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넓은 세상 중 하필 여기서 너를
“해물파전 두 개랑 오징어 김치전 두 개 주세요.”
“네, 포장용기에 담아드릴까요? 아니면 바로 드실 건가요?”
“아... 잠시만요, 자기야! 우리 이거 숙소 가서 먹을까? 지금 배고프면 먹으면서 갈까?”
시연은 30m쯤 후방에 캥거루모자를 쓴 아들과 바람개비로 놀아주는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유난히 맑고 따사로운 시드니의 햇살 아래 부자의 모습이 눈부시다. 시연은 숙소에 가서 먹자는 남편의 손짓에 끄덕하고는 포장용기에 담아달라고 했다.
“오늘 굉장히 덥네요. 레모네이드도 한 병 주세요.”
시연은 둥근 챙이 있는 모자로 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네, 시드니는 요즘 여름에 춥기도 하고 겨울에 덥기도 해요. 이상기후로 너무 건조해서 산불도 자주 나는 모양이더라고요.”
“산불 나는 것 저도 뉴스에서 봤어요. 캥거루들이 산불피해 달아나는 것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코알라도 많이 죽었대요. 코알라는 잠자느라 산불 난 줄도 모르고 죽었다는데 얼마나 안타깝던지..."
산불을 피하지 못해 죽어간 캥거루와 코알라를 안타까워하는 표정과 말투에 주이도 시연과 같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주이는 전을 부치면서 곁눈질로 눈앞에 매력적인 손님을 스캔했다. 군살 없이 단정한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 주이가 가장 부러워하는 넓고 둥근 이마, 그 옆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긴 머리. 희고 가녀린 손목에는 주이가 늘 탐하던 네 잎클로버 모양의 반클리프 레드 팔찌가 걸려있다. 기름과 반죽이 튄 자신의 팔목이 괜히 부끄러워 손목을 쓸어내렸다.
주이는 한소끔 식힌 전과 레모네이드를 종이봉투에 담아 시연에게 내밀었다.
“38불 50센트입니다.”
“아, 맞다. 잠시만요. 자기야! 지갑 좀 부탁해.“
아이와 놀아주느라 바쁜 남편에게 시연은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남자는 꾸물거리다 아이 손을 붙잡고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걸어왔다. 굳이 이 더운 날씨에 그늘이 많은 전집 근처에서 놀지 않고 저만치 먼 햇볕아래에서 아이와 놀아주는 남자를 주이는 희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전집과 가까워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주이는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시연은 서둘러 남편에게 카드를 받아 주이에게 건넸다. 주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고 아무 말 없이 결재 후 카드와 영수증을 시연에게 전달했다. 시연과 그녀의 남편, 아이는 가게를 떠났다.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좀 됐어.”
주이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매대의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앳된 목소리로 나지막이 안부를 묻는 석준은 예전에도 즐겨 입던 깨끗하고 도톰한 흰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는 주이가 자신을 쳐다볼 때까지 허수아비처럼 서 있었다. 주이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어제 모른 척하고 갔으면 그만이지 어쩌자고 다시 왔을까. 차라리 대학동기라고 능청스럽게 아는 척했으면 덜 어색했을까 싶었다. 그녀는 일부러 평소보다 바쁘게 매장을 정리했고 더 이상 치울 게 없어졌을 때 쓰레기봉투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거나 좀 버려주던가.”
주이는 석준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쓰레기봉투를 내밀었다. 흡사 싸운 부부가 화해할 때 마지못해 꺼내는 말처럼 억지스러웠다. 석준은 피식 웃고는 순순히 쓰레기봉투를 받아 근처를 살피더니 금세 버리고 왔다. 쓰레기까지 버려준 사람을 계속 나 몰라라 할 순 없어 주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왜 왔어?”
“그냥, 너 잘 지내는 거 같아 보여서.”
"응, 보다시피 난 늘 잘 지내. 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기어코 하는 건 여전하구나. 이것도 네가 해보고 싶었던 거지?”
석준은 안부를 묻는 주이의 질문에는 답을 생략하고 시드니 전집을 눈으로 가리키며 지그시 웃었다. 그는 주이의 성격은 물론 그녀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주이는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그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석준은 시험기간이면 새벽부터 등교해 도서관 자리를 맞추고 따뜻한 17차와 함께 주이를 기다렸다. 페퍼톤스와 에피톤프로젝트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했고, 에쿠니가오리와 츠지히토나리의 따끈따끈한 신간을 선물했다. 용돈을 받으면 쫄면과 돈가스를 함께 파는 식당에 데려갔고, 통화할 때 절대 먼저 끊는 법이 없었다. 치킨을 먹을 때 입가에 묻은 양념을 그녀보다 먼저 닦아 주었고, 생리주기를 챙겨 그녀의 컨디션을 살폈다. 그녀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랐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안 돼 석준에게 잔뜩 서운했던 주이가 홧김에 집으로 가 버렸을 때 석준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주이는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석준이 당연히 자기를 따라와 붙잡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그는 주이를 붙잡지 않았다. 이후에도 주이는 연락이 온다면 어떻게 그를 응징할지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결국 그날이 둘의 마지막이었다.
“호주는 무슨 일이야?”
“응, 출장 겸 가족여행 왔어. 오늘 밤비행기로 한국 갈 거야. QVB 지나가다가 이거 너 줄려고 샀어.”
석준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민트색 쇼핑백을 주이 앞으로 쑤욱 내밀며 말했다.
"너 초콜릿 좋아하잖아."
주이는 별안간 말문이 턱 막히며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빠른 속도로 눈물이 안구를 채웠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 석준이 눈치채지 못하게 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녀의 눈에 오늘 입은 티셔츠가 들어왔다. 하고 많은 옷 중에 오늘 제일 후줄근 한 티셔츠를 입었다. 소매와 가슴에 튄 반죽과 기름자국을 석준도 봤을 것이다. 마침 립스틱도 안 발랐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주이가 우는 일은 계획에 없다. 울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띠리리리링....."
그 순간 기적적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주이는 매대 위 휴대폰을 서둘러 낚아채 석준을 등지고 전화를 받았다. 주연이 마트에 왔는데 필요한 게 없는지 묻는 전화였다. 주이는 통화를 핑계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주연에게 용건을 말하고 통화는 금세 끝났지만 주연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주이가 다시 매대로 돌아왔을 때 석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주이는 가게 문을 닫고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석준과 나란히 걷는 걸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걸었다.
“호주 카페는 대부분 3시면 문을 닫아, 근데 우리가 가는 곳은 7시까지 문을 여는 근처 유일한 카페야.”
“진짜? 카페가 문을 그렇게 일찍 닫아? 이 사람들이 배가 불렀고만, 우리 주이, 호주 사람 다 됐네.”
석준은 억지스러운 농담을 꺼내며 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말았다. 과거의 주이는 기특해하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짓을 아주 좋아했다. 주이는 안 본 척 고개를 돌렸고 가방 속 지갑을 서둘러 꺼냈다. 보이지 않아도 주이는 자신을 빤히 보는 석준의 시선을 느꼈다.
로이스 카페에서 주이는 플랫화이트를, 석준은 사과주스를 주문했다. 주이는 값비싼 초콜릿까지 받은 마당에 커피까지 얻어 마시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 자기가 사겠다고 우겼지만 결국 석준이 이겼다. 두 사람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더운 날씨지만 나무그늘 아래에서 주이는 한기를 느꼈다. 닭살이 올라와 팔뚝을 손바닥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너 전 잘 부치더라. 맛있었어.”
“맛있지? 따뜻할 때 먹으면 더 맛있는데.”
“응. 식어도 맛있었어.”
석준은 직원이 가져다준 사과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기도 전에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빨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이 말 꼭 하고 싶었어, 사는 동안 자주 이런 생각을 했어. 그때부터 쭉 우리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분명 나는 더 많이 행복하고 더 많이 웃었을 것 같아. 난 원래 후회 같은 것 잘 안 하는 사람인데, 그때 너를 붙잡지 않은 것, 그거 하나는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아. 만약 누군가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꼭 다시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주이는 늘 궁금했다. 석준이 자기를 떠난 이유를. 눈앞에 그가 버젓이 있어도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진짜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주이였다. 자신이 싫어진 것인지,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분신 같았던 자신을 떠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종종 꿈에 나타난 그에게 물어도 그는 답이 없었다. 만약 지금 그 이유를 듣고 나면 "그랬구나..." 하며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석준을 마음에 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입술을 떼기 어려웠다. 석준을 떠나보내기 위해 보낸 힘들었던 시간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주이는 초등학생 시절 인기가 좋았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TV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주인공 이휘재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래, 결심했어!"라는 대사와 함께 극적으로 다른 두 가지 인생을 사는 것을 보여준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 주이가 만약 그때 먼저 그에게 연락해서 "내가 잘못했어. 나한테 화난 거야?"라고 눈물 섞인 애교를 부리며 그를 졸랐다면 달라졌을까. 주이는 잠시 눈을 감고 과거로 돌아가 눈앞의 석준과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보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아무 미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주이의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주이를 지지하는 남편, 가족들의 얼굴만 떠올랐다.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재구성해보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주이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감은 눈을 지그시 떠 그를 쳐다봤다.
“그러게, 후회할 일은 왜 했냐?”
건조하게 툭 내뱉은 주이의 말에 얼음같이 긴장한 석준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그는 주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주이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십 대의 말투에 흠칫 놀랐다. 부끄럼이 많은 석준이 어렵게 꺼낸 마음을, 오래 떠안고 살았을 무거운 돌덩이를 홀가분하게 덜어주고 싶었다.
“너다운 대답이다. 난 이 말하면서 엄청 떨렸는데.”
“애아빠가 그렇게 소심해서 아빠노릇이나 하겠니?”
한심한 막냇동생 나무라듯 말하는 주이를 본 석준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주이는 그런 석준이 가엾고 안쓰러웠다.
‘내가 널 알지. 이 말하려고 얼마나 준비했을지, 쯧쯧...’
석준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입을 오물거리다 말고 주스를 홀짝였다. 주이는 오래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근데, 김석준. 넌 꼭 잘 살아야 돼. 그래야 내 역사가 부끄럽지 않거든. 난 꽤 괜찮은 사람과 만났던 과거로 널 기억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지? 꼭이야."
다정하게 이기적인 말이었다. 석준의 얼굴은 갑자기 차가워졌지만 그는 고개를 떨구고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이는 석준이 준 초콜릿을 슬쩍 살펴보다가 "이거 엄청 비쌀 텐데, 고맙다. 잘 먹을게."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이번에도 석준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이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일어나 주이를 붙잡지 않았다. 이별했던 과거의 그날 밤처럼.
주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발코니로 나와 민트색 쇼핑백 안에 든 초콜릿을 꺼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VB맥주의 뚜껑을 따 초콜릿과 함께 한 모금 들이켰다. 찬 맥주에도 잘 녹는 생초콜릿에서 이상하게 쓴 맛이 났다. 주이는 한기가 느껴져 양쪽 팔뚝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밤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반구의 하늘은 남십자성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주이와 석준이 헤어진 지 17년이 흘렀다. 이후 그의 소식은 대학 동기로부터 간간히 들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다. 주이가 시드니에 전집을 하겠다고 삶의 평행선을 구부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두 사람은 영원히 평행한 채로 만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주이는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둘의 새끼손가락에 묶인 빨간 실이 오늘 여기로 그를 불러들인 건 아닐까. 넓고 넓은 지구에서, 하필 시드니 전집에서 석준을 만날 확률을 계산이나 할 수 있을까?
“초콜릿이네? 맛있겠다, 언니 먹어도 돼?”
제이를 재우고 담요를 챙겨 발코니로 나온 주연이 초콜릿을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주이는 "언니야, 놀라지 마!"로 시작해 초콜릿의 출처를 영화 줄거리 말하듯 늘어놓았다. 난처한 상황에 전화 걸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주연은 한참 동안 놀라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화 같은 우연이라고, 인생이 참 아이러니 하다고 말했다. 주연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주이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근데 넌 좋겠다. 나중에 애들이 연애하다가 헤어져서 힘들어하면 해줄 이야기가 생겼잖아.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별 게 다 재산이 되더라. 엄마도 그런 적 있었어...로 시작하는 위로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아니? 그건 그렇고, 이 초콜릿 되게 비싸 보이는데? 엄청 맛있잖아? 언니가 더 먹어도 돼?”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그렇게 맛있으면 언니 다 먹어.”
주이는 초콜릿 상자를 주연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지? 걔를 여기서 볼 줄이야.”
사르르 올라오는 취기가 주이의 헛헛한 마음을 채웠다. 그때까지도 주이는 알지 못했다. 이보다 더 믿기지 않는 우연이 주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