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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Feb 19. 2024

우주의 기운

운은 사람과 함께 온다.

"그런데 어쩌다 시드니까지 와서 전집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수지의 심각한 물음에 주이는 잠시 멈칫했다.


'제가 전을 좋아하기도 하고, 잘 부치기도 하고... 세상에 유일무이한 걸로 사업을 해야 부자가 된다길래요... 제가 잘하는 일로 부자가 되고 싶은데, 잘하는 건 뭘까 고민하다가, 아 맞다! 시드니에는 전집이 없었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이의 머릿속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아... 제가 좋아하는 두 가지가 전이랑 시드니거든요. 잘 어울리지 않나요?"


대답 대신 수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주이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했다는 표정이었다. 주이는 오늘 처음 만난 수지에게 애송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나머지 이런 대답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긴장은 수지에게 가감 없이 전송됐다. 

오늘 둘러본 매물은 전부 주이의 성에 차지 않았다. 매물을 전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고객을 보면 기운이 빠질 만도 한데, 오히려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는 수지가 주이는 못마땅했다. 마치 어딘가에 보석 같은 매물이라도 숨겨둔 사람처럼 느껴졌다. 주이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매물인 뉴타운 상가는 미용실, 안경점, 패스트푸드점등이 입점한 중소형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주위에 Westpac 은행이며 병원이며 상가들이 즐비해 있어서 점심 때는 전이 제법 팔릴 듯했다. 다만 주이는 기름 냄새가 이 건물 복도 전체에 진동하는 참사는 막고 싶었다. 건물 안 복도는 폭이 좁았고 점포는 건물 안으로 상당히 걸어 들어가야 했다. 주이는 처음부터 수지에게 냄새 때문에 야외 점포를 선호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게다가 긴 시간 서서 전을 부칠 때 시선이 향하는 맞은편은 꽃집도 아닌 남자화장실 입구였다. 화장실에 얼마나 락스를 뿌려댔는지, 주이와 수지 모두 머리 아픈 락스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두 번째 매물인 서리힐즈의 상가는 주이가 지난 두 달 살기 때 즐겨 갔던 브런치 가게와 가까웠다. 서리힐즈는 브런치 카페가 많고 아기자기한 골목이 예뻐 여행자들이 일부러 찾는 명소가 됐지만 번화가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주이는 점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빽빽이 늘어선 오래된 주택가와 그 앞으로 알록달록한 쓰레기통이 보였다. 시원한 그늘도 좋고 떨어지는 나뭇잎도 운치가 있어서 그 앞 벤치에서 커피 한 잔과 여유를 부리기엔 적절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점포 내부를 살폈다. 폭은 좁지만 안으로 깊게 난 공간에 작은 개수대 하나가 보였다. 그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포대자루 하나가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이를 보며 수지가 서둘러 말했다. 


"아, 여긴 이전에는 개인 마사지샵을 했던 곳이래요."

"그렇군요."


석면냄새가 났다. 하얗고 건조한 공간이 마사지샵을 하기에 적당해 보였다. 마침 고개를 들어 높은 천장을 보니 작은 샹들리에가 보였다. 점포 깊숙한 곳부터 빠르게 살핀 주이는 걸어 나오며 수지에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커피면 몰라도, 전을 부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네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서큘러키 근처 점포는 최근 리모델링을 마쳐 깔끔하고 단정했다. 검은색 벽돌과 창틀이 세련돼 보였고 바깥으로 보이는 맞은편 카페의 외관이 주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곳에 서서 전을 부치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2-3분만 걸어 골목을 나가면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로 향하는 최적의 입지조건이었다. 수지는 이 점포가 주에 5000$에 매물로 나왔다고 말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임대료에 주이는 월세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수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여긴 애초에 주이 씨가 고려할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견물생심이라고... 막상 보면 마음이 또 달라질 수 있잖아요?"

"휴... 제가 대체 전을 몇 장을 팔아야 임대료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겠군요."

"상가 주인은 근처에 상가 대여섯 개를 보유한 젊은 중국인이에요. 가만히 앉아 임대료만 받아도 먹고살죠.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 너무 괜찮죠?"

"와... 그저 부럽네요."

주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파랗던 하늘에 어느새 핑크색 노을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곳저곳 이동하며 매물을 보여주느라 수고한 수지를 위해 주이는 미리 지인의 추천을 받아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예약할 때만 해도 근사한 곳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시드니 전집 점포 계약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거라 상상했다. 그러나 기대한 시나리오와 달리, 레스토랑을 향하는 차 안에서 주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드니 시티의 세련된 골목과 행인들이 그저 쓸쓸해 보였다. 수지는 적막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Greenday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주이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테라스 좌석을 배정받은 둘은 1kg 토마호크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웨이터는 샐러드와 함께 주이 앞에는 샴페인, 수지 앞에는 맥주 한 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찡긋 웃으며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수지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인스타그램 알림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주이는 정신을 차린 듯 적막을 깨고 수지에게 물었다.


"참, 어떻게 인플루언서가 되신 거예요?"


주이의 기습 질문에 잠시 당황한 수지는 입술을 씰룩이며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부동산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저에게 이 일을 알려준 선배가 고객을 모으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저처럼 사무실도 없는 프리랜서에게 고객이 제 발로 찾아올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인플루언서들의 행동패턴을 분석해 봤죠. 어떤 식으로 팔로워를 모으고 상호작용 하는지를 분석하고 따라 해 봤어요. 근데 희한하게 이게 몇 번 하다 보니까 그 방법들은 죄다 불편하더라고요. *후킹을 위해 핵심은 포장하고 자극적인 표현을 써야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닌데 진심이 담기지 않은... "

*후킹: 고객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요즘 인플루언서들이 하는 특유의 말투나 근거 없는 자신감, 보는 사람은 불편해요.”

"정확히 아시네요. 하지만 후킹 없이 팔로워의 유입은 힘들어요. 오죽하면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말이 있겠어요?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치트키를 발견했어요."

"치트키요?"

"네. 돈을 좀 썼어요. 아, 그런데 돈으로 팔로워를 산 건 절대 아니에요."


치트키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뜬 주이를 보며 수지가 손사래를 쳤다. 마침 건장한 남자가 트롤리 위에 두툼한 토마호크가 담긴 접시를 올려 테이블 근처로 가져왔다. 돌판에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와 연기에 담긴 불향이 두 사람의 허기를 자극했다. 스테이크 해체쇼라도 되는 듯 양손에 칼을 들고 현란한 움직임으로 쓱싹쓱싹 썰은 고기를 돌판 위에 올렸다. 그 모습을 골똘히 지켜보던 주이는 절로 손이 포크를 향했다. 주이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수지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스테이크 서빙을 마치고 사라지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짧게 전했다.


"배고픈 제 모습이 갑자기 웃겨서요."


수지는 그제야 주이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고는 저도 따라 웃으며 잔을 들었다. 둘이 먹기엔 제법 많은 양이었지만 둘은 상당히 배가 고팠다. 그을린 고기는 육즙이 입천장에서부터 혀 전체로 쏟아지면서 부드럽고 쫄깃한 맛을 냈다. 전집 창업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으나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는 대성공이었다.

"이 집 스테이크 진짜 죽이네요. 전 15년을 호주에 살면서 여기에 이렇게 맛있는 스테이크집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

"정말요? 여기 레스토랑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맛있다고 하셔서 저도 기쁘네요, 스테이크가 오늘 저를 살렸어요. 하하... 참, 아까 말한 치트키는 뭔데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비밀이라도 되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실은 비싼 수강료를 내고 인플루언서 강의를 들었어요. 이 강의는 비싼 만큼 전담매니저까지 배정해 주는데, 매니저가 제 필살기들을 분석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방식을 코칭해요. 그 과정에서 저에게 잘 맞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예를 들면 저는 부동산 투자, 미니멀라이프, 러닝 같은 주제에 관심이 많은데, 실제의 내가 목표한 나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으라고 하더라고요. 이 과정 하나하나가 저를 정의하는 한 편의 스토리가 된대요. 또 영상을 만들다 보면 너무 길어지는데 요새는 길면 지루해서 사람들이 안 좋아한대요. 매니저가 짧고 간결하게 영상을 만드는 방법도 알려 줬어요. 이 강의를 수강하는데 투자한 수백 만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어요. 결국 돈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깨달았고요.”

“와... 치트키를 쓰는 데 과감하게 투자한 돈이 결국 인플루언서가 되겠다는 목표를 이루게 해 줬네요. 돈으로 시간과 수고를 샀군요?”

“그거예요, 그게 바로 핵심이죠. 타인의 능력을 지렛대로 활용해 더 높이 뛰어오르는 레버리지예요. 재주가 상품이 되는 시대니까요. 제가 몇 년 간 분석하고 고민한 것들이 강의 교재로 이미 나와 있더라고요. 혹시 서핑해본 적 있으세요? 서핑할 때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을 등지고 몸을 맡겨야 더 멀리, 더 빨리 나아갈 수 있거든요? 파도가 돕지 않으면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멀리 나아갈 수 없어요. 전담매니저가 제게 파도가 되어준 셈이죠."


수지는 레버리지 신봉자라도 되는 듯 레버리지의 장점에 대해 길게,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레버리지는커녕 서핑보드 위에서 열심히 손으로 파도를 저으며 살아왔다. 파도와 지렛대. 이 말이 주이의 뇌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자격증 강의도 아니고, 인플루언서가 되는 강의라니... 선뜻 내키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용기가 대단하네요."

"근데 이제 그 강의는 예전만 못해요. 2년 전만 해도 전담 매니저의 코칭이 쓸모가 있었거든요? 근데 이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덤벼드니까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그만큼 희소성이 떨어졌죠. 그때 제가 그 파도를 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결정은 망설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주이씨 처럼요. 시드니에 전집을 차려 볼 생각을 한 주이 씨도 대단해요. 세상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보험만 부지런히 넣고 다가올 위기를 산처럼 두려워하면서 살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월급에 만족하면서 보험도 빵빵하게 들어놨거든요. 그런데 올해 1월에 육아휴직을 하고 호주에서 두 달 살기를 했는데 '아,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빡 꽂히더라고요.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곳에서 할 수는 없을까?. 진짜 큰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휴... 역시 쉬운 게 아니었네요."

"주이 씨는 특유의 친화력이 있어 보여요. 좋은 손님을 많이 끌어모을 에너지도 느껴지고요. 대학 다닐 때 동아리에서 명리학 공부를 좀 했거든요? 근데 그때 배운 지식이 사람을 대하는 직업에서 쓸모가 좀 있어요."

"명리학이면.. 사주 같은 거예요?"

"비슷한데 조금 달라요. 우주의 이치를 공부하는데 우주의 일부로 인간을 보는 관점이에요. 우주의 기운에 따라 한 개인의 운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논리 뭐 이런 건데...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주이 씨에게 지금 아주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거예요. 운이 바뀌고 있는 징조... 랄까요?”

"진짜요? 다르게 살고 싶다고 마음먹어서 그런가, 기분은 매우 좋네요. 오늘 본 인스펙션이 하나라도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실망하는 기색의 주이를 보고 수지는 짙은 미소를 보였다. 어쩌면 수지는 처음부터 주이가 마음에 드는 매물을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플래이트 위 마지막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수지가 냅킨으로 조심스레 입을 닦고 오른손을 턱에 괴더니 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긴 한데..."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빛 뒤로 어느새 어둠이 노을을 전부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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