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이버링 Oct 11. 2024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법

최주연의 꿈

주연은 눈을 뜨자마자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시드니의 하늘을 쳐다보며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몸을 일으켜 침대 바깥으로 나왔다. 무서운 속도로 새벽을 밀어내는 아침햇살을 쫓아 발코니로 나갔다. 부쩍 고민이 많아진 요즘, 잠들기 직전까지 했던 생각이 눈을 뜨자마자 주연을 휘감았다.


교사인 주연이 육아휴직을 하고 동생을 따라 시드니에 온 지도 어느덧 두 달이 흘렀다. 처음 한 달은 한국에 두고 온 남편과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한 학교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시드니 전집으로 출근하는 동생이 낯설었다. 주연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마다 하고 시드니까지 와서 고생하는 동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주이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가는 외계인 취급을 받을 게 뻔해 입단속을 해 왔다.

그런데 시드니에 온 지 두 달쯤 지나자 주연의 심경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들 제이를 학교에 보낸 뒤 주이가 시드니전집에 출근을 하면 주연은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낯선 나라에서 주어진 의무도 책임도 없는 상태. 처음 1-2주는 시드니전집의 허드렛일을 거들기 위해 주이를 따라 출근했지만 주이는 한사코 그런 주연을 매정하게 몰아냈다.


"언니, 언니 이러려고 여기 온 거 아니잖아. 혼자만의 시간을 듬뿍, 아니 넘치게 가져봐. 그렇게 하라고 내가 언니 데리고 온 거야. 시드니 전집은 혼자도 충분히 돌볼 수 있어. 내가 다 생각이 있다니깐?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할게. 대학 졸업하고 임용고시 공부하고 교사 돼서 결혼하고 애 낳고... 한 번도 언니만을 위한 시간, 가져본 적 없지? 제발 부탁인데, 이제 시드니전집에 따라오지 말아 줘, 응? 아, 그리고 내가 숙제를 하나 내줄게. 언니 자신과 대화를 좀 나눠봐. 언니 스스로에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를 물어보고 그 답을 꼭 찾아와. 알겠지?"


언니지만 동생보다 결혼과 출산이 늦은 주연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주이를 찾았다. 주연의 고민을 들은 주이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서 언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언니 스스로에게 물어봐."


 답을 모르니까 동생에게 묻는 건데, 주이는 스스로와 끊임없이 문답을 주고받다 보면 나를 잘 아는 내가 해답을 주는 경지가 찾아온다고 했다. 주연은 일단 속는 셈 치고 혼자 시드니를 활보했다. 하버브리지를 혼자 건넜고, Toby's Estate 본점 창가에 앉아 혼자 브런치를 먹었다. 이 동네 저 동네 도서관을 전전하며 잡지와 한국도서들을 실컷 보기도 했다. 낯선 길을 걸으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 주이가 시켜서 한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주연에게 외로움 같은 감정이 찾아왔는데, 주이는 그 감정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함이라고 말했다. 고독한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찾아 창의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며 희망을 가져보라고 했다. 고독함. 주연에게 고독이 찾아오자 심연 속 또 다른 주연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심연의 자아는 열등감과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말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그녀의 마음은 여기저기 실밥이 뜯긴 스웨터처럼 심란해졌다.



고요한 부엌에서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렸다. 아이들이 먹다 남은 쿠키와 팩음료수가 놓인 아일랜드 식탁에 머그잔을 내려놨다. '딱'소리가 침묵을 깼다. 전기포트의 물 끓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주연은 커피 원액이 담긴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후' 불며 다시 발코니로 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뷰 하나는 최고라던 동생의 마음을 알겠다. 사방이 탁 트인 시드니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문득 주연은 집세에 뷰값이 포함된 게 아닐까, 생각하며 그렇다면 이 뷰에 얼마의 가격을 매길 수 있을지를 계산해 봤다.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돌리니 주이가 나갈 채비를 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언니, 일찍 일어났네?"

"응, 잠이 깼어. 내 소리 듣고 깬 거야?"

"덕분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좋은데?"

"아이코, 더 잘 텐데... 미안하다."

"아니야. 그래봤자 일 이십 분 더 자는 거지."

"산책 가려고?"

"응, 언니도 갈래?"

"그럴까? 오랜만에 같이 산책하자."


주연은 아직 한 모금 밖에 안 마신 커피를 작은 텀블러에 급히 옮겨 담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주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 하루 언니의 계획은 뭐야?"

"응, 오늘은 주립미술관에 한국어 도슨트 신청한 거 가볼 거야."

"저번에 가지 않았어?"

"이번엔 칸딘스키전 도슨트야, 칸딘스키가 한국인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아서 유료전에도 한국어 도슨트를 해준대."

"진짜? 나도 가보고 싶다. 그거 평일만 하는 거야?"

"오늘부터 한 달간 수요일 11시에 한대. 넌 시간 빼기 어렵지?"

"에휴, 여기 와서도 일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네. 후훗."


숨찬 걸음을 내딛는 주이는 말로는 불평이지만 미소를 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주연은 그 미소가 신기했는지 기특한 눈으로 주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깟 한국어 도슨트쯤은 못 봐도 내 동생은 이미 바라 마지않던 시드니 전집을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삶이 충만한 자의 미소에 예술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주이야. 나, 숙제는 끝냈어."

"오, 진짜?"

"나 자신과 대화 나누는 법? 그거 터득한 것 같아."

"대박, 그걸 터득했단 말이야? 음... 역시, 딱 6주가 걸리네. 내가 말했지? 배거본딩은 6주 이상이라고. 그래서, 무슨 질문을 주고받았어?"

"일단 내가 뭘 할 때 즐거운지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봤어."

"그랬더니? 또 다른 주연이 뭐래?"

"처음에는 재밌는 영화를 볼 때? 커피 마실 때? 친구랑 수다 떨 때? 뭐 이 정도로만 답을 하더라고."

"맞아, 나도 그랬어. 나는 거기에 '돈 쓸 때' 하나 추가."

"난 돈 쓰는 건 별로야. 벌기만 했지 쓸 줄을 모르는 것 같아. 주식도 깡통이 됐잖아."

"워워... 그런 우울한 생각은 말고. 그래서, 나중엔 좀 괜찮은 답이 나왔어?"

"QVB 1층에 스티치 커피 알지? 거기서 파는 원두가 맛도 있지만 포장이 참 귀엽고 앙증맞아. 한국에 있는 소진이한테 선물하면 참 기뻐하겠다, 이런 생각?"

"언니 친구 소진언니? 소진 언니가 기뻐할 생각에 언니가 행복했어?"

“행복했다기보다는... 내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올랐어. 누군가 좋아할 만한 뭔가를 발견하면 나만이 줄 수 있는 걸로 상대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생각. 스티치 커피는 호주에만 있으니까 잔뜩 사가서 여기저기 선물하고 싶더라."

"그건 언니가 이타적이라 그래. 맨날 좋은 거 보면 내 생각난다고 나한테도 보내고 그랬잖아."

"그런가? 난 근데 선물하는 게 좋아. 남들 고민 들어주는 것도 좋고."

"언니는 기여욕구도 강해. 어쩌면 그게 언니의 소명일지도 모르겠다."

"기여욕구? 그런 욕구도 있니?"

"예전에 책에서 봤는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됐다는 뿌듯함이 유독 큰 사람들이 있대. 그런 사람들을 기여욕구가 강하다고 한대."

"나 같은 사람이네. 나는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엄청 기분이 좋아. 정작 내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쯧쯧..."

"그럼 언니는 교사니까 직업이 딱이네. 학생들을 잘 가르치면 그들이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인재로..."

"야야! 그거 아니야."


주연은 두 손을 엑스자로 만들어 주이의 말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게 아니고,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 그게 어디서 기인한 건가 계속 마음속 주연에게 물어봤어. ‘너는 왜 커피를 남에게 선물하고 싶어?’ 그랬더니, 또 다른 주연이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내가 ‘너는 왜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물었더니 ‘남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기뻐.’ 하더라고. ‘너는 남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물었더니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줄 수 있어.‘하더라. ’네가 그걸 잘하는 사람이야?‘ 물었더니 ’응.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필요한 조언을 하는데 재주가 좀 있어.’라고 내가 대답하더라고. "

“혼자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네 진짜. 대단한데?"

“그래서 내가 떠오른 게 뭐였게? 바로 상담이야. 예전에 교사 연수로 심리학을 좀 들었는데. 그때 강한 울림이 있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고, 들어주면서 그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행복? 내가 진짜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상담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됐지."

"맞아. 언니가 항상 내 고민도 잘 들어주고 내 마음도 잘 읽어주긴 하지. 적절한 솔루션도 제시하고."


주연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은 주이는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 근데 난 솔직히 남편이나 엄마 상담은 좀 피곤해. 그리고 정작 내 앞가림 못하는 거... 흐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거랑 같은 거지."

"그래서인지 상담이라는 분야에 막연한 관심은 있지만 늘 자신이 없어. 뭔가 헛물켜는 느낌이랄까?"


주연은 고개를 젓더니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느새 둘은 하이트파크의 분수대까지 걸었다. 세인트메리즈 성당이 보이는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새소리가 교향곡처럼 들리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주연은 가지고 나온 텀블러 속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되니까 머리가 좀 복잡해졌어."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 뭐, 이런 거지?"

"아니?"

“그럼 혹시... 이거?”


주이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말했다.

“그래, 그거야. 일단 돈이 안 되잖아."

“상담 잘해서 돈 벌긴 힘들다는 말이지?”

"제대로 상담하려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해야 할 게 많으니까 못하는 거야. 그리고 공부를 한다고 치자. 내가 그걸로 성공하긴 힘들지 않을까?”

“하고는 싶은데 못 한다... 안 하는 게 아니고? 그리고, 성공하려고 공부하는 거야? 좋아하는 일 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응. 내가 지금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직장 다니면서 대학원까지 다니는 건 무모한 짓이지. 생각만 해도 정신없다."

"대학원?"

"응. 상담 자격증을 따려면 대학원 가야 하거든. 그래서 대학원도 알아본 적 있었어. 근데 학비도 비싸고, 과제도 어마어마하대. 일하고 육아하는 지금의 삶에선 꿈도 못 꿀 일이야. 마음을 먹기도 전부터 포기했었는데, 네가 내준 숙제를 하다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어."

"자, 자, 그럼 이제 두 번째 숙제를 하면 되겠네."

"두 번째 숙제도 있어?"

"응.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늘부터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를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거지."

"돈이랑 시간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찾으라는 거네?"

"글쎄, 그건 수단이잖아? 언니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방법이 꼭 대학원 가는 거 하나밖에 없을까? 불가능한 것만 들여다보지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대학원 가는 거 밖엔 안 떠올라."

"언니가 진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고 싶다면, 그 일이 진짜 즐겁다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라... 넌? 그래서 너는, 네가 즐거운 일을 하는 방법을 찾았어?"


주연은 얼토당토않은 숙제를 내는 주이에게 원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주이는 그런 언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더니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은 언니를 내려다보며 큰 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모르겠어? 그걸 내가 찾았으니까 지금 여기 있는 거 아니야. 세상엔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어. 일어나, 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