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지니 Sep 10. 2023

Bon appétit


살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먹기 위해 산다. ‘먹는 행위’에 대한 시각은 무궁무진하다. 음식을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넣는 순간 눈물이 핑 돈 적이 있는가? 어렸을 때 요리 애니메이션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띵-하고 ‘미미’를 외치는 장면들이 나오곤 했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친구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여전히 나에게 이런 장면들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힘들 때 가장 빠르고 가성비 좋게 기분을 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소울푸드를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조울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살아 있으니까 살 수밖에’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낼 때 나를 버티게 해 준 건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녔던 것이었다. 그게 안될 때,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면 요리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배달 어플을 켜기 바빴다. 애초에 라면 외에는 조리할 에너지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집에는 1구짜리 가스버너가 전부였다. 타지에 나와 살아서도 집 밥을 먹고 싶다며 샀던 전기밥솥은 1년 넘게 사용하지 않아 쌓여있던 먼지가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회사에서는 다이어트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체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저녁엔 외식, 술자리, 배달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더욱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산 식재료들은 상해서 버리기 일쑤였다. 막상 사놓으면 해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시간이 멈춰 있는 집을 다시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음식들, 차, 쓸 수 없는 주방 용품들을 버렸다. 그다음으론 모임이나 회식도 줄이고 '집과 친해지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후 비워진 부분을 다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기는 친구와 오븐 없이 만들 수 있는 고양이 발바닥 모양의 마시멜로를 만들 때였다. 어렸을 적 소꿉놀이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베이킹이 취미인 친구가 정성스럽게 재료를 준비해 줬다. 나는 짤주머니로 모양을 만들어나갔다. 아무 쓸모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요리도 당연히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선물해 줄 예쁜 모양의 발바닥을 고르며 아이처럼 신나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파악한 친구가 포장할 수 있는 작은 플라스틱 컵과 핸드메이드 스티커까지 준비해 줬다. 아무것도 나를 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나에게 좋아하는 것들을 펼쳐 보여주며 '너도 행복할 수 있어'라고 느끼게 해 줬다. 갑자기 눈물이 울컥 터졌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친구는 엉엉 우는 나를 꼭 끌어안아줬다. 이 계기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회사 복지포인트로 2구짜리 인덕션을 샀다. 집 안 인테리어 색과 일관성 있게 하얀색으로 골랐다. 하얀색이라 음식 하는 도중에 국물이 튀어서 손이 더 많이 갈 것 같았지만 내가 쓰는 것이기에 더 좋은 것으로 골랐다. 친구의 소울 푸드인 미트, 토마토소스에 치즈 올린 파스타를 만들었다. 유튜브로 파스타 소스 만드는 법을 공부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친구가 인생 파스타라면서 너무 좋아해 줬다. 한 그릇을 뚝딱 먹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 번 성공한 파스타는 힘든 일을 겪고 있거나 중요한 일을 마친 친구들, 친동생에게도 대접했다.   


다음은 내가 먹을 음식들 차례다. 먼지가 잔뜩 쌓인 밥 솥도 정성스레 닦고 건강을 위해 현미와 백미를 3:1로 섞어서 밥도 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 야근할 때 먹기 위해 도시락도 싸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계란을 활용했다. 계란국, 계란말이에서 시작해서 쏘야(소시지 야채볶음), 소고기 뭇국, 소고기 미역국등을 만들었다. 수제비를 좋아해서 김치수제비를 직접 만들어먹고 막걸리가 먹고 싶은 날에는 직접 전을 부쳐서 먹기도 했다. 가장 맛있었던 전은 애호박 전이었다.      





요리를 다시 시작하면서 느낀 변화들은 상당히 많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예전에 요리를 곧잘 해 먹었던 내 모습이었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기본적인 센스는 있는 편이었다. '그때의 나는 참 꿈도 많고 야무졌는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전처럼 100% 돌아갈 순 없지만 그 모습도 나였기 때문에 되찾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요리 계획을 짜고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집중력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겼다. 사람들에게 만든 음식을 나눠 주면서 베푸는 행복도 느꼈다. 베이킹을 시작한 나를 위해 동생이 미니오븐을 줬다. 동물 모양의 초코쿠키, 말차쿠키 등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줬고 반응은 대성공이었다.


이런 것들은 회사 업무를 할 때도 도움이 됐다. 되는 대로 닥치는 일만 끝내자라고 생각했던 나는 다시 스케줄을 짜고 업무 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하나씩 순서대로 일을 끝내면서 성취감을 느꼈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부지런해지기 시작했다. 디테일도 추가되기 시작했다. 예쁜 접시에 먹기 좋게 플레이팅 했다.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고, 행복감이 밀려왔다. 배달 음식이나 외식을 줄이니 경제적인 부담도 줄어들고, 건강에도 훨씬 도움이 됐다.      


오늘의 한 끼를, 작은 식탁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건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신호다. 힘들수록 가장 먼저 놓기 쉬운 사소한 일상을 더 잘 붙잡아야 한다. 음식뿐만이 아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던 기억들을 잊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 루틴으로 만들자.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루틴이 아무것도 의미 없어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될 것이다.

     


오늘도, Bon appétit!






이전 08화 시간이 멈춘 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