손 안 벌린다는 거였잖아. 그리고 부모님이 돈 나올 때가 어디 있어? 자기는 아들인데 그것도 몰라? 안 그래도 돈 없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그러셨구나. 뭐가? 오늘 옛날이야기 꺼내신 거 말이야. 언제 며느리가 간다고 마주 앉아서 옛날 얘기해 주고 그런 신 적 없잖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아버님께서 나한테 돌려서 말씀하고 싶으셨나 보네. 아내의 도리란 말이야... 이런 거 있잖아. 그럼 나도 패물이란 반지 빼줘? 근데 나는 자기한테 패물도 받은 거 없고, 반지는 빼줘도 돈도 안될 텐데... 여자가 빼주는 시늉을 한 반지는 결혼 전 남편과 서로 사서 끼워 준 14k의 가느다란 반지로 액세서리나 같은 거였다. 이걸로 단칸방은커녕 팔러 가면 비웃음만 당할걸. 근데 여보 나는 선 섭섭해. 왜? 반지 빼주라고 한 것 같아서? 아니 자기가 독단적으로 어머님 아버님께 돈 얘기 꺼낸 건데, 오늘 이야기는 나를 앉혀놓고 두 분이 작정하고 하신 거잖아. 그러니깐 그건 자기의 단독범행인데, 어머님 아버님이 생각하시기에는 며느리인 내가 주범인 거야. 나는 공범도 아닌데 말이야. 돈 좀 보태 달라는 말에 무슨 범죄 타령이야? 어머님, 아버님 생각하시기에는 날강도 같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며느리는 무조건 착한 아들 조종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신 게 섭섭해.
시부모님들의 아련한 옛 추억을 듣는 자리인 줄 알고 두 손 모으고 듣던 며느리는 사실 부모 돈 탐내는 주범으로 몰려서 훈시말씀을 듣고 온 것이다. 현명한 옛 어른들께서 그러셨다잖아. 교훈적인 이야기로 효와 아녀자의 도리를 가르치는, 뭐 그런 거 못 들어봤어? 나, 참. 그런 거 아닌데... 시부모님께서 아무리 우아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벌을 내리셨다 해도 졸지에 주범으로 몰린 여자는 입맛이 씁쓸했다.
그래도 몇 달 후 여자는 적당한 방법을 찾아냈다. 여자의 남편이 직장에서 손을 크게 다치고 얼마 후의 일이었다. 처음에 손을 다쳐 병원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여자는 무척이나 놀랐다.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면 병원까지 간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상한 심각한 것이었고, 산재처리는커녕 제 손으로 밥도 먹지 못하는 남편에게 회사는 단 하루도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거는 TV에서나 보던 일 아니야?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어... 진짜 너무해. 덜컥 겁이 난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내내 안절부절 했지만 남편 앞에서 울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회복하는데도 오래 걸렸지만, 무엇보다 손을 다치고 나서 다시 일을 하는 게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사고 처리 과정에서 보여 준 회사의 무성의한 태도에도 많이 서운해했다. 웬만한 일은 참고 견디며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남편이 결국 회사를 그만둔다고 한 것이다. 여자는 그런 남편이 너무나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지만 여자 또 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리가 살면서 각자 감당해야 할 일들이 있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여자가 이번에 찾아낸 방법은 LH 매입 임대 주택이었다. 일명 '행복 주택'이라는 이름의. LH가 아예 빌라 한동을 매입해서 임대하는 방식으로 보증금도, 임대료도 저렴했다. 무엇보다 난색 할 집 주인도 없었다. 여자는 그제서야 안도했다. 그 집은 작은 공장과 오래된 빌라가 섞여있는 조용한 동네에 있었다. 작지만 방도 두 개가 있고, 거실 공간도 있었다. 이삿짐센터 사장님도 짐을 내려놓더니, 그래도 이 집은 좀 살림집 같네 하셨다. 따로 관리비도 나가지 않고 공과금만 내면 되니깐 남편도 다른 직장을 찾을 때까지 마음을 좀 여유롭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힘들어서 어쩐다니. 1층이 주차 공간인 5층짜리 빌라 건물의 5층에 여자와 남편의 두 번째 신혼집이 있었다. 자식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신지, 놀러 오시라고 할 때다 형님네 가족들까지 초대하는 '집들이'를 말씀을 하셔서 여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집이 너무 좁아서요. 그냥 어머님, 아버님만 한 번 구경 오세요. 하지만 오피스텔에 살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 어른들은 형식적인 게 더 중요하신가봐. 결혼식, 집들이 이런 타이틀이 붙지 않으면 영 내켜 하지 않으시네... 형편이 안되는 건 생각도 안해주시고. 그래도 이사를 하고 여자는 좀 더 강력하게 집 구경을 오시라고 한참이었다.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많이 궁금하지 않겠냐는 친정엄마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시자마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어쩌냐는 말부터 꺼내셨다. 그러고는 이 동네는 교통이 불편할 텐데 또 어쩌냐고 하셨다. 여자는 시부모님께 뭘 대접할까 고민하다가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떡을 떠올렸다. 상을 펴고 차와 함께 떡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자 여자는 왠지 열심히 찾아낸 신혼집에 부모님을 처음 모시게 된 자리가 뿌듯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는 내내 '어쩌냐'라는 말씀뿐이셨다. 집집마다 평수가 다 달라 보이던데 너네는 집이 작은 거지? 큰집도 있는데 그건 점수가 높아서 순위가 빨라야 고를 수 있어요. 여자의 남편이 대답했다. 경제적 상황으로는 누가 뭐래도 여자와 남편이 고득점이겠지만, 나이가 많고 부모나 자녀 같은 부양가족이 없는 것이 감점 요인이었다. 그것 봐라, 너희들이 아이라도 얼른 낳았으면 1등 아니었겠냐. 이런 게 집이 좁은 것도 문제지만 5층까지 올라오는 것도 힘들고 말이야. 그리고 꼭대기 집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거야. 그리고 말이야... 엄마, 저녁은 나가서 먹자. 아들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여자의 시어머니는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또 어떤 '어쩌냐'를 찾아내셨을까?
그런데 너는 언제 직장 구할 거야? 평소의 시어머니답지 않게 호통을 치듯이 아들에게 한 말씀을 던져놓고는 보기는 며느리 얼굴을 쳐다보셨다. 아마도 며느리 들으라고 하신 말씀인가 보다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괜찮아요. 저도 그만두는데 적극 찬성 한 걸요. 그래서 여자도 얼른 한 마디 했다. 아휴, 그랬다면 다행이고... 나는 또 너희들이 맨날 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어찌나 걱정이 되든지...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와 본 거야. 저도 생각이 있으면 얼른 다른데 구해서 가겠지. 너무 닦달하지 마라. 네, 걱정 마세요. 여자는 얼른 남편을 보았다. 거봐, 언제나 주범은 나라니깐. 내가 당신 일 그만뒀다고 집에서 맨날 싸움이나 거는 사람이냐고? 남편은 여자의 눈빛을 읽었는지 말았는지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여자는 남편과 산책을 나섰다. 조용한 동네는 걷기 좋았고, 간간이 길고양이도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어릴 때 살던 그런 동네 같아. 그러게. 아니면 약간 귀농한 느낌이랄까? 뭐? 동네에 어르신들이 많이 사셔서 그런지 우리가 꼭 귀농한 젊은 부부 같잖아. 그래서 좋아? 나쁘지 않아. 나는 이런 동네 좋아해, 읍내가 좀 멀어서 그렇지. 근데 아까 어머니가 하신 말씀 말이야... 뭐? 특별한 얘기하신 거 있나? 자기가 맨날 이러니깐 나만 너무 예민한 사람 같잖아. 우리 집 별로라고 그러신 거, 우리도 애가 있었으면 큰집 고를 수 있었을 거라고 하신 거, 그리고 자기 일 그만둬서 우리 둘이 맨날 싸우고 있을까 봐 걱정했다고 하신 거. 우리 엄마는 그냥 별생각 없이 하신 말씀이야. 나도, 알아. 우리 걱정되서 하신 말씀이라는 거. 근데 그 걱정은 왜 맨날 일이 다 끝나고 나면 하시는 거냐고? 그럼 막 이사 왔는데 어디 다른데로 또 이사가야 되는 거야? 우리 형편에는 이게 최선인데... 그래서 나는 그 말이 한편으로는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려? 여보가 무슨 소머즈야? 하지도 않은 말이 다 들리게? 큭큭. 그런가? 문장을 완성해 보면, 며느리야, 너는 너는 왜 그렇게 집을 고르는 안목이 없니? 너는 왜 여태 아이가 없니? 너, 내 아들 일 그만뒀다고 맨날 바가지 긁지? 정작 나는 여보 고생한 거 너무 마음 아팠고, 이 집으로 와서 그나마 여유 좀 가지고 쉬라고 하는 참인데 말이야. 그리고 지금 내가 일하는 데 아이는 누가 키워? 응? 그런 뜻 아니야. 그냥 그 뭐냐 문장을 완성하지 마. 시어머니 문장 자동완성 기능을 다 지워버려. 알았지? 다 그냥 하시는 말씀이야. 별 뜻 없는 거라고... 난 그렇게 생각이 안 드는데. 어머님, 아버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 없으셔. 그냥 무조건 며느리는 악역 자리에 놓고 모든 일을 생각하신 거 같다고. 당신은 몰라. 진짜 별 뜻 없는 말이면 좋은 말씀 해 주실 수도 있잖아. 응원 해주실 수도 있는거잖아.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여자는 과연 자신이 뭘 모르는 건지 남편이 뭘 모르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창문을 열면 빌라 옆 동의 창문이 바로 코앞에 있고, 집집마다 들려오면 갖가지 소음이 벽을 타고 기둥을 타고 온 집안을 흔들어도 여자는 그 집에 마음에 들었다. 누가 뭐라든 우리 힘으로 살아가고, 우리가 행복하면 그만인 거지. 괜찮아. 그리고 나는 엄마처럼 안 살 수 있어. 아버지는 우리가 이사를 하든지 말든지 아침에 휭하니 나가버리면 그만인 사람이었지만, 여자는 적어도 자신의 남편은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자신과 함께해 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여보, 이 집 곧 무너질 것 같지 않아? 너무 부실하게 지은 것 같아. 밖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현관문이 펄럭펄럭 하고 있었다.
비록 신혼집은 심하게 부실하더라도.. 그 안에 우리는 단단하게 벼텨낸다고 여자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