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유대인의 수업법이라는 ‘하브루타’ 수업을 들었다. 6주간 진행되는 수업인데 ‘하브루타’란 짝을 지어서 함께 토론하고 논쟁하는 수업법을 말한다. 하브루타 수업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는 게 그날 있었던 수업에서 ‘빨간 벽’이라는 그림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이 책에 대해 논하면서 그림책의 깊이에 다시금 감탄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업 자체가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서로 짝을 지어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빨간 벽’이라는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표지를 보면서 ‘왜까바’ 놀이를 한참 했다. ‘왜까바’란 말머리와 말꼬리에 왜나 까를 붙여서 질문을 만드는 놀이를 말한다.
나는 왜 표지 가득 빨간 벽이 가득 차 있는지, 벽 너머엔 뭐가 있는지, 생쥐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등이 궁금했다. 왜 표지를 보면서 질문을 생각해봐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해도 좋으니 다들 왜까바 놀이를 한번 해보길 바란다. 나에게 너무나도 좋은 질문들과 사유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빨간 벽’. 모두 한 번쯤은 꼭 읽어봤으면 한다.
그 질문과 사유의 과정들을 조금씩 풀어보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중요한 것 같은 말과 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이 달랐다. 내 머릿속에는 파랑새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직 준비가 안 됐을 수 있어”
여기서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파랑새는 상대방에게 받아들일 시간까지도 줘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았을까?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과 상대의 최선은 다르다. 그들의 삶을 온전히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들의 최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린 그것을 종종, 아니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나의 답을 강요하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리거나.
또 최근에는 상대에게 유독 화가 나거나 분노가 이는 지점이 있다면 스스로를 들여다보라는 말에 공감이 많이 간다. 그게 나를 돌아봐야 할, 바로 나의 결핍의 지점이라는 것.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 거기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벽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냐는 물음에 겁 많은 고양이는 바깥은 위험한 곳이고 벽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하고 가버린다. 곰은 언제, 왜 세워진지 알 생각도 없다. 이미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우는 벽 뒤에 뭐가 있든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그리고 질문이 너무 많다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조언한다. 사실 여우가 하는 조언을 나는 굉장히 많이 들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다고. 그게 곧장 걱정으로 달려 나가곤 했기에 나는 생각을 없애야만 한다고 느꼈다. 생각이 많은 내가 문제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창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쉬이 생각할 수 없는 깊이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게 나에겐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직업이 어떻든, 어떤 사람이든 꽤나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다. 나는 이게 꽤 근사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사자는 힘도 세고 강한데 왜 벽 너머를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경험했을까? 사자가 마주한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쉽게 벽을 무너뜨린 쥐를 보며 사자는 더 아팠을 수 있지 않을까? 상대적 박탈감 말이다.
쥐의 입장에서는 파랑새가 귀인이다. 새로운 세상을 굳이 와서 데리고 나가준 사람이지 않은가? 또 사자의 입장에서는 쥐가 귀인이다. 좋은 세상을 알게 된 쥐가 혼자 훨훨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친구들에게 돌아가서 알려줘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받아들일 시간이 사자에게도 필요했겠지만 결국엔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었다.
친구들은 어두울 것이라고 했던 벽 너머 세상은 색색가지 아름다운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 너머의 세계로 데리고 가 진실을 알려준 파랑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봐서 그래. 너는 궁금해하면서 봤잖아. 넌 정말 용감했어. 진실을 스스로 찾아 나설 정도로 말이야.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네 스스로 만들게 돼. 하지만 네가 마음과 생각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그 벽들은 하나씩 사라질 거야. 그리고 넌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할 수 있을 테고.”
두려운 마음을 버리고 궁금함만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운 마음을 꼭 버려야만 할까? 두려움이 아예 없는 게 꼭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상식 수준의 두려움은 나를 지킬 보호 장치가 되어 준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다. 혼자 대처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피해 가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벽 없는 세상을 위해.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하는 책을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가 있다. 이 말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반항심이 일기도 했던 것.
파랑새가 또 다른 파란 벽이진 않을까?
벽을 없애야만 한다는, 틀을 깨야만 한다는 사고에 갇힌다면 그게 또 다른 파란 벽이지 않을까?
여기서는 순진과 순수의 차이점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순진, 다 알면서 어쩌면 하지 않는 것을 순수라고 어디선가 그랬다. 순진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순수한 사람이고 싶다.
벽 안쪽의 안정감과 벽 너머의 모험심 가득한 세상을 모두 알고, 그 울타리를 세울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세운 건강한 벽 안에서는 적어도 행복한 파랑새가 되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