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들을 착취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결혼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by aloha


나이 들수록 돈이 힘이야... 믿을게 뭐가 있어. 안 그러냐. 엄마의 한숨소리가 전화기 안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여자는 엄마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엄마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그건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엄마와 함께 해온 딸의 육감 같은 것이리라. 기술과는 상관없지. 그래... 여자는 계속 딴 생각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내, 왜 또? 무슨 일이야, 엄마? 아니... **아 너무 새겨듣지 말고, 지나가는 아줌마가 혼자 얘기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들어. 알겠지. 여자는 답답한 속을 풀 길이 없어 결국 딸의 전화번호를 누르고도 말 꺼내기를 망설이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럼, 난 엄마가 누군지 몰라. 모르는 아줌마야. 그러니까 얘기해도 돼요. 아니, 너네 아빠가 글쎄... 그럼 그렇지. 여자는 역시나 그렇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여자를 볼 수 없을 테니깐. 쓰레기통에 구겨진 카드 영수증이 있어서 보니깐, 무슨 댄스 스포츠 옷 파는 데서 50만 원을 쓴 거야. '땐쓰' 에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여자의 머릿속에는 흥겹고 관능적인 몸짓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자가 아는 아버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아버지의 세계는 관능과 흥이 넘치고 있었구나. 그것은 무릎이 아파 뒤뚱 거리며 한의원을 전전하는 엄마가 절대 속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했다. 저번에는 금은방이더니, 무슨 댄스복이 위, 아래로 50만 원이야? 돈 벌어서 그 여자 다 갖다 준다. 하이고. 집에는 돈 한 푼 주는 걸 벌벌 떨면서... 아휴. 남사스러워서 내가. 속상해 죽겠어. 여자가 별말이 없자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둑에서 걷기 운동 하고있어. 그래도 열이 안 식는다. 엄마, 그런 거 보면 아직도 속상해? 그럼, 속상하지. 다른게 속상하겠냐. 그놈의 돈이 속상하지. 여태껏 돈 한 푼 집에 들여 주더냐. 자기 벌어서 자기가 죄다 쓰니까 흥청망청 아니냐. 집에 식구는 거지 꼴인데. 엄마가 돈 좀 챙길 방법은 없는 거야? 아이고, 그런 게 어딨어? 그 악랄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 당해 낸다고. 그럼 엄마, 더 열심히 걸어. 한 살이라도 아빠보다 더 오래 살아야지. 그래, 그 방법밖에 없네. 아이고... 지 하고 싶은 데로 다 하고 사는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냐, 스트레스가 있냐. 너네 아빠는 천년만년 살 거다. 나는 아픈 데가 많아서 맨날 골골하는 데 뭐. 엄마, 장수는 유전이라고 그랬어. 외할머니 봐. 100살 가까이 사셨잖아. 엄마도 희망이 있다니깐. 엄마는 그제서야 웃음을 터트렸다. 말해봐야 별수 없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자조인지, 어이없는 여자의 농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웃음으로 전화를 끊을 수 있어 여자는 마음이 놓였다. 그래, 유전자를 어떻게 이길 거야.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야 보람이 있지, 이날까지 고생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말이야. 안 그러냐.






여자의 눈에 엄마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는 꼴을 못 보지. 암... 월급을 받으면 돈은 아버지가 다 가져가 버렸다. 그걸로 부족했는지 엄마를 앞세워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렸다. 엄마가 비상금을 조금이나마 챙길 기회가 오면 여지없이 무슨 일이 터졌다. 아이고, 내 주머니에 돈 있는 꼴을 못 본다니까... 엄마의 그 말은 누구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는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대해 몸부림치듯 한탄을 했었다. 외할머니가 다치거나 엄마의 멀쩡한 이가 부러지거나 여자가 학교에 돈을 가져가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꼭 어쩔 수 없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웃의 누군가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거나 친척 집에 일 생겨도 엄마는 외면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대상에는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는 편안해 보였다. 여자가 보기에 그것은 운명이라기 보다 엄마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나 몰라라 하는 은행 빚을 묵묵히 갚아 나갔다.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오면 그것도 같아주마 약속했다. 이일 저 일 벌이고 다니던 아버지에게 월급 받을 것이 있다고 나타난 사람에게도 만 원이든 이만 원이든 돈만 생기면 부쳐주었다. 너네 아빠가 그걸 다 알까? 한숨 섞인 엄마의 질문에 여자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당연히 모르지. 어디 그런 거 생각하는 사람이야. 엄마도 참... 누가 알아주길 바란 거야? 그래서 그렇게 고생스럽게 다 갚아 준거야. 아니, 돈 떼먹힌 사람이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 조금이라도 주려고 한 거지. 그래도 그 사람들도 고맙다고 안 해. 목돈 주고 푼돈 받았는데 돈 만 날린 기분이지. 아무도 엄마한테 고마워 안 한다고. 그러니깐 이제 그러지 마. 아버지가 돈 사고 쳐도 갚아주지 말라고.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조금씩 나눠서 갚아준 돈을 다 받고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맘 같은 사람 없다는 거 엄마가 맨날 하는 소리 아니었어? 씁쓸해 하던 엄마도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떳떳하면 된 거야 하고 말았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라면서 내내 엄마의 능력에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미련할 만큼 성실한 노동의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아버지는 카드로 장 보는 것 외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카드 명세서를 꼼꼼히 살피고 적절하지 않은 것을 다 짚어내고는 일정 금액 이상을 사용하면 카드를 정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엄마는 그 상황에 비참함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감도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물 한 잔까지 엄마의 손을 빌렸으며, 방의 불도 직접 끄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도 오랜 시간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었고, 여자가 집에서 항상 하던 일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여자는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작은 약봉지 들을 보았다. 그것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며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거? 너네 아빠가 아침에 약 먹고 버린 거지 뭐. 쓰레기도 쓰레기통에 못 갖다 버린데? 아이고 몰라. 나이가 갈수록 더 이상해진다. 손도 깜짝 안 해. 집에 있으면. 어린 시절 유행하던 드라마를 빗대어 아버지를 '귀남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이상하리만치 아버지는 집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저 빨아놓은 옷을 챙겨 입고, 밥만 먹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우리 모두 아버지에게 쩔쩔매기 바빴으니 귀남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래도 아버지는 내내 못마땅해 하다는 듯이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는데, 이 소리는 이상하게 여자의 마음을 졸아들게 했다.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도 많았지만 어린 여자가 집안일을 하고 있어도 쳐다보지 않았고, 언니가 형광등을 갈고 고장 난 tv를 때려가며 고쳐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에는 언제나 '성공시대' 같은 책이 들려있었다. 가족 하나 돌보지 못하면서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아버지였지만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왕처럼 굴고 있었던 것이다.







옆 동네 식당 아줌마 혼자 사는데 하나 있는 아들이 장가간다고 집 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더라. 그 아줌마도 혼자 몸으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거라도 비워주고 손님으로 오는 아저씨랑 살림을 합쳤거든. 근데 그 아저씨랑 도저히 더이상 같이 못 살겠다 싶은데 나와서 갈 데가 없다는 거야. 아들네한테 슬쩍 떠 보니깐 그 임대 아파트도 너무 좁다고 난리란다. 아야... 먹고산다는 건 어떻게 보면 참 치사하고 비굴한 거야.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깐 참고 견디는 거야. 너네 아빠랑 사는 거 엄마한테는 이제 나가서 일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어. 여기 내 직장이야... 희미하게 쓴웃음을 짓는 엄마의 모습에 여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다 늙고 몸도 아파서 엄마는 일하러 갈 데도 없어. 너네 아빠같이 못되고 독한 사람이 이혼하자 하면 오냐하고 재산 떼주겠냐 어디. 다 죽인다고... 다 불 싸지른다고 안 하겠냐.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싸우기 싫다.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이제 살날이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다고... '이혼' 이야기를 꺼낸 여자에게 엄마는 나지막이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진저리 난다... 정말 진저리 나게 살았어. 하지만 이제 와서 어디 가서 뭐 먹고살겠니? 너는 정신 똑바로 차려라. *서방이 아무리 착해도 여자는 돈 없으면 안 돼. 돈이 힘이야. 열심히 벌어서 모아놔야지. 여자도 일을 놓으면 안 된다. 알겠지?



밤낮 일하며 아버지가 진 그 많은 빚을 갚아내던 엄마. 그 작은 주머니에서 끊임없이 아버지가 가져갈 돈이 나오던 엄마. 그런 엄마가 이제 칠십이 되어... 다리가 좀 덜 아프면 식당이라도 나갈 텐데... 하신다. 여자는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더 이상 엄마로 보이지 않았다. 늙고 나약해진 여자. 다 꺼내주고 껍데기 만 남은 여자. 결혼이 이런 거라면, 엄마가 이런 거라면 여자는 천리만리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결혼이 자신을 절대 잡을 수 없도록.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으로 반 백 년을 살았지만, 그 이름이 가진 힘이 엄마에게는 없었다. 그저 몸에 밴 오래된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고, 그 길밖에 없는 줄 아는 인생이었다. 세상에는 이런 인생도 있다. 노력했지만 아무런 보람이 없는 삶. 착취 당하는 삶. 그 모습 안에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싶어 여자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일을 해야 해. 돈을 모아야 해. 남편을 믿을 수 없어. 내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들로 여자는 결혼을 하고도 혼란스러웠다. 딱 반반씩 내고 '여차'하면 또 딱 반반씩 나누고 각자 갈 길 가자. 응? 여보, 비트 줄까? 뭐? 지금 쇼미 더 머니 아니었어? 난 또 무슨 랩하는 줄 알았네. 뭐야? 무슨 소리야? 나는 진지하다고. 민망함을 이겨내기 위해 속사포처럼 내뱉던 여자의 말에 남편이 건넨 농담이었다. 그런 일은 없어. 뭐, 뭐가? 반반씩 못 나눈다고? 아니, '여차' 할 일이 없다고.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아니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반반 타령을 하며 끊임없이 자기 몫을 내세우는 냉정함 뒤에 숨어서 여자는 사실 겁에 질려 있었다. 여자의 머릿속으로 항상 생각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다' ... 내가 믿었는데 뒤통수치면 어떡해?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상대는 다른 생각하면 어떡해?


어떡하냐고... 그럼 안 믿으면 되잖아. 최선을 다하지 마.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살아. 그러면 됐지? 내가 믿고, 내가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여자가 생각하기에 엄마는 바보였다. 그것은 엄마의 운명이 아니었다.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박차고 나와도 될 허술한 종이 울타리일 뿐이었다. 결혼 초에 겁에 질린 여자는 자신은 엄마와 달라서 언제든 박차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겁에 질린 여자를 번번이 막아선 건 억압의 울타리도 오래된 관습의 울타리도 아니었다. 여자 자신을 위해 살아도 된다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도 된다는 남편의 따뜻한 격려가 여자를 붙들었다. 그래서 여자는 머물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기에 남편 옆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나는 너무 오랜 시간 겁에 질려 있었어. 나를 희생하지 않으면 내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내 주변의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을 테니깐.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 줄 알아? 무턱대고 희생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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