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전집에서 음료수를 공짜로 먹는 법
컬이 풍성한 긴 머리에 짙은 화장, 크롭티셔츠를 입은 허리 라인이 매끈한 여자 두 명이 다가왔다. 주이가 주문받을 채비를 하는데, 그들은 주문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배너 사진을 찰칵 찍고, 배너 왼쪽으로 가서 한 번 더 찍고, 배너 오른쪽에 서서 각도를 달리 해 한 번 더 사진을 찍었다. 한참 뒤 그들은 전을 하나씩 주문했다. 파전과 김치전이 손에 쥐어진 후에도 바로 먹지 않고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막 나왔을 때 먹어야 맛있는데, 사진은 그만 찍고 좀 먹지는...'
주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손발이 척척 맞게 서로를 찍어주는 박자에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주이는 실눈을 떴다. 이쯤 되니 감이 왔다. 이들은 보통 손님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시드니전집 홍보를 위해서라도 주이는 뭔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전 맛이 어때요?"
주이는 평소의 친절에 한 술 더 얹어 물었다.
“이거 파전 진짜 맛있어요! 엄마가 해준 맛이 나요, 여기 시드니 찐맛집인데요?”
“어머, 정말요? 맛있다고 해주시니 제가 기쁘네요. 목도 마르시죠? 서비스로 음료수 한 잔씩 드리고 싶은데, 냉장고 안에서 드시고 싶은 것 골라 보세요."
“와 진짜요?? 사장님 센스, 짱이네요!”
음료값이 비싼 시드니에서 사과 주스와 포카리스웨트를 하나씩 공짜로 획득한 그녀들은 기뻐하며 서로 깔깔깔 웃고는 음료사진까지 찍었다. 그 모습을 보는 주이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아까 그들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주겠지? 생각하며 부디 잘 홍보해 주기를 바랐다. 서비스까지 챙겨 줬으니, 전집 홍보 좀 잘해달라는 사장님의 의도를 그들이 알아줬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며칠 후,
젊은 한국인 남자 네 명이 와서 해물파전 두 개와 김치전 두 개를 주문했다. 네 명 모두 자기가 주문한 전은 각자 결제했다. 네 번의 카드결제를 모두 마친 주이는 부지런히 전을 데웠다. 남자들은 아무 말 없이 주이 앞에 서서 눈치를 교환했다. 팔뚝으로 서로를 떠밀다가, 웃기도 했다. 주이는 따끈따끈한 전에 유산지를 하나씩 감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밀었다. 다들 한 입씩 베어 물더니 맛있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중 유독 눈에 장난기가 그득해 보이는 남자가 주이를 향해 호기롭게 물었다.
“사장님이시죠? 전이 진짜 맛있네요, 근데 혹시 음료수 하나씩 서비스로 주시면 안 되나요?”
“네?"
주이는 남자의 부탁에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이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순간 며칠 전 인플루언서로 보이는 여자 두 명에게 음료를 서비스로 준 일이 번쩍 떠올랐기 때문이다. 병에 든 음료값은 전 값의 절반이다. 네 명에게 음료를 하나씩 줬다가는 밑지는 장사가 될 게 뻔했다. 난처해하던 그 순간, 주이는 기지를 발휘해 1.5L 콜라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며칠 전 울월스에서 코카콜라 $1 행사를 하길래 필요할지 몰라 사 둔 것이었다. 주이는 일회용 컵을 꺼내 선심 쓰듯 콜라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남자들은 '이거 라도 어디냐.' 하는 표정으로 콜라를 받았다. 주이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그날 퇴근 후 주이는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지난번 방문한 여자들의 피드를 찾아봤다. #시드니전집이라고 검색했다. 주이가 올린 몇 개 안 되는 게시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상단에 눈에 띄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댓글이 130개쯤 달린 게시물이었다. 이 여자들이 맞았다. 그날 시드니 전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사진과 채반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진 전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와... 사진을 진짜 잘 찍네... 역시 인플루언서들은 달라.'
팔로워수가 11만 명이나 되는 계정에 시드니전집을 홍보한 게시글이 올라온 건 분명 행운이 맞다. 다만 피드의 사진을 넘겨 보던 주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피자광고에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청량한 포즈로 전을 입에 넣는 사진. 문제는 그 여자가 아니었다. 여자의 뒤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드니전집 사장의 모습이었다. 사진 찍을 준비라곤 전혀 안 된 무방비 상태의 주이. 게다가 카메라 왜곡이 심해 입은 튀어나왔고 머리는 짱구가 됐다. 이 사진을 본 사람 중 누구도 흐릿한 괴물이 된 주이에게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한 사람, 주이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에이, 자기만 잘 나온 사진을 올렸네, 쯧쯧...'
마지막 사진은 그녀가 서비스로 챙겨 준 사과주스와 포카리스웨트였다. 사진을 다 본 주이는 캡션에 있는 글과 댓글을 읽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러분 저 오늘 시드니에 도착했어요. 벌써부터 한국음식이 너무 그리운데 어쩌죠? 그래서 오늘 제일 먼저 해물 파전을 먹었답니다. 시드니에 전집이 있다는 거 놀랍지 않나요? 여기 해물파전 진짜 맛있어요. 꼭 가세요! 두 번 가세요!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사장님께 전이 맛있다고 말해 보세요. 그럼 서비스로 음료수를 주신답니다!
#시드니전집#시드니맛집#시드니여행꿀팁#지혜맛집"
'_해물파전 + 음료 세트 먹으러 꼭 가야겠는데요!'
'_저는 포카리스웨트로 먹겠어요.'
'_10명이 가면 음료수 10개 주실까요?'
'_역시 꿀팁은 지혜님이 최고!'
.....
'손님이 아무리 많이 와도 음료수를 서비스로 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텐데... 괜한 짓을 했나?'
주이는 뒤늦게 ‘음료수 준 건 비밀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센스를 발휘하지 못한 자신이 후회가 됐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전이 맛있다고 말하며 음료수를 주나 안 주나 주이의 눈치를 살피게 될까. 한국인 손님들이 찾아와 전 맛을 극찬하면 반사적으로 기쁨보다 의심이 먼저 떠오를 앞으로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답답함도 잠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주이는 1.5L 콜라를 사러 마트로 향했다.
인플루언서는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