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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지니 Sep 12. 2023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여행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그동안 우울하니까, 아파서, 아파도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선 안된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분출해 왔던 내 잘못된 스트레스 해소법들을 고치는 것. 그래도 감사한 건 조울증이라는 병을 겪으면서도 정말 이것만은 안된다했던 각종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알콜이나 도박, 마약 중독과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쉽게 기댈 수 있는 건 술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술에 대한 규칙은 꼭 지키려고 했다. 술은 ‘즐거울 때’ 마시고, ‘혼자’서는 마시지 말자. 유난히 힘든 날은 더욱더 술을 찾지 말고 잠을 자자.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 술에 취해 가장 약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정을 쏟아내지는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행히 그 다짐은 잘 지켜냈지만, 속으로 꾹꾹 눌러 참는 버릇은 어디로든 터지게 마련이었다.      




현재 내 상태를 다시 짚어봤다.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중독에 빠지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은 중독들이 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뒤로 미뤄놨던 나의 가장 큰 문제를 직시할 차례다.


여전히 나를 무기력에 빠지게 하는, 가장 큰 걱정거리들을 단순하게 적었다.     

1, 4,000만 원의 빚

2. 0.1톤에 가까운 몸무게.      


그렇다. 내가 꾹꾹 눌러 참았던 우울함, 분노들은 쇼핑과 폭식으로 풀었다. 집이나 차나 명품과 같은 고가의 소모품에 투자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도 쓰레기라고 생각할 만큼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곁에 있어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돈을 썼다. 큰돈을 들이는 것도 아니니 해줘야지 생각했던 것들이 쌓였다. 곁에 머물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주기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너무 안 좋을 때,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남지 않아 헛수고처럼 느껴질 때, 스스로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습관적으로 켰던 결제창들이 현재의 문제를 낳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에는 너무 큰 산으로 느껴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다해서 후회가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진 것도 아닌데 하며 억울한 감정도 들었다.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삶을 살아내며 꿈꿨던 30대의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 패배감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겨내면서 나는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알게 됐다. 욕을 먹더라도, 이런 나의 모습에 실망해 주변 사람들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더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생각해 보자. 언젠가 ‘한 번은’ 이 과정을 꼭 겪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고 생각이 들 때,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져서 자포자기할 때야말로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더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작은 성취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즐기면서 놀았던 날들의 결과는 처참했다. 마주 봐야 할 문제들을 회피하면서 ‘힘들다, 그래도 해야지’ 하고 말만 하던 여느 날과 같았던 아침이었다. 되돌아보니 사실 이 날은 ‘혼자’ 술을 마시기도 한 날이다. 친구가 준 ‘잭 다니엘 허니’라는 위스키를 마시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내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한 듯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리셋 버튼을 눌러서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는 주인공이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인생 파업이다.’ 하면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에 나온 바다에서 찍은 내 뒷모습,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설현의 바다 사진


같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려 했다. ‘아무것도’ 안 하려고 떠난 곳에서도 주인공은 별일을 다 겪는다. 그럼에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나의 가치관과 맞아서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가장 크게 들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아름다운 해변을 옆에 두고 달리기를 하는 것이었다. 한창 달리기에 빠져 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때는 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좋아하던 대사가 떠올랐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회복이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 드라마 ‘미생’      



이런 마음이 들었을 때 움직여보자고 생각했다. 남해와 구례에 있는 촬영지를 찾아가서 직접 달려보기로! 함께 나서 주기로 한 고마운 친구. 새벽에 달리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드라마에 나온 러닝코스 바로 앞에 있는 펜션으로 숙소를 잡았다.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잡았던 터라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 숙소에 도착했는데 불이 다 꺼져있어서 처음에 도착했을 땐 귀신이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도 다행히 저렴한 가격에 친절한 주인분을 만났고 방 컨디션도 좋았다. 어두울 때는 잘못 온 게 아닌가 했던 바다도 해가 뜨니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촬영지 바다에서 찍은 내 뒷모습


이 외에도 주인공들이 머무는 공간들, 드라마에서 나오는 촬영지들을 돌았다. 깜깜해진 저녁, 밥을 먹기 위해 구례 시장을 도는데 문 연대를 찾아다니다가 들어간 작은 돈가스집. 임시완이 드라마를 찍을 때 한 달 정도 머물면서 왔던 식당임을 알게 되었다. 사인을 보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촬영지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장면과 인증샷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촬영지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주인공 임시완 사인과 음식점 사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시작된 드라마 시청은 여행을 갈 만큼의 에너지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다시 또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 줬다.      


인생은 불공평하고, 예기치 못한 불행한 일들은 나를 멈춰 서게 만든다. 이건 당연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가 됐을 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닥친 것만 같아 힘들다. 불행은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현재 겪고 있는 불행들 때문에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일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내가 글을 적는 이유는 알려주고 싶어서다.     


저마다의 사정은 다 다르겠지만, 나 역시도 아파하고 있다고.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고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의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말 못 할 아픔을 간직한 채 버텨내고 있는 당신에게 글을 읽는 단 1분이라도 위로가 되길..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작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런 에너지를 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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