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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지니 Sep 10. 2023

시작이 어렵지

오일파스텔

조울증. 글을 쓰면서도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이번에는 얼떨결에 이겨버렸다.   

   

처음 병이 발병하고 나서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힘들어서 안 좋아져도 회복해 내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나아질수록 스스로도, 가족들도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하게 됐다. 조금씩이지만 해오던 이직 준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쌓이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결정적인 성과가 없으니 조언들만 늘어났다. 사공이 너무 많아서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랄까. 점점 부담이 쌓이면서 최근 2주 정도를 괴로워했다. 하루 종일 울고, 회사에서도 일에 집중이 안되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병원을 가게 됐다. 그런데 웬걸? 선생님과의 상담 후에 의외의 진단 결과를 받았다. 지금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찌그러져’ 있는 상태지만 증상도 없고, 재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약 없이도 잘 버텨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약 없이, 병원의 도움 없이 좀 더 버텨보자는 진단을 해주셨다. 얘기를 하면서도 훌쩍거렸는데 오히려 좋아졌다니, 얼떨떨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병에서 벗어난 기분. 이게 또 얼마나 갈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긴 했지만 그래도 해방감과 안도감에 힘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됐다. 진료를 받으러 간 건데 진로 상담을 받은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내 얘기를 말없이 한참을 듣던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계획이 세워지고, 잘 이뤄나가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이라도 ‘잘 모르기 때문에’ 쉽게 얘기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가면 될 것 같다 하셨다. 그리고 또 힘들 때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말로 마무리하셨다. 너무 따뜻하고 든든했다.     


울컥한 마음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왔을 땐 세상이 약간 이질감이 들었다.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너무 달랐다.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괴로워서 느껴지지도 않던 바람이 느껴졌다. 숨쉬기 힘들 만큼 무덥던 날도 그늘에 있으면 제법 선선해졌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지만, 기분은 확실히 달라졌다. 


사실 선생님의 진단 없이, 약 없이 병원을 가지 않은지 한 달 정도가 된 시점이어서 다시 병원을 가는 것이 더 두렵기도 했다. 이럴 때 보면 나는 참 모순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의로 단약을 했다. 비록 얼마 전만 해도 전문가와 상의 없이 임의로 단약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말이다. 나는 또 잊었다. 이래서 ‘절대’라는 말을 싫어하는데 말이다.      


말이나 글을 쓰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내뱉고 나면 거기에 묶여버리기 때문이다. 증상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그 기간이 몇 달씩 늘어지다 보면 약을 안 먹는 날이 잦아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약을 안 먹고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좋아진 것 같다고 병원을 끊지는 않았기에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점차 약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2개였던 약이 1개가 되고, 더 낮은 용량의 약으로 바꾸게 됐다. 약을 바로 끊어버리면 다시 확 안 좋아질 수 있기 때문에 잘 챙겨 먹으라고 하셨지만, 안 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니 챙겨 먹기가 싫어졌다.      


그렇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잊어버렸다며 약을 먹지 않거나 한동안 병원을 가지 않고 버티는 날이 늘었다. 실제로 회사에서 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기도 했고, 휴가철이라고 이리저리 놀러 다니기도 했다. 단약을 하고 괜찮은 날들이 늘어나면서 조금 힘들어졌을 때 다시 병원을 가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커졌다. 패배감도 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만 하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으니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과 생각들에 가득 차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줄이고 싶어졌다.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맞는 스트레스 해소법과 취향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걷기에서 시작된 운동은 달리기로 이어졌고, 마라톤에도 나가게 되었다. 2km도 겨우 뛰던 나는 5km 마라톤을 완주를 하고, 10km를 1시간 정도에 달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운동에 재미를 붙이면서 필라테스로 4개월 만에 20kg를 감량하기도 했다. 사실 현재는 헬스를 하고 PT를 받기 시작했다. 운동도 확실히 본인에게 맞는 게 있다는 생각이다. 아직 회차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끝나고 나서 뿌듯함이나 이어갈 수 있는 동기부여가 걷기, 달리기 등에 비해 부족한 것 같다.     





최근에는 또 다른 소중한 취미를 갖게 됐다. 

바로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는 것. 


성과물이 나올 뿐만 아니라 결과가 좋건 좋지 않건,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 줬다. 그리고 감정을 색채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 잊고 있었던 동심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치유의 과정을 갖게 해 줬다. 작은 일에도 쉽게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받는 나에게 이런 잔잔하고 향긋한 힐링의 시간은 감정을 긍정적인 쪽으로 중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사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직장인들, 일반인들에게 본인만의 치유 방법을 가지는 것은 필수적인 것 같다.

  

사실 요즘 내가 겪고 있는 무수한 문제들과 트라우마들, 해야만 하는 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헛구역질이 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정서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성공이 판가름이 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실 정말 시작은 어려웠다. 나는 초등학생 수준의 그림 수준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보면서 신기해하고, 옆에서 글씨를 끄적이는 것에서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친구가 파스넷으로 끄적였던 걸 낙서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캔을 해서 책자를 만들어준 것에서 시작됐다.      


낙서에서 시작된 것은 나의 모토를 담은 ‘La Vita e bella,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그림에서부터 그림을 알려준 친구의 초상화, 직장에서 만난 평생 친구를 위한 선물, 강아지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한 선물, 자작곡 커버를 그려달라고 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까지 발전하게 됐다. 명확한 대상을 정하고 그리는 것에 힘듦을 느낄 때쯤 전문가의 조언으로 나의 인생을 반영해 주는 추상화도 그리게 됐다. 


벽 틈 사이에 핀 꽃. 

꽃이 필 수 없는 환경에서도 틈을 비집고 피어나는 작고 하얀 꽃처럼, 나도 포기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이제는 오일파스텔뿐 아니라 젤 스톤, 아크릴 물감들도 쓰기 시작했다.       

    


최근에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풍경을 그리는 바탕색은 생각보다 진한 단색이라는 것이었다. 과감하게 캔버스를 진한 색으로 색칠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고, 어떻게 디테일을 채울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시작부터 색감의 디테일과 그라데이션을 시뮬레이션해서 그리려다 보면 시작이 더욱 힘들다. 아직 색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고 많은 면을 차지하는 색감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다. 연한 색으로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더라. 걱정보다는 강한 터치와 색감으로 일단 발을 딛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이 어렵지. 그다음은 나만의 느낌으로 회화적인 표현을 찾아 나가면 된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서도 색이 정리되지 않아 지저분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는 전문가의 도움도 받으면서 정리를 해나갔다. 망했다고 생각한 것도 나의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생각들, 어쭙잖게 쌓인 얕은 지식들로 판단한 것이다. 밝은 색으로 때로는 어두운 색으로 경계를 뚜렷하게 해주고 나면 망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점점 명확해진다.    

  


일단 시작해 보자. 

첫 단추를 ‘잘’ 꿰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작하지 못한다면 

예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더 늦춰지지 않겠는가? 

아차. 단추를 잘못 꿰었다면 다시 풀고 제 자리를 찾아 나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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