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속에서 발견한 나

<프로젝트 헤일메리|영화>

by 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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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립된 우주선, 그리고 윌슨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서도 꾸벅꾸벅 졸던 내가, 3시간 가까운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러닝타임 내내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리클라이너 의자인데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자세를 수십 번 고쳐 잡으면서도, 나는 스크린 속 고립된 우주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그곳엔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이나 <월-E>처럼, 지독한 외로움 끝에 만난 기적 같은 온기가 있었다. 문득 자문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도 재고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혹은 무언가를 위해 나를 온전히 던져본 게 언제였던가. 그 기억이 너무나 까마득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 2. 좌우명의 붕괴와 전리품


오랫동안 내 좌우명은 ‘단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키자’였다. 하지만 타인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나를 부수는 일인지 깨닫고 나서야 나는 비겁한 단서를 달았다. ‘단,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결국 그마저도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우명을 포기해 버렸다. 완전히 놓아버리고 무엇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역설적으로 내가 변화시키고 싶었던 사람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나의 노력은 무의미했던 걸까? 허탈함이 몰려왔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포용력’이라는 전리품을 얻었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나 자신의 히스테릭한 방어기제조차 ‘그럴 수 있지’라며 바라볼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 3. 무던함이라는 가면 아래의 예민함


얼마 전, 소개팅을 주선하려던 동료에게 나의 장점을 ‘무던함’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주를 보며 들킨 나의 본질은 지독한 ‘예민함’이었다. 사실 나는 무던해 보이고 싶은 사람일 뿐이었다. 속으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평정심을 연기하고, 뒤돌아서면 내가 뱉은 말 한마디를 수만 번 검열하며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


조증 증상이 올라오는 건 아닌지 점검하고, 약을 챙겨 먹으며 충동을 조정하는 이 지루하고 치열한 과정이 나의 일상이다. 나는 나를 ‘무던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매 순간 자신을 수리하며 나아가는 예민한 사람’이었음을 이제야 인정한다.




# 4. 나의 병원이자 작업실, 그리고 나의 로키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며 보낸 새로운 집에서의 지난 1년 반, 이 집은 내게 누리지 못한 감옥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은 나의 ‘병원이자 작업실’로 변모하고 있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용기를 내고, 그곳에서 도킹하듯 영감을 수혈받아 돌아와 줄줄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나는 비로소 이 공간의 주인이 된다.


글들이 안갯속에 숨어버려 괴로웠던 날들을 지나, 오늘은 타래를 물듯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평온한 몰입의 곁에는 나의 ‘로키’, 고양이 벨라가 있다. 내가 가만히 누워 있으면 슬며시 다가와 품을 파고들고, 가볍게 나를 깨물며 존재를 알리는 녀석. 벨라의 턱밑을 긁어주며 듣는 고로롱 소리는 세상 어떤 약보다 달콤하다.




# 5. 오해를 끝내고 시작하는 기록


나는 나를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무던한 줄 알았으나 예민했고, 다 포기한 줄 알았으나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모순 가득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나 소중하다.


부서진 채로 돌아와 다시 나를 조정하고, 벨라의 온기에 기대어 허리의 통증을 견디며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이제야 나를 오해하기를 멈추고, 진짜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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