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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지니 Sep 10. 2023

시간이 멈춘 집

청소

‘집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 드라마 월간집      



드라마 ‘월간집’을 보면서 가장 많이 와닿았던 문구다. 우리 집은 나와 너무 닮았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썩어 문들어졌다. 심지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에 멈춰서 나아가질 못한다. 서랍이나 팬트리에 안 보이게 물건들을 집어넣고서는 지낼 만은 하다며 청소를 미루고 미룬다. 집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거랑 시간이 멈췄다는 게 무슨 의미지? 시계가 멈췄다는 건가?


아니다. 사실 집에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계뿐만이 아니다. 제조일자, 유통기한이 적혀있는 음식, 화장품, 약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게 거기 있었어?라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서랍장 구석구석에는 멈춰버린 시간들이 가득했다. 몇 년 지난 것들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는 우습게도 ‘아, 저 때 나는 뭘 하고 있었지?’라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거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일상생활이 힘든 경험들이 많았기 때문에 혼자 집에 들어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못 견뎠다. 그래서 무리하게 일정을 잡곤 했다. 다음날이면 출근 시간, 일과 시간이 괴로웠지만 오후가 되면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또 일정을 잡아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은 진짜 집에 가서 쉬어야지 하면서도 강박적으로 약속을 가득 채웠다. 자연스럽게 집은 잠만 자는 공간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썩거나 냄새가 나는 냉장고 안의 신선 식품, 고기들이 아닌 이상은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그렇게 우리 집은 시간이 멈췄다.          


 



이렇게 멈춰있는 시간을 어떻게 다시 흘러가게 했을까?

먼저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집이랑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이불 개기’였다. 먼저, 따뜻하고 포근한 색감인 베이지색 극세사로 침구를 바꿨다. 그리고 기분에 상관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이불을 한 번 털어서 가지런하게 정돈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매일 이불을 정돈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한 가지. 아무것도 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집에 들어왔을 때도, 정갈하게 정돈된 침실을 보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에너지 정도는 솟아나기 때문이다.      


잠을 편하게 자기 위해 달았던 짙은 회색의 암막 커튼도 흰색 배경에 좋아하는 캐릭터가 담긴 커튼으로 바꿨다. 암막커튼은 무조건 어두운 색이어야 빛이 잘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편견을 깼다. 커튼을 치고 있어도 밝은 색상의 커튼 덕분에 집이 훨씬 환해졌다. 외에도 조명에 쌓여있던 먼지를 닦고 수면에 도움이 되는 스프레이도 뿌렸다.


침실이 정리되고 나니 화장실과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관심을 가지고 집을 들여다보는 것에 재미를 붙이자 치울 것이 눈에 하나씩 들어왔다. 화장실은 수건을 가장 먼저 바꿨다. 각종 잔치들, 행사에서 받아온 기념품 수건들을 버리고 회색의 헤링본 무늬의 수건으로 바꿨다. 차곡차곡 개서 화장실의 서랍장에 가지런하게 쌓고 거울의 얼룩을 닦았다.


비로소 내 얼굴이,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두워 보이고 스트레스로 인해 피부가 뒤집어져 있긴 했어도, 전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은 쪘으나 눈의 초점 하나만큼은 또렷했다. 무엇보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명확하게 인지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고, 그들의 장점을 찾아주려고 노력하면서 왜 나는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 엄격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잘 돌봐주지 못해서, 너무 몰아붙이기만 해서 나는 많이 상해있었다. 이제는 스스로를 챙기고, 작은 것부터 나 자신을 대접해 줄 차례임을 느꼈다. 쌓여있던 먼지들을 털어내고 멈춰있던 시간들을 종량제 봉투를 가져와 버렸다. 이미 옷걸이가 되어버린 자전거와 이가 빠진 건조대도 버렸다.      


이런 날도 있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신경 써서 골라 바꾼 다음 신나게 빨래를 한 날. 나도 모르는 새 세탁기 위에 마구잡이로 쌓여있던 가죽 가방 하나가 떨어져 같이 세탁이 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보이지 않는 곳은 엉망진창이었던 나의 ‘시간이 멈춘 집’은 그렇게 한방이 아닌 하나씩 정리돼 가기 시작했다.     

 




집은 왜 인생을 담는다고 하는 것일까? 집은 생존에 직결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분출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현재 심리적, 신체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내가 보이는 부분도 정리가 안되게 집을 방치할 때는 중요한 일이 임박했거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했을 때였다.


사람이 쉽게 우울해지고 감정에 동요가 오는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깨진 유리창 법칙을 아는가? 깨져 있는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집은 폐가처럼 변하기가 더 쉬워진다. 성공을 향해,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친 듯이 희생하고 달리다가도 정작 스스로는 볼품없는 끼니로 매일 식사를 채우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문득 서러워지는 것이다.     


요즘 유독 내가 전과 같지 않다면, 의미가 없고 새로운 활력을 찾고 싶다면 작은 것에서부터 질서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거창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대접해주고자 하는 마음만 되찾을 수 있으면 된다.


많은 것을 이미 잃었다고 생각이 들어도 괜찮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도’ 이런 시행착오가 이미 내가 가지고 있었던, 또 앞으로 가지게 될 소들을 더 잘 지킬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집은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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