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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Feb 26. 2024

한국사람이 더 무서워

공짜 좋아하시면 머리 벗어집니다.


"여기서 이런 사업하시려면 돈이 꽤 많이 들었죠?"

"네? 아... 뭐, 그렇죠."


파전을 그 자리에 서서 쩝쩝대는 한상무가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을 던졌을 때 주이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옆에 서서 지갑을 뒤지는 고대리도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질러진 매대를 정리하는 주이의 손길과 전집의 실내를 번갈아 쳐다보던 한상무는 전을 쥔 손을 올리며 또 한 번 물었다.


"이거 팔아서 먹고 살만 합니까?"

"네?"


주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싸울 기세로 한상무를 쳐다봤다. 한상무는 질문만 던져놓고 답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휴대전화만 응시하고 있다. 주이는 들고 있던 뒤지개로 삿대질을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오늘따라 부쩍 날도 습하고 날씨도 오락가락한 것이 주이의 화를 북돋았다.


‘이보세요, 당신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나도 이름만 대면 알만 한 대기업에도 다녀 봤고 돈도 쓸 만큼 쓴 사람이에요. 먹고살기 힘들어서 시드니까지 와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에요.'


주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런 사람과 입씨름해 봐야 얻을 게 없으니 차라리 능청을 좀 떨어보기로 했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침착하게 뻔뻔해야 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이걸로 먹고 살기엔 택도 없죠, 고객님 같은 분들이 많이 사 주셔야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죠?”


주이가 넉살 좋게 말하면 한 개라도 더 사 먹을 줄 알았다. 한상무는 허허거리며 그녀의 말을 가볍게 흘리고 고대리에게 독촉하듯 물었다.


"거, 물티슈는 없나?"

"상무님, 여기 그냥 티슈는 있는데 물티슈는..."


고대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챙겼을 법한 구겨진 티슈를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주이는 고대리가 ‘상무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직장상사를 모시고 출장 온 부하 직원쯤으로 대충 둘의 관계를 짐작했다.


"여기, 물티슈 드릴게요."


주이는 한상무가 얄미웠지만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일회용 물티슈 두 장을 내밀었다. 물티슈를 보더니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진 한상무는 느끼한 미소를 짓고는 통사정을 시작했다.


"아, 여행 다니다 보니 물티슈 쓸 일이 참 많더라고요. 한 대여섯 개만 더 챙겨 줄 수 없나요?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니 이런 부탁도 하고, 참 좋고만요, 허허!"

"아... 그렇긴 하죠. 여기 있어요."


한상무는 물티슈 여섯 개를 낚아채듯 주머니에 눌러 넣더니 가격을 물었다.


“다해서 얼만가요?”

"파전 두 개, 김치전 한 개 하셔서 총 26불입니다."


한상무는 고대리가 지갑에서 꺼낸 현금 30불과 기름 묻은 유산지를 함께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까 물티슈를 달라고 통사정할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메뉴판에 콜라가 4.5불인데 4불에 주면 안 돼요? 같은 한국 사람끼리 서비스, 좋잖아요?"


주이는 한상무가 한시바삐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에 30불을 받았다. 콜라를 받고 횡재를 한 듯 기뻐하던 한상무는 물티슈 두 개를 꺼내 손과 입을 거칠게 닦고 신고 온 구두 위 먼지까지 말끔히 훔친 뒤 다 쓴 물티슈를 바닥에다 버렸다. 마지막으로 주이의 인류애까지 무너뜨린 명언을 남기고 가게를 유유히 떠났다.


"잘 먹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주 여행을 와 줘야 이 나라도 먹고살지, 안 그래요?"


호주는 대륙이 넓고 천연자원이 풍부해 관광업은 호주가 벌어들이는 소득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외 관광객들이 무분별하게 찾아와 도시를 오염시키고 현지의 규범을 위반하는 사례가 많아 관광객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단다. 주이는 한상무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헛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타국에서 한국인이 욕을 먹는다면 한상무 같은 사람 탓이리라!


대체로 현지인들은 현금을 지불할 경우, 거스름돈은 아예 안 받기도 한다. 전을 다 먹고 기름 묻은 유산지는 세 걸음 옆 쓰레기통에 잘 버려주고, 팁이라며 $10 지폐를 올려놓고 사라지는 손님도 있다. 가게를 어떻게 차렸냐느니, 벌이가 되냐느니 하는 질문은 한국인이 처음이다. 사실 한국에서 전을 팔았다 해도 그런 질문은 무례했다.

상사를 모시고 온 부하 직원의 표정만 봐도 한상무의 인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 벌이가 안 돼 먹고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주이에게 콜라값 마저 깎으려는 놀부심보. 씹어 먹다 실수로 흘린 전 부스러기를 부하 직원이 서둘러 닦게 하는 자만. 공짜라고 하면 되는 대로 많이 챙겨두려는 저급한 근성. 제 신발까지 닦은 물티슈를 길에다 버리는 부도덕함. 쓰레기마저 스스로 버리려 하지 않는 갑질까지 모든 것이 주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위만 보지 아래는 전혀 개의치 않는 상사, 직장에서 핀셋으로 콕 집어 빼내고 싶은 동료들이 있는 직장에서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상사들은 부하 직원 월급이 제 주머니에서 나가기라도 하듯 직원을 부리고 성과만 쏙 빼먹었다. 직급이 높은 상사가 그만큼 월급이 많은 이유가 있을 텐데, 그들은 오로지 빨간펜 하나만 들고 부하 직원들이 올린 보고서의 띄어쓰기와 오탈자 점검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일하다가 난처한 순간을 만나도 해결하려고 나서기는커녕 뒷짐 지고 "내가 그렇게 일하면 안 된다고 늘 경고했을 텐데, 나 때는 말이야..." 하며 궤변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함께 흉 봐주던 선배들은 그런 상사를 견딘 대가로 받는 게 월급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승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주이는 그들을 견딘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신이 때때로 숨 막히게 싫었다. 직장 동료들의 하소연 끝에는 이 말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원래 직장이 그런 거야. 능력 있으면 나가던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 극심한 생리통 탓에 굽어지는 허리와 찌그러진 미간을 애써 감춰야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상사에게 싫은 내색을 감추는 게, 일찍 하교한 아이가 징징대며 전화할 때 두 팔 벌려 안아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싱그러운 아침공기를 분주한 출근 준비로 호흡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 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선물의 포장지를 뜯어보지 못하는 자신의 인생이 안타까웠다. 




시드니 전집에도 단골이 생겼다. 헨리는 패디스마켓에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인도 청년이다. 영업 첫날 시식용 파전을 맛본 뒤로 한국 전맛에 홀딱 반해 단골이 됐다. 점심때 먹기에 이만한 게 없다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해물이 듬뿍 든 해물파전을 사갔다. 헨리는 끓인 간장에 잘게 썬 청양고추와 양파를 절여 $1에 판매하는 비법소스를 좋아했다. 설탕을 조금 넣은 것은 비밀로 했다. 그는 가끔 주이가 가장 좋아하는 납작 복숭아나 바나나를 두어 개씩 들고 와 내밀곤 했다.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는 주이를 보면서 헨리는 점심때마다 이렇게 맛있는 전을 먹게 해 줘서 자기가 더 고맙다고 공손히 인사를 했다. 주이는 가게를 떠나는 Henry를 보며 중얼거렸다.


“참 착한 외국인이야."


리사는 UTS공대를 다니는 만학도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하고 싶은 공부를 뒤늦게 시작하게 됐다고 우쭐했다. 주문한 전이 완성되는 동안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쉼 없이 말하기를 좋아했다. 지각한 이야기, 젊은이들과 조별 과제에 참여한 이야기 등등... 리사는 주이가 모든 영어를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주이는 전을 부치면서 리사가 말한 영어를 해석하고, 영어로 그녀의 질문에 답하느라 땀이 뻘뻘 났다. 알지 못해도 알아들은 척 적당한 리액션으로 박자를 맞추기도 했다. '이것도 영어공부다’ 생각하며 최대한 경청했지만 손과 뇌가 동시에 풀가동할 때는 번번이 손을 데곤 했다.

리사는 보통 아이들 식사 반찬으로 산적을 서너 개 구입했고 남편과 먹을 김치전도 포장해 갔다. 식은 전을 프라이팬에 다시 데워도 되는지, 데울 때 어떤 기름을 써야 하는지, 냉동보관이 가능한지, 직접 만들어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계속해서 물었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봤는데 이 맛이 나지 않아 안타까웠다며 주이의 실력을 입이 마르게 칭찬해 주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찍은 사진, 오색산적을 멋지게 플레이팅 한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KOREAPAJEON#AWESOME #MYFAVORITE라고 태그 했다. 주이는 리사탓에 손을 자주 데었지만 그녀에게 따뜻하고 특별한 애정을 느꼈다.


시드니전집의 첫 단골 수지가 왔다. 수지는 퇴근 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러 가게를 점검하고 주이의 안부를 물었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를 다정하게 묻고 파전과 김치전도 사 먹었다. 주이는 돈을 안 받겠다고 사양했지만, 공짜로 먹는 전은 맛없다며 수지는 한사코 현금으로 전 값을 지불했다. 주이는 전과 소스를 포장한 쇼핑백을 수지의 손에 꼭 쥐어줬다.


"냉동실에 얼렸다가 해동해서 에어프라이기나 프라이팬에 데워 먹어도 맛있어요."

"아휴, 안 주셔도 되는데... 그럼 챙겨주신 거니 맛있게 먹을게요! 피곤한 날엔 시원한 맥주랑 먹으면 진짜 맛있더라고요. 저번엔 한인슈퍼에서 막걸리에다가 먹었는데 전이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후훗. 참, 작은아버지랑 오전에 통화했는데, 작은 어머니 수술이 잘 끝나셨다네요."

"오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네, 근데 작은 어머니가 회복하시면 한국에서 친지분들과 여행도 하고 요양도 하면서 몇 달 정도는 휴가를 보내고 싶어 하신대요. 가게는 당분간 편하게 이용하셔도 된다고 전해달래요."

"저까지 걱정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요. 호주에 오시면 꼭 찾아뵙고 감사 인사 드리고 싶어요."

"서로 좋은 건데요 뭐, 작은아버지도 가게를 놀리고 있었다면 아마 작은어머니 졸라서 호주로 빨리 돌아왔을걸요? 후훗. 언니, 저 외근 나온 거라 미팅이 있어서 얼른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또 올게요!"

"네네! 연락할게요!"


주이는 자신을 편하게 언니라 부르는 수지가 기특하고 애틋했다. 또 당분간은 이 가게에서 전을 팔아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함이 밀려왔다. 10시에 문을 연 시드니전집은 여느 시드니의 카페들처럼 3시에 문을 닫는다. 수지의 방문으로 3시가 조금 넘었지만 양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남은 재료와 반죽을 잘 덮어 냉장고에 넣었다. 그때 누군가 매대 근처로 다가와 말했다.


"잘 지냈어?"

주이의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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