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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Feb 23. 2024

초심자의 행운

행운은 사람과 함께 온다.

커다란 스텐 보울에 잘게 자른 오징어, 한국에서 보내온 묵은 김치, 기름을 뺀 캔참치를 넣고 튀김가루 한 봉지를 탈탈 털어 넣는다. 장사는 시드니에서 하지만 튀김가루는 반드시 쌀가루가 첨가된 우리나라 오뚜기 제품을 쓰기로 했다. 주이는 그게 한국음식을 만드는 한국인의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종이컵만 한 크기의 계량컵으로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뒤섞었다. 너무 묽어도 안 되고, 너무 되직해도 안 된다. 뒤섞는 나무 스푼을 쥔 손보다 어깨에 힘이 더 많이 들어갔다. 스푼이 반죽을 이기는 힘으로 대략적인 반죽의 점도를 가늠했다. 원래 맛집엔 레시피가 없는 법.


 주이는 K마트에서 산 커다란 전기팬에 식용유를 둘렀다. 반죽을 시작할 때 미리 예열을 해 놓은 덕에 식용유는 팬 위에서 또르르 구르며 가볍고 빠르게 팬을 코팅했다. 일관된 양과 크기를 위해 반죽은 국자를 꽉 채워 한 번 퍼올렸다. 팬 위에 올려둔 8개의 원형틀 안에 차례대로 붓는다. 반죽방울이 팝콘 튀기듯 부풀어 올랐다. 원형틀에 반죽이 묻어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익었을 때 원형틀을 팬 밖으로 꺼내 차례대로 전을 뒤집는다. 8개의 동그란 김치전이 나란히 줄을 섰다. 주이는 매번 어릴 적 즐겨하던 '붕어빵 타이쿤 게임'이 떠올랐다. 기름을 뿌리고 순서대로 반죽을 붓고 뒤집고 또 뒤집고 꺼내는 일이 타이쿤 게임처럼 아무리 많이 해도 질리지 않았다. 한 판에 8개의 전, 다음 한 판의 김치전을 시작하기 앞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아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날을 회상했다.



"방법이라뇨?"


주이는 먼저 본 세 개의 매물 말고 또 다른 매물을 숨겨 놓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지를 쳐다봤다.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지체하지 않고 대답하는 주이의 마음속은 불안과 기대로 가득 찼다. 누군가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물었다는 건 상대의 말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예고다. 이런 예고를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적군 아니면 아군.


"음... 제가 이제까지 느낀 바로는 주이 씨가 기대하는 비용과 현재 시드니 부동산 시세의 갭(gap)이 너무 커요. 이민을 생각하시는 것 같지도 않으니 비자라던가 체류에 대한 계획도 아직 묘연하고요. 사업 경험도 많지는 않으신 것 같고요..."


주이는 정돈하지 않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서둘러 답하지 않았다. 끝까지 듣고 싶었다. 수지는 분명히 주이에게 희망회로를 돌리기 위해 밑밥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잠시 시계를 살핀 뒤 맥주 한 모금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제 작은 아버지가 시드니에서 한식당을 운영하세요. 그런데 작은 어머니가 최근 급격히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지난주에 한국에 가셨어요. 아시다시피 시드니는 의료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잖아요. 병원 시설이나 서비스는 한국병원이 최고라면서, 하루라도 빨리 치료받자고 급하게 출국하셨어요. 음... 그래서 운영하시던 한식당은 기약 없이 문을 닫은 상태고요. 건강이 좋아지면 금방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지만, 저희 아버지 말씀으로는 치료가 간단치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수지는 갈증을 느꼈는지 맥주 한 잔을 모두 비웠다. 한 잔 더 하겠냐는 주이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은 수지는 웨이터를 불러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주이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보이는 수지가 아군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작은 아버지는 30대에 작은 어머니와 호주에서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한 번도 쉰 적이 없으세요. 원래는 시티에서 좀 떨어진 고든이라는 동네에서 카페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그곳에서 장사가 꽤 잘 돼 카페를 정리하고 시티에 한식당을 차리셨죠. 2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못 가고 일만 하시더니, 결국 작은 어머니 건강신호에 불이 들어온 거죠. 이쯤 되면 일을 멈출 만도 한데, 중요한 건 작은 아버지는 식당을 정리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시다는 거예요."

"직접 일군 사업체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 분이군요."

"맞아요. 솔직히 그 식당은 매물로 내놓으면 진짜 좋은 가격에 팔릴 만큼 입지가 좋거든요. 제가 이제 벌 만큼 버셨으니 좀 편하게 지내시라고 가게를 매도하시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제안드렸는데 요지부동이세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지금 비어있는 작은 아버지의 한식당에서 전을 팔아볼 생각은 없으세요?"


주이는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마음속 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들뜬 세포들이 일제히 '난 이제 살았다.' 합창을 외치는 듯했다. 수지는 주이의 심장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걸 충분히 안다는 듯이.


“물론 작은아버지가 허락하셔야겠지만 가게를 비워두는 것보단 잘 이용해서 임대료를 조금이라도 받는 게 작은아버지께도 이득일 테니 그건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작은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거기서 전을 팔면서 천천히 좋은 매물을 알아보시면 되죠. 게다가 업종이 한식당이니 별도 사업자 등록도 필요 없을 것 같고, 포장판매만 하신다면 가게 공간을 많이 차지할 필요도 없겠죠? 세금이랑 임대료 같은 제반사항들만 주이 씨가 처음에 고려했던 예산 수준으로 검토해 볼게요. 위치가 워낙 좋아서 전은 엄청 잘 팔릴 걸요?"


"위치가 어딘데요?"

“패디스마켓 근처예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드니의 중심가 패디스마켓. 여행자라면 빠짐없이 이곳에 들러 쇼핑을 한다. 차이나타운을 끼고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 이곳은 매물이 워낙 비싸 주이가 고려한 적도 없는, 핵심상권이었다. 수지는 주이에게 운이 바뀌고 있는 징조가 보인다는 말을 했다. 과연 수지는 언제부터 이 카드를 들고 있었던 것일까? 


수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주이는 시드니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패디스마켓 앞에서 극적으로 전집을 차릴 수 있었다. 이미 마련된 공간이었기에 준비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엉덩이만 먼저 드는 주이의 인생에 수지는 행운을 들고 나타났다. 주이는 수지를 레버리지로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초심자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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