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닌텐도 게임기 사도 될까? 남편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럼. 그러엄. 근데 여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냥...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여자는 남편의 대답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인이 게임기 못 사게 해서 공기청정기라고 그러고 산다잖아. 여자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게임기 살 때는 나한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 남편. 하지만 물건이 너무 커서 집에 둘 곳이 없는 게 아니라면, 여보가 알아서 해요.
여자는 남편의 월급이 얼마인지 알고 있었다. 한 달에 얼마나 버는지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살아온 경험으로 대략 짐작하고 있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 각종 서류를 떼다가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들어 본 월급보다는 확실히 적은 금액이었지만, 불규칙한 여자의 수입에 비한다면 나은 형편이었다. 남편은 특별한 취미가 없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으니 결혼 전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자신의 월급에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자의 권유로 가입한 실비보험도 있고, 부모님과 살 때는 내지 않았을 생활비와 각종 공과금 그리고 자동차 할부금도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각종 경조사와 부모님 선물, 용돈까지. 남편은 생각만 해도 숨이 찼을 것이다. 남편도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겁이 나지 않았을까. 첫 명절, 남편이 친정 부모님께 드리라고 내미는 용돈을 여자는 차마 받을 수 없었다. 그 돈이 남편 월급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생각하자니 그 돈이 달리 보였던 것이다. 행복하자고 한 결혼인데 누구 한 사람이 경제적인 부담을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 여자의 생각이었다. 웬만하면 반씩 부담하고, 각자 부모님은 각자 챙기기로 하자. 내 부모님 용돈까지 당신이 부담할 필요는 없어. 그러다가는 당신 기름값도 없겠다.
다들 그렇게 사니깐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다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는 거 아니냐고? 게다가 나는 재테크라는 걸 해본 적도 없다고. 결혼하고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남편이 돈을 벌어서 부인에게 다 갖다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돈으로 알뜰살뜰 살림도 하고,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재테크도 해야 되는 거라고.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생활비랑 저축은 각자 반씩 내서 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알아서 하면 되지. 여자는 한 달 내내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을 몽땅 가족을 위해 내놓으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럼 남편이 시부모님한테 용돈도 팍팍 드리고, 술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이야? 자식이 부모 용돈 많이 드린다는 데 내가 뭐랄 것도 아니고, 자기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좀 쓸 수도 있는 거지. 자기가 고생해서 벌었는데 그것도 못해? 뭐야,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야 답답하다고 가슴을 칠 노릇이지만, 돈을 번다는 것이 어디 마음처럼 쉬운 일인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여자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했으니 게으르다는 말보다는 능력이 없다거나 재능이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돈은 그렇게 여자의 곁에 머물지 않았다. 에휴,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해봤지만 안되는 걸 다른 사람한테 쉽게 바랄 수는 없어.
가난해도 결혼은 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을까? 결혼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 남편은 모아놓은 돈이 많지 않아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둘 다 가진 것이 없고, 양가 부모님도 지원은커녕 당신들 노후 준비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 형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여자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뜨악하는 얼굴로 내내 여자를 쳐다보는 친구에게 여자는 묻고 싶었다. 왜 결혼하면 꼭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다 갖추고 살아야 하는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려고 결혼하는 거야. 안정되고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하는 거라고.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네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
그렇지만,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려고 결혼하는 거야. 어차피 결혼 안 하고 혼자 살겠다고 각오도 했었는데 뭘... 설마 둘이 살면 혼자 사는 것보다 못하겠어? 불같은 사랑을 해서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폭발하는 감정으로 물, 불 가리지 않는 마음도 아니었다. 여자는 그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그것이 결혼의 본질이 아닐까 여자는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말이야. 내가 결혼으로 얻고 싶은 건 그것뿐이라고.
여자가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남편이 남편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가난 한 사람들도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여자는 믿었다. 결혼도 결국은 '자립'의 과정이 아닐까. 그래서 배우자에게 바라는 건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정서적 지지'라고 여자는 믿었다. 여자 역시 남편이 보내주는 열렬한 지지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깐.
미니멀리즘이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여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옆구리에 끼고 '와비사비' 라는 알쏭달쏭 한 말을 내뱉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물건은 사지 않았고, 능력을 넘어서는 소비는 결코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 여자의 이런 선택은 모두 여자의 어려운 형편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돈 좀 아끼지 말고 그냥 사. 아니면 내가 사줄까.
그때 여자는 깨달았다. 주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돈과 연결하는 사고를 멈추고, 시부모님께서 모든 것을 며느리 도리와 연결하는 사고를 멈춘다면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