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수지_'죄송해요, 갑자기 전화가 걸려와 답이 늦었습니다.'
수지_'근데, 대박인데요?'
수지_'어떻게 전집을 차릴 생각을 하셨대요? 저도 전 진짜 좋아하는데, 제가 첫 번째 단골 할래요!'
연달아 보낸 수지의 메시지를 읽은 순간, 안절부절못하던 주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얼굴이 환해졌다. 주이는 기쁜 마음으로 최대한 공손하게 답장을 썼다.
주이_'감사합니다. 좋은 매물을 알아봐 주시면 꼭 사례하겠습니다.’
수지_'최선을 다해 알아볼게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매물이 많지 않고 나와도 금세 사라져요. 시티에서 멀지 않은 상가도 함께 알아볼게요. 맛있으면 찾아오겠죠. 비용은 어느 정도 생각하세요?’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매물만 알아보겠다는 수지의 반응에 주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맛있으면 찾아오겠죠'라는 그녀의 말이, 불확실한 미래의 커튼을 걷어줬다. 요새는 지나가다 맛있어 보이는 식당보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을 직접 찾아 나서는 시대니까. 수지를 향한 신뢰가 증폭됐다. 문제를 앞에 두고 어떻게 말하는지 몇 마디 나눠보면 안다.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은 화법부터 다르니까.
그러나 시드니 부동산 시세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한 주이는 비용, 임대료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세를 알아본 적도 없기에 막연히 돈이 많이 들겠거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이는 수지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물었다.
주이_'요즘 시드니 부동산 시세가 어떻게 되나요?'
수지_'아, 잠시만요. 제가 일단 지금 올라온 매물만 살펴보고 알려드릴게요.'
그녀는 잠시 양해를 구했고 주이는 갈증이 나서 냉장고에 있는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10분 뒤 수지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지_'여기가 3평 정도인데, 공간이 좁긴 해도 최소 주 $5,000은 내셔야 할 거예요.'
주이는 수지가 보낸 사진을 보고 금세 여기가 어딘지 알아챘다. 시드니 시티 한복판 상가가 찍힌 사진 구석에 주이가 두 달 살기를 하면서 즐겨 갔던 서점이 보였다. 주이는 사진을 요리조리 확대해 봤다. 분명 손님을 위한 홀도 바깥 테이블도 없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커피를 내리고 손만 씻을 정도의 손바닥만 한 공간인데 주에 5천 불이라니. 지금 환율로 어림잡아 450만 원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한 달도 아니고 한 주에 그렇게 큰돈을 내야 한다니, 월세가 아닌지 의심하며 되물으려다 말았다. 그 질문은 수지를 실망시킬 것 같았다. 주이는 한참 동안 답을 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전을 몇 장 팔아야 임대료를 갚고 이익을 낼 수 있을까? 전 한 장에 $5쯤에 팔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전을 일주일에 천 장을 팔아야 겨우 본전이라는 말인데...'
주이는 그제야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계산이 섰다. 예상 밖의 장애물에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오한이 들었다. 하지만 첫 번째 시도부터 포기하긴 이르다. 세상엔 안 되는 일이 없다. 주이는 어깨를 한없이 좁게 웅크리며 답장을 보냈다.
주이_'더 저렴한 매물은 없을까요?'
수지_'흠... 알겠어요. 매물은 직접 보실 건가요?'
호주에서 렌트나 임대를 알아볼 때 인스펙션(Inspection)이라는 것을 하는데, 공간을 직접 확인하고 계약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수지가 보낸 사진과 간단한 정보만으로는 덜컥 결정할 수 없으니, 후보를 세 군데로 좁혀주면 인스펙션은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이틀쯤 지나 그녀에게 답장이 왔는데 알려준 매물들은 하나같이 임대료가 비쌌고, 주이는 계속해서 ‘더 저렴한 곳 없나요?’를 물어야 했다.
주이의 성가신 부탁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조율 끝에 수지는 세 군데의 매물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가격이 낮아질수록 매물은 시티에서 멀어져 갔다. 주이는 구글맵을 켜고 수지가 알려준 매물들의 위치를 살폈다. 서리힐즈 상가, 뉴타운 상가, 서큘러키 뒤편 골목. 어딘지 대강은 알겠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주이는 수지가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맛있으면 찾아오겠죠.'
D-15
여름이 떠나지 않은 3월의 시드니는 여전히 흥분되고 활기찼다. 주이가 아이들과 머물렀던 지난 1-2월의 여름보다 여행객이 더 많아진 시드니는 코로나로 억눌린 여행자들의 욕구를 성실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맛집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국적이 다양한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버스킹을 하느라 시티가 소란스러웠다. 한 달 사이 처음 본 카페도 눈에 띄었다. 주이는 마치 어제까지 이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익숙한 발걸음으로 조지스트릿을 빠르게 걸었다. 지난달 출국을 앞둔 주이가 ‘내가 이곳에 다시 올 날이 있을까?’ 생각하며 엉엉 울었던 벤치가 보였다. 그 벤치에는 잘생긴 인도 청년들이 앉아 헝그리잭스 버거를 먹고 있었다. 주이는 '풉'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여길 다시 오다니 믿을 수 없어.'
"최주이 씨?"
누군가 주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아, 네! 혹시 수지...?"
"네. 전 대학생인 줄 알고, 긴가민가 했네요, 오늘 도착하셨어요?"
“네, 오늘 아침에요.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와, 아침에요? 엄청 피곤하시겠는데요? 가시죠. 제 차로 모실게요!”
주이는 ‘타운홀 KFC앞에서 오후 3시에 분홍색 에코백을 메고 있겠습니다.’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 수지는 자연스럽게 태닝 된 피부에 큰 키, 금발이 살짝 섞인 긴 생머리를 소유한 여성이었다. 첫 만남의 서먹함을 느낄 새도 없이 주이는 빠른 걸음으로 수지의 뒤를 따랐다. 두 달 살기 할 때 주이가 즐겨 찾던 바리스타 대회 1등 커피숍 L카페 근처에 다다랐다. 주차비를 정산한 수지는 파랗고 단단한 혼다 SUV에 타라고 수지에게 손짓했다. 자동차의 단단함이 용감하고 적극적인 그녀의 성향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비 온 뒤 편백숲에서 날 법 한 방향제 향이 주이의 온몸을 감쌌다. 10시간 비행의 피로를 한방에 날리는 향이었다. 수지는 이마 위로 올렸던 선글라스를 내려 끼고 주행을 시작했다.
“향이 좋죠? 최근에 방향제를 바꿨는데 차를 타면 숲 속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어머, 저도 방금 그렇게 생각했는데, 10시간 비행의 피로가 확 가시는 것 같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수지가 어색할 틈도 없이 물었다.
“주이 씨 인스타그램을 잠깐 봤는데, 사진을 굉장히 잘 찍으시던걸요? 올해 1월부터 두 달 동안 아이들이랑 호주에 계셨던 거죠? 전 매일 출퇴근하면서도 시드니가 그렇게 멋진지 몰랐는데, 주이 씨 피드에 있는 사진 덕분에 시드니를 다시 보게 됐어요.”
칭찬을 들은 주이는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신이 나서 말했다.
“와... 감사해요. 전 사진 찍는 게 취미인데요, 제가 서 있는 장소, 순간의 분위기까지 사진에 담으려고 노력해요. 그런 사진이 많이 쌓이면 부자가 된 것 같이 기쁘더라고요.”
“와, 그럼 알부자신데요? 근데 어떻게 하면 사진에 분위기까지 담죠? 대단한 재주네요.”
“하하.. 부끄럽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일단 뉴타운 먼저 가시죠.”
“네,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퇴근하고 온 거니까 괜찮아요.”
“퇴근요? 회사에 다니세요?”
“네. 월급만으론 부족해서 퇴근하고는 부동산 일도 좀 하고 있어요.”
그녀는 우리나라와 반대라 익숙지 않은 도로에서 능숙하게 좌회전 핸들을 돌렸다. 분명 우회전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좌회전을 하고, 신호체계도 여간 낯선 게 아니다. 주이는 호주에서 렌터카를 이용하지 않았다. 시드니는 주차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고, 주차 공간도 적은 데다 운전 방향까지 반대라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 혹시 모르는 난처한 상황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중교통이 워낙 잘 돼있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때 창밖을 구경하며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대단하시네요. 투잡이라니...”
“네. 뭐든 배우는 건 도움이 되니까요, 다니는 회사 일도 재밌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좋아요. 부동산 일도 회사선배한테 배워서 시작하게 됐어요.”
“회사 선배가 투잡을 하는 거예요?”
“네, 선배가 저를 이 길로 인도했으니 그런 셈이죠.”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왜요?”
"선배가 후배한테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 잘하라고 가르쳐야지, 투잡 하라고 가르치진 않잖아요?"
“지금 하는 일은 업무시간에 잘하면 되고, 투잡은 퇴근하고 잘하면 되잖아요?”
“맞는 말인데, 한국에선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런가요? 그런데 제 선배는 최근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코로나로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찾으면서 부동산으로 대박이 났죠. 저도 그 뒤를 밟고 싶어요.”
주이는 수지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환영을 봤다. 다니는 회사에 안주하지 않고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이 타국에 있다니. 주이는 벌써부터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겠다는 계획을 잘 실현할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이 밀려왔다.
수지는 속도를 낮추고 한적한 도로에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려 휴대폰으로 주소를 체크한 뒤 낡은 상가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이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락스냄새가 주이의 코를 찔렀다.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수지는 뒤를 따라 걷던 주이를 보고 손가락으로 점포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에요.”
걸음을 멈춰 수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주이는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