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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Feb 25. 2024

내가 왜 전집을 차린다고 했을까.

월급이나 따박따박 받을 것을

“언니, 왜 아무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까?”

“곧 오겠지, 기다려 보자.”


북적이는 차이나 타운 옆으로 트램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이쪽저쪽으로 바쁘게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이는 시계를 살폈다. 12시를 10분 남겨두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배고플 시간이 아닌가? 기름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몰려들 줄 알았는데, 행인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마치 이곳이 보이지 않는 유령전집이라도 되는 듯이. 차갑게 식어가는 김치전, 빠르게 흐르는 시간, 주이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진혁의 목소리가 주이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거봐, 사업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주이는 눈물이 났지만 울지 않으려고 웅크려 숨을 참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건조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커튼 사이로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꿈이었구나...' 꿈이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한 주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닥까지 차 버린 담요를 집어 아이들 몸에 덮어주었다.




기약 없이 비운 식당 일부를 조리공간으로 쓰는데 수지는 일주일에 $500를 청구했다. 주이의 사정을 들은 수지의 작은아버지는 가게를 통째로 임대하는 것이 아니니 보증금은 안 받겠다고 했다. 세금, 유지비가 임대료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거저 하는 장사나 다름이 없었다. 주이는 카드결제기 구비, 납세 등록 등 타국에서 감당하기 까다로운 모든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어 준 수지의 작은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수지의 동의를 얻어 가게 입구 옆 슬라이딩 도어를 옆으로 밀고 창 크기에 맞게 매대를 제작해 설치했다. 기름을 잘 흡수하는 한국전통문양 유산지를 쿠팡에서 해외배송으로 주문해 받았다.  

수지가 개나리색 스트라이프 어닝을 설치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해 준 덕분에 기존 한식당의 간판을 슬쩍 가리면서 시선을 끄는 효과를 냈다. <시드니 전집>이라고 새겨진 배너를 입구 옆에 길게 붙였다. 상호 옆에는 ‘Take away Korean Pancake'라고 썼다. 수지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당의 홀은 당분간 이용하지 않을 작정이므로 바깥 창문에 '기존에 운영하던 한식당은 일정기간 운영하지 않음'이라고 한글과 영문으로 각각 써서 부착했다.

김치전과 해물파전은 매일, 산적은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부치기로 했다. 주이는 오늘부터 일주일 간 손님의 반응을 살핀 뒤 메뉴를 조정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가게 문을 열고 어제 미리 준비해 둔 재료들을 꺼냈다. 주연은 커다란 보울에 물과 부침가루, 손질한 오징어와 다져놓은 김치, 기름 뺀 참치를 넣고 뒤섞었다. 미리 달궈둔 팬에 정량의 반죽을 붓고 노련한 손놀림으로 하나씩 뒤집었다. 뒤집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최고의 맛으로 태어나주라. 제발.' 초벌로 부쳐둔 전은 키친타월을 깐 채반에 나란히 올려뒀다. 전이 사방으로 수증기를 뿜어 내니 바삭함만 남았다. 


"언니가 하나 먹어도 돼?"

"당연하지! 이걸로 먹어봐, 아까 부친 건 초벌용이고 이게 다 익힌 거야."

"그래? 음... 진짜 맛있네. 시드니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다."


바사삭 소리가 나는 전을 한 입 베어문 주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치 척을 내밀었다. 나머지 전은 반으로 접어 크게 한 입에 털어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키친타월로 손을 닦았다. 


"그래서, 어제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꿈을 꿨단 말이지?"

"응. 너무 긴장했나 봐. 진짜 한 명도 안 오진 않겠지?"

"첫날이니까 너무 기대하지 말자. 너무 맵지도 않고 적당해. 일단 내 입에 맛있으니까 합격."


주이는 네모 틀 안에 주연이 섞어 준 계란을 붓고 길쭉한 햄, 게맛살, 파, 버섯, 당근을 가지런히 올렸다. 원형틀과 네모틀은 일관성 있게 전을 부치려고 한국에서 구해 가져왔다. 산적이 익기 시작하면 올려놓은 차례대로 뒤집고 가장자리에 덕지덕지 엉겨 붙은 계란옷을 뒤지개로 잘라내 채반에 담았다. 색색의 산적이 나란히 담겨 있으니 먹음직스럽다.


판매 가격은 재료의 원가, 가게 임대료, 시드니의 물가 등을 고려해 오징어김치전은 $8, 해물파전은 $9, 산적은 $6로 정했다. 점심 가격이 평균 $15을 웃도는 시드니에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재료는 리드컴에 있는 아시아 식자재 마트에서 구입했다. 그곳은 마치 한국의 하나로마트 같았다. 가격이 원화가 아닌 $로 적힌 것 빼고는 버섯, 맛살 같은 웬만한 한국 식재료는 모두 구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김장김치는 한국의 부모님으로부터 선편을 통해 받기로 했고, 부족하면 시드니에서 구매한 김치를 잘 익혀 만들기로 했다. 눈이 감길 정도로 새콤한 묵은 김치는 맵고 깊은 맛이 나서 좋았지만 시드니에서 구매한 종갓집 김치도 상온에 익히니 새콤 달콤한 게 감칠맛이 났다. 



주이가 한국에서 준비해 온 담양대나무 채반 위에 먹음직스러운 전들을 나란히 진열했다. 지나가는 현지인들이 채반 위 오색산적의 현란함에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음식사진 아래 이름과 재료를 친절하게 적은 엑스배너를 매대 우측에 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엑스배너에 적힌 각종 메뉴에 대한 설명을 찬찬히 읽고 "One Pajeon Please." 하는 식으로 주문을 했다. 외국인의 입에서 한국음식 이름이 그대로 발음될 때 주이는 자신이 애국자라도 된 것처럼 심장이 짜릿했다.

판매 첫날에는 홍보차원에서 다양한 종류의 전들을 무료로 시식하게 하고 반응을 살폈다. 소주잔 크기의 종이컵에 잘게 자른 전을 하나씩 넣고 이쑤시개를 꽂았다. 우리나라 마트의 시식코너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이쑤시개가 꽂아진 이 전도 판매하는 줄 알았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이는 급하게 종이를 두 번 접어 "Free for everyone.(무료)"이라고 써진 팻말을 붙였다. 그제야 동양인 몇몇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Help yourself.(마음껏 드세요.)"


맛을 보고 나서 하나씩 구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배만 채우고 칭찬을 지불한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주이는 매출을 욕심 낸 하루가 아니니 마음을 편히 먹기로 다짐했지만 내심 공짜 전만 힐긋거리는 손님이 야속했다.


'맛있다고 했으면 사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한 중국인은 한국식당에서 김치전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먹는 전이 훨씬 맛있다고 극찬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주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 부치는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는 손님들은 마치 서커스를 보는 관객처럼 눈에 호기심이 그렁그렁했다. 


주이는 어젯밤 잠들 기 전 김치전이 불티나게 팔리는 상상을 하다가 잠들었다. 꿈에서는 전이 하나도 안 팔리는 악몽을 꿨다. 설마 내일부터 이 악몽이 현실이 되진 않겠지. 준비한 재료를 소진한 장사 첫날, 오픈 준비를 돕기 위해 따라 나온 언니에게 마음에도 없는 하소연을 늘어놨다.


"언니, 내가 왜 여기서 전집을 차린다고 했을까?"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오늘 얼마 번 줄 알아? $200도 못 벌었어... 매달 월급 따박따박 넣어주던 회사가 더 나았을까 싶고... 매일 이렇게 조금만 벌진 않겠지?”

"당연하지, 오늘 온 사람들이 전이 진짜 맛있다고 하는 거 안 봤어? 다 내일도 온다고 했잖아. 첫날이라 그래,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오늘은 복잡하게 그런 생각하지 마. 언니가 정리할 테니까 이거 마시면서 넌 좀 쉬어."


주이의 친언니 주연은 시원하고 묵직한 핑크색 분다버그를 따서 주이에게 내밀었다. 달고 쓴 탄산이 주이의 목구멍을 사납게 두들겼다. 온몸이 쑤시고 허리도 욱신거렸다. "아..." 신음소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이의 손가락 전체가 벌겋게 데인 것 같이 얼얼했다. 


'역시... 쉬운 게 아니었어...'


주이는 기진맥진한 채로 정돈을 돕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1개월 전, 주이의 집.

"갑자기 그렇게 홀연 떠날 수 있다니, 놀랍다."

"그게 어때서? 지난달에 다녀온 호주를 이번 달에 못 가라는 법, 있나? 후훗."

"대부분 사람들은 외국을 큰맘 먹고 가, 너처럼 부산이나 제주도 가듯 적당히 마음먹고 가는 게 아니라고. 큰 맘을 밥 먹듯이 먹는 네가 내 눈엔 엄청 신기하다."

"언니, 근데 나 정말 호주 가는 거 하나도 안 두려워."

"내 말이 그 말이야. 넌 호주를 제주도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잖아?"

"배거본딩 덕분인 것 같아. 내가 말했잖아, 그냥 여행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두 달이나 일상을 살아보는 게 내 삶을 진짜 크게 변화시켰다고."

"뭐 두 달 해외 다녀왔다고 딴사람이 돼? 네 말대로면 세상 사람 모두 두 달간 해외에 나가 있으면 안 변할 사람이 없겠는데?"

"여행이 일상이 되면 외국이 우리 동네 같고, 그때쯤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양한 삶의 방식들이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돼. 해만 뜨면 추위도 잊은 채 서핑하는 사람들, 길가 아무 데서고 버스킹 하는 사람들,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각자의 개성을 살려 인생을 브랜드로 창조하는 사람들. 나와 다른 공기를 마시고, 다른 기후에 살고, 다른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보고 만날수록 나도 그들을 거울삼아 세계라는 큰 무대에서 뭐든 마음먹은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우와..."

주연은 주이의 말에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신이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근데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배거본딩을 하려면 최소 6주 이상 일상을 멈추고 떠나야 돼, 근데 말이 쉽지, 실제로 '6주'라는 시간을 삶에서 뚝 떼어 실행에 옮길 용기 있는 사람들이 세상엔 별로 없다는 거야. 지난번에 내가 말했나? 나 워킹홀리데이 때 알았던 언니가 호주에 정착해서 셰프로 일하는데, 그 언니가 호주에 있는 거 알고 한국에서 한 번 오겠다고 연락 온 사람이 10명도 넘었대. 근데 실제로 온 사람은 나 한 명뿐이었다고."

"흠... 다들 말로만 '나도 한 번 가볼까?' 한다는 거지?"

"생각은 누구나 해. 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대. 나도 그랬지 뭐, 근데 이제는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과거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했어. 한 번 알을 깨고 나오니 보이기 시작하더라. 뭐든 시작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든 일어나. 시작이 쌓이면 경험치가 늘어나니 도전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져. 그럼 자연스럽게 내 아이들에게도 더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겠지? 내 인생이 즐거워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마흔이 넘고 보니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이거 해보면 어떨까?' 상상만 하고 마는 건 이제 안 하고 싶어 지더라. 이걸 삼십 대에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고."


주이가 하는 말을 미동도 없이 듣고만 있던 주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언니도, 같이 갈까?"


주연은 마흔이 넘어 얻은 외동아들과 주이를 따라가겠다는 큰 결심을 내렸다. 주연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꿈의 드래곤이 깨어났다. '한 번 해볼까?' 생각만 하고 실천을 미뤘던 자신의 인생이 일곱 살 아들과 오버랩됐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아들의 인생까지 주저하게 만들 것 같으니 지금 뭐라도 시작해야겠다는 다급한 이끌림을 느낀 것이다. 주연은 몸소 실천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일곱 살 아들을 위해 육아휴직을 낸 주연도 남편을 설득해 뒤늦게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주이에게 있어 언니와 함께 떠나는 시드니는 정말이지 더 두려울 게 없었다. 혼자 타국에서 아이 둘을 돌보며 전집을 운영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각오는 했지만 출국일이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을 부치다가 아이가 다쳤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쩌나, 할 일이 산더미인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서러울까, 어떻게든 혼자 이겨내야 한다 마음먹었으면서 두려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 주연이 용기를 내 준 덕에 주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매사에 걱정이 많은 주연도 동생의 패기에 배팅해 이곳 시드니까지 따라온 것이다. 주이는 복잡한 오늘의 감정과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언니에 대한 고마움으로 울컥했다.



"카톡카톡."

진혁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_어때? 오늘 좀 많이 팔았어? 대박 날 것 같아?'

'_수고했다, 고생했네 뭐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순 없어?'

'_수고했어. 피곤하겠네, 이제 뭐 할 거야?'

'_애들 밥 먹이고 내일 장사 준비도 해야지.'

'_간단히 먹이고 좀 쉬어, 난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

'_밥이랑 잘 챙겨 먹고 있지?'

'_걱정 마, 휴가 내서 우리 가족들 만나러 가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_그래, 이따 밤에 영통(영상통화)할게.'


진혁은 주이가 시드니로 떠난 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을 했다. 주이는 그런 남편이 도리어 안쓰러웠다. 주이가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러 떠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은 '남편이 동의했어요?'였다. 경영학을 전공한 진혁은 공상가 와이프가 전집을 차려보겠다고 떠날 때, 머릿속에 계산기를 두들겨보지 않았을까? 진혁이 주이를 말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뒤지개 하나 들고, 안전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 타국에서 전집을 차리겠다는 와이프를 말리고 싶었지만, 한 번 마음먹은 것은 하고야 마는 주이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기회를 준 것이다. 주이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혁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일은 없게 만들기로 말이다.


'거봐, 내가 뭐랬어.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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