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이버링 Mar 05. 2024

신메뉴 개발

육전은 육 불($6)입니다.



"사장님, 한국 분 맞죠?"

"아... 네."


주이가 Paul을 처음 만났던 날, 커피와 바나나브레드는 영어로 주문해 놓고 한국말로 질문하는 주이를 보며 L카페 사장 Paul은 수줍게 웃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썼고 짙은 턱수염을 정돈하지 않은, 건장한 Paul에게 주이는 타국에서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동지의식을 느꼈다. 


"커피가 진짜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바나나브레드도요. 완전 제 취향."


주이는 한 개 밖에 없는 보조개가 깊이 파이도록 깊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 척을 해 보였다.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버터 잔뜩 발라 구워주세요."

"네, 잔뜩..."


주이가 처음으로 L카페를 방문했을 때, 좁지만 아늑한 카페의 분위기와 진한 플랫화이트 맛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시티에는 아직 못 가 본 구글 평점 4.0 이상의 카페가 번호표를 뽑고 대기 중이었지만, 새로운 곳이 내키지 않을 땐 L카페가 안전했다. 매주 한 번 이상 방문하는 그녀가 카페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면 Paul은 주이의 영어 이름을 딴 "Stella Set?"라고 묻는다. 주이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면 그는 벽에서 뗀 명함크기의 스탬프 쿠폰에 도장 세 번을 꽝꽝꽝 찍어 벽에 다시 붙였다. 버터 듬뿍 바른 바나나브레드와 오트밀크로 만든 플랫화이트,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메뉴였다.


잔뜩 흐린 아침, 주이는 여느 날과 같이 Stella Set를 주문한 뒤 크림색 둥근 바테이블 스탠딩체어에 걸터앉았다. 의자와 테이블의 높이가 가슴께로 높아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행인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크고 웅장한 은행 건물 앞으로 형광색 조끼를 입은 작업자 서넛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주이는 저도 모르게 그중 한 명에 눈길이 갔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흰색 안전모를 썼고 형광색 조끼를 걸쳤다. 조각같이 앳된 얼굴은 티모시 살로메를 연상시켰다. 주이는 조금 잘생긴 외국인들은 다 배우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조끼와 안전모를 벗어던지고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떠나는 섹시한 청년의 모습을 상상하는 주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버터 잔뜩 발랐어요. 페페사야라고 호주에서만 나는 발효 버터인데, 드셔보세요."

"오, 버터 바꾸신 거예요?"

"아뇨, 저도 선물 받았는데 맛보시라고 가져와 봤어요."


Paul은 크림색 테이블 위에 커피와 바나나브레드를 내려놓고, 버터를 향해 양손을 가리켰다. 주이는 잘생긴 외국인을 보며 혼자 상상한 것을 혹시라도 들킬까 봐 Paul의 눈치를 살폈다. 면도를 하지 않아 거친 Paul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까칠하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음... 이 버터 캐러멜 향이 나는 것 같아요. 진짜 맛있는데요?"

"맛이 괜찮죠? 근데, 좀 시끄럽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 한국 같으면 한두 시간이면 끝낼 것을 이틀을 모여서 저러고 있네요. 자세히 보면 실제 일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에요. 나머지는 차량통제, 거리통제..."

"전 괜찮아요. 이런 소음마저도 좋아요. (젊은 남자도요.)"


환하게 웃는 주이의 표정에 Paul은 경직돼 있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카페 앞에서 공사를 하는 게 여간 거슬렸는지 그는 평소 바깥에 놓여있던 스텐딩테이블도 전부 안으로 들여놓은 참이었다.


"별로 큰 공사 같지도 않은데, 여럿이 달라붙어 참 요란하게 하네요."


Paul은 바깥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방금 들어온 손님을 응대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주이는 창 밖을 다시 살폈다. 일하는 사람은 한 명인데, 잘생긴 청년을 포함한 두 사람은 둘레에 표지판을 여러 개 세워두고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안전을 중시하는 호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인데 평소와 다른 Paul의 불평 섞인 말투가 거슬렸다. 손님이 떠나자 주이는 카운터에 있는 Paul을 향해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Paul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이에게 다가왔다.


"일이 좀 있었어요. 지난주에 서큘러키 근처에 2호점 내기로 했다고 말씀드렸죠?"

"네! 어때요? 준비는 잘 돼가요? 저도 시드니전집 2호점 내고 싶은데... 하하 노하우 좀.."

"불발 됐어요."

"뭐라고요? 갑자기 왜요?"

"원래 이곳 본점은 테이크어웨이(take away) 전문점으로 살리고, 2호점은 L카페 굿즈랑 원두도 판매하면서 플래그십 스토어 형태로 운영할 계획이었거든요."

"멋진 계획이네요."

"제가 계획도 세우고 굿즈 제작 업체랑 인테리어까지 완벽하게 알아봤거든요. 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투자하기로 한 형이 갑자기 계획을 틀었어요."

"네? 갑자기요?"

"형이 여기저기 투자하는 곳이 많은데, 자금 조달이 잘 안 된 모양이에요. 그런데 제 느낌에는 L카페 콘텐츠 하나만 보고 투자하기엔 무리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요즘 그것 때문에 며칠 째 잠도 잘 못 자요."

"L카페 콘텐츠가 왜요? 바리스타 1등, 제가 시드니에서 제일 좋아하는 커피인걸요?"

"휴... 죄송해요, 제가 단골고객님께 넋두리가 길었네요."

"아뇨. 정말 속상하셨겠어요..."


Paul은 깊은 근심을 드러내며 지금 막 들어온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떠났다. 그가 처음 서큘러키 근처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주이도 같은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Paul이 맛있게 볶은 원두를 호주 전역뿐 아니라 해외로 배송할 유통 체인을 구상하고, 대학시절 그의 전공을 살려 머그나 에코백, 엽서, 볼펜 등 본격적인 굿즈개발에 대한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지금도 L카페 입구에 진열된 볼펜과 머그는 시그니처 상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포장 컵에 새겨진 스탬프 디자인, 냅킨 디자인 등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재능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주이는 그가 자수성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드니전집의 미래도 장밋빛으로 물들이던 참이었다. 한참 뭔가를 생각하던 주이는 커피잔을 비우고 남은 바나나브레드 포장을 요청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말없이 바나나브레드를 포장하는 Paul을 보며 주이가 입을 뗐다. 


"있잖아요, 사장님 같은 분은 결국 잘 될 거라 믿어요. 일단 커피가 너무 맛있잖아요? 또 좋은 기회가 올 거예요. 보세요. 이미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갑자기 모든 게 잘 되는 L카페 성공스토리는 매력 없어요. 후훗."


Paul은 주이식 위로에 수줍게 웃고는 동의한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L카페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가 내린 커피맛이 이토록 근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주이는 Paul에게 한 말을 스스로에게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다.' 카페 입구에서 아까 본 청년과 눈이 마주쳐 짧게 눈인사를 나눴다. ‘이런 횡재가!’  철부지 사십 대 주이는 발그레진 볼을 만지작 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주이는 운이 좋았다. 시드니전집을 차리는 모든 과정에 '돕는 사람'이 있었다. 시드니에서 전집을 차리고 정착하는 일은 주거와 아이들 스쿨링, 비자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았다. 처음 주이가 아이들과 두 달 살기를 했을 때 둘째 딸 민서가 캠프에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짧지만 깊은 교제를 나눈 덕에 친구 유리의 부모님으로부터 공립학교 입학과정에 도움을 받았다. 또 주이는 유리네 가족이 다니는 현지 한인 교회를 다니게 됐는데 교회 성도 중 교포 한 분이 교육 때문에 1년 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서 주이는 저렴한 가격에 가구가 갖춰진 아파트를 렌트할 수 있었다. 시드니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했지만 주이는 렌트의 어려움을 체감할 새도 없이 뷰까지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가장 기막힌 우연은 시드니 전집이다.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싼 상권에서 기적처럼 전을 팔 수 있게 도와준 수지가 있다. 주이는 아직도 수지에게 인스타그램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시드니전집의 운명 같은 은인이다. 육아휴직 중에 시드니까지 동행한 언니 주연 덕분에 아슬아슬한 타국의 생활을 안전하게 이어 나갔다. 그들은 마치 시드니전집이라는 뮤지컬의 등장인물 같았다. 주인공 주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대에 오른 등장인물들. 


'여기서 얼마나 성공해야 나를 도운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까?'


혼자서 하루에 부칠 수 있는 전의 최대 개수는 많아야 150장쯤 되었다. 만들 수 있는 전을 모두 판다 해도 원가와 임대료, 렌트비와 생활비, 교육비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적자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수입이 많지 않아 지금의 생활비는 마이너스 통장에서 꼬박꼬박 나가고 있다. 전집을 차리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줄 알았고, 여기저기서 체인점을 내겠다고 하면 어쩌나 행복한 고민을 했던 주이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레시피를 전수받거나 대량 주문을 의뢰받아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상상은 현실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2개월 동안 전집을 운영하면서 제자리걸음만 한 것은 아닌지 허무함이 밀려온 것이다.


주이는 이 허무함의 의미를 잘 알았다. 위기는 곧 기회다. 달라져야 할 때라는 말이다. 뭔가를 시작해야 한다. 전집에 변화를 주고 매출을 끌어올릴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특히 Paul과 이야기를 나눈 뒤 주이의 심경은 더 빠르게 들썩였다.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이 말을 등대처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온통 이 생각으로 가득 찼다.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신메뉴 개발.


어느 날, 방과 후 공원에서 놀다 온 아이들과 주이는 마트에 들렀다.


“엄마, 오늘 저녁이 뭐야?”

“오늘 저녁? 글쎄... 너희는 뭐 먹고 싶어?”

“엄마 돈 벌기 힘드니까 싼 걸로 먹자.”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엄마 돈 많아. 너희 먹고 싶은 걸로 먹어도 돼. 라면만 빼고.”

“엄마! 그럼 내가 가격도 싸고 몸에도 좋은 거 찾아올게.”

“좋아, 우리 딸이 먹고 싶은 걸로 가져와 봐.”

“응, 엄마. 여기서 기다려줘. 오빠! 오빠도 나 따라와.”


두 아이가 장보기에 나섰다. 주이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신선한 야채와 과일, 다양한 치즈를 구경하다가 부라타 치즈가 세일 중인 것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주의 부라타 치즈는 한국의 반 값이기에 머무는 동안 많이 먹으려고 욕심을 냈다. 소중한 재고 두 팩을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다. 탄탄하고 싱싱해 보이는 상추도 담았다. 한참 뒤 사라졌던 아이들이 손에 하나씩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뭘 가져온 거야?"

“엄마, 나 육전 먹고 싶어, 엄마가 호주는 소고기랑 계란이 싸다고 했잖아? 한국 우리 집 앞 반찬가게에서 사줬던 그 육전, 엄마가 만들어주면 안 돼? 자 여기, 소고기랑 계란!”


아들 민준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계란을 들고 있었고, 민서는 당당하게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 부위를 엄마에게 내밀었다. 


"우리 딸 육전이 먹고 싶었어? 좋아. 근데 이 부위론 육전은 어려울 거야. 육전용 고기가 있는지 찾아보자."


정육코너로 다 같이 발길을 옮기는 순간, 주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쩍 하고 스쳐갔다. 장바구니에 담은 상추, 소고기, 계란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그래.... 육전, 육전이 좋겠다! 잘했어, 역시 우리 딸이 최고!”

"엄마 내가 아까 말한 거잖아. 왜 갑자기 또 말해?"

"아... 엄마도 육전이 오늘 저녁 메뉴로 너무 좋은 것 같아서. 하하..."

"오빠! 봐봐. 엄마도 육전이 엄청 좋다잖아! 역시 난 창의적이야."


민준이는 잔뜩 우쭐대는 동생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고, 민서는 허락도 없이 제 몸을 만졌다며 오빠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는 사이 주이는 육전을 하기에 적당해 보이는 부위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집에 돌아가 아이들이 씻고 저녁 준비를 하는 동안 썰기 좋게 고기를 급랭했다. 그녀는 내내 신메뉴에 대해 생각했고 정성 들여 만든 소고기 육전을 상추에 쌈 싸서 근사한 식사를 마쳤다. 


호주에서 구하기 쉽고 저렴한 것이 뭘까. 소고기와 계란이다. 호주 청정우가 저렴하고 맛도 좋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호주의 계란은 모두 Free Range Eggs(자연방사란)다. 우리나라에서 난각번호 ‘1’이나 ‘2’에 해당하는 귀한 계란인데 가격도 비싸지 않다. 탱글탱글하고 건강한 맛을 가진 호주 계란과 비교적 저렴한 호주 청정우를 이용해 육전을 만들어 팔아보면 어떨까. 주이는 호주에서 구하기 쉽고 저렴한 재료로 신메뉴 개발에 착수했다.

호주의 대형마트에서는 육전용 소고기를 구하기 어려우니 한 번씩 한국에서 먹던 삼겹살이 그리울 때마다 들르는 한인 정육점 사장인 현수를 찾았다.


"사장님, 혹시 육전용 소고기를 살 수 있을까요?"

"육전이라... 얼마나 얇게 원하시는데요?"

"소고기는 얇을수록 맛있죠!"

"하하... 뭘 좀 아시네요. 질겨서 인기 없는 홍두깨살이나 엉치살은 얼려서 얇게 잘라 육전으로 만들어먹으면 입에 살살 녹지요."

"맞아요, 한국에서도 육전용 고기는 저렴한 편인데, 호주도 그럴까요? 육전을 한번 팔아볼까 하는데..."


현수는 냉동창고에서 묵직한 소고기 덩어리를 들고 나오더니, 가격을 맞춰보라고 했다. 주이는 당최 가늠할 수 없는 고기가 가격에 "글쎄요.."라고 손사래 쳤다. 현수는 저울에 고깃덩어리를 올리더니 선심 쓰듯 말했다. 


"이게 한 2kg쯤 되는데요, 50불에 드릴게요. 육전용으로 얇게 잘라서 드리면 되죠?"

"어머, 그렇게 저렴하게요?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언제 필요하세요?"

"일단 내일부터 한 번 시작해 보려고요."

"그럼 내일 오전 9시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고기를 사러 갈 때 고향이 전라도인 현수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며 두어 번 해물파전과 김치전을 선물한 적이 있다. 현수는 그런 주이에게 보답의 의미로 파채를 서비스로 주거나 고기를 넉넉히 얹어 주었다. 몇 번의 주고받음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반가운 존재가 됐고 현수는 어느새 주이의 사업에 조력자가 될 참이었다.


다음 날 주이는 평소보다 일찍 소고기에 묻힐 밀가루를 챙겨 정육점으로 향했다. 현수는 주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준비한 소고기를 커다란 포장용기에 담아 내밀었다. 슬라이스 된 소고기는 어제 본 고깃덩어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피가 늘어나 있었다. 


"아니, 세상에... 고기 한 겹 한 겹에 이렇게 구멍을 송송송 뚫어주시다니요!"

"이렇게 해야 고기가 부드럽고 계란물도 잘 입혀요."

"구멍 뚫기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는 생각지도 못한 걸 해주시다니, 눈물 날 것 같아요."

"아이고 무슨 고기구멍 좀 뚫어준 걸 가지고 그렇게 감동을..."


주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육전이 더 맛있도록 배려한 현수의 마음은 자신이 육전을 위해 준비한 것을 넘어선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시드니전집을 밀고 나갈 때 주이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사업을 일구고 싶어 늘 긴장 상태였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일, 시드니에 전집을 차리는 일은 누구도 해본 일이 아니었기에 물어볼 곳도 없어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신메뉴에 대한 부담도 적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나 지났지만 수입은 턱없이 적었고,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과 소비자 반응에 대한 두려움. '잘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다가도 그런 미래는 상상조차도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얇디얇았던 주이의 마음에 현수의 정성이 얹어져 불안함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을 거친 이 소고기로 만든 전이 맛없을 리 없었다. 현수는 감동한 주이를 보며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제가 고기 구멍을 뚫다가 생각난 건데요, 고춧가루랑 간장에 설탕, 참기름 넣고 파절이 무쳐서 육전으로 쌈 싸 먹으면 기가 막히거든요, 저야 기계가 있지만 직접 파채 만드시려면 그것도 보통일이 아닐 거예요. 생각 있으시면 제가 파채도 저렴하게 판매할 테니,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육전 도전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성공하면 다 사장님 덕입니다."


평소보다 일찍 가게에 나온 주이는 채에 곱게 거른 밀가루를 얇고 넓적한 육전용 소고기에 살짝 묻혔다. 후추와 소금과 다진 마늘로 간을 한 계란물에 고기를 풍덩 담근 후 달궈진 팬에 올렸다. 전 8장을 동시에 부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주이는 간을 보려고 갓 익은 따끈한 육전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고소한 마늘향과 함께 부드러운 소고기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구멍이 송송 뚫린 소고기는 며칠 전 집에서 해 먹었던 육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식감이 좋았다. 씹다 보니 고춧가루와 참기름으로 버무린 칼칼한 파채가 생각났다. 다음에 현수를 만나러 갈 때는 파채도 부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왜 육전 만들 생각을 이제야 했지?'


맛에 취해 혼자 피식 웃던 주이는 일단 손님들에게 시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첫날 육전을 맛본 손님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소고기를 계란에 부쳐 먹을 수 있다니, 맛본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이 음식의 이름을 궁금해했다. 장난기가 발동해 '6 jeon'이라고 이름을 지을까 하다가 외국인들이 'Sixjeon'이라고 발음하면 안 될 것 같아 'Beef-Jeon'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육전 1장은 $6을 받기로 했다. 육전의 '육'이라는 글자가 숫자 6을 발음하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육전을 팔기 시작하면서 주이의 손은 더 바빠졌고, 시드니 전집의 일매출은 30%가량 늘었다. 가격은 김치전 보다 저렴했지만 한 개만 먹는 손님보다 두 개 이상 사 먹는 손님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신메뉴로 발탁된 육전은 예상치 못한 성공보증수표가 됐다.


주이는 육전을 판매한 지 1주일쯤 지나 현수의 도움을 받아 파채 샐러드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파채는 너무 절여지면 풀이 죽어 맛이 없으니 요청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양념만 얹어 $2에 판매했다. 단골 헨리는 매운 걸 좋아한다며 양념파채와 육전을 곁들여 먹으니 아주 맛있다고 엄지 척을 들었다. 리사도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 1위 자리를 육전에게 내놓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제법 큰 크기의 전을 한 입에 먹으며, 10개씩 포장해 가는 손님도 있었다. 육전은 쉽고 빠르게 시드니전집을 점령했다. 물론 김치전과 해물파전을 찾는 손님도 많았기에 주이의 손은 전보다 더 바빠졌다. 이 기세를 몰아 시드니 전집의 매출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사업을 성공가도에 올려놓기 위한 전략을 짰다. 그것은 바로...


이전 13화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