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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Sep 10. 2021

# 일기장을 버렸어, 미안해

  무난히 살고 있었다. 부모 말은 잘 듣지 않으면서, 그래도 말을 하나부터 열까지 하면 개중 두세 개는 시키는 대로 하는. 자랑할 것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크게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그럭저럭한 삶을 살다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다는 건 굉장히 큰 삶의 변화였다. 새 ‘식구’가 들어오자, 엄마아빠는 평생 내겐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였다. 불과 몇 년 전 먼저 결혼한 동생이 ‘식구’를 데려왔을 때 이미 한번 비슷한 모습들을 봤기에 나는 충분한 면역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 일이 되고 보니 나는 어떠한 면역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딸이 데려온 ‘사위’, ‘서방’ 앞에서 전혀 흥분할 일이 아닌데 잔뜩 격앙된 오버스러운 모습을 보인다거나, 정작 부모와는 3n년 차 1촌인 딸에겐 생전 보이지 않던 점잖고 젠틀한, 여러모로 아주 낯선 모습에 어떠한 보모막도 없이 노출이 되어 버린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들이셔.’라는 구남친(이제는 남편)의 말에 그 괴리감은 정점을 찍었다.

  오히려 착한 ‘며느리’ 역할은 나쁘지 않았다. 이쁨 받는 것과 챙김 받는 게 좋았고, 또 반대로 받은 것을 돌려드리는 것도 좋았다. 내게 딱히 바라는 게 있으시지도 않아 보였다. ‘싸우지만 말아라. 사이좋게 지내라.’ 그 말은 학교 가던 내게 아빠가 늘 하던 말이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 딱히 가이드나 방법을 제시하진 않았다. 물어봐도 구체적인 방법론은 없었다. 어쨌거나 늘 결론은 ‘사이좋게 지내.’ 평생을 들어오던 말이니, 그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댁에서 좋은 며느리, 착한 며느리가 되면 될수록 내 안의 못된 ‘딸’이 잔뜩 입술을 삐죽거린 채 툴툴거렸다. 시댁에 한번, 우리집에 한번. 뭔가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착한 며느리와 못된 딸은 내 안에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자취할 때도 내 자취방에 엄마를 초대해 엄마의 생일상을 차려드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첫 생일은 그래야만 했다. 내가 낸 아이디어도 아니고 내가 요리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우리 엄마의 생일상을 차렸고, 꽃다발을 사 왔다. 준비과정도 요리도, 세팅도 남편이 다 했다. 말 그대로 나는 같이 받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그럴싸한 핑계가 있었지. 내 생일도 엄마 생일과 딱 일주일 차이고, 심지어 그 해에 엄마 생일을 음력, 내 생일은 양력으로 변환을 하고 나면 같은 날이었다. 와이프 생일과 장모님의 생일을 한 상으로 한번에 진행한다. 우리 남편이지만, 참 머리가 좋아. 그렇게 결혼하고 첫 생일, 나는 우리 엄마와 함께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편하게 받아먹고 축하를 받으며 보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날에도 내 안의 못된 딸은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던 중 엄마가 말을 꺼냈다.

  “어릴 때 너가 오랫동안 써오던 일기장을 버린 이유는 니가 너무 글을 솔직하게 썼기 때문이야. 그걸 보는 사람 모두가 우리집 가족사를 알 수 있었거든. 그래서 버렸어.”

  머릿속이 에밀레종 안에서 울렸다. ‘그래서 버렸다고?’ 어이없어하는 날 앞에 두고 엄마는 아주 우아하게 남편에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글을 참 잘 썼었는데, 잘 모아뒀다가 책이라도 내줄 걸 그랬어. 그 정도로 참 잘 썼었어.”

  초등학교 6년 내내 잘 써오던 일기장 더미가 한순간에 사라진 이유. 엄마가 버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설명으로는 일기장이 너무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 꽂아둘 자리가 없다고 했었다. 어린 당시의 나로서도 그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핑계라고 생각했지만, 마트에 가서도 ‘집에 둘 곳이 없어서 물건을 더 살 수가 없어’라는 소리를 워낙 자주 하던 깔끔 떠는 성격의 엄마기에,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해하려고도 무진장 애를 썼다. 살면서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딸의 물건을 함부로 들추어보고, 정돈이라는 핑계로 손대고 없애버리고 하는 것들.

  그런데 고작 그런 이유라고? 누가 내 일기를 본다고, 심지어 당신 보라고 쓴 글도 아닌데? 내 안의 못된 딸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못해 안에서 하도 울면서 소리를 질러대서, 현실의 나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릴 때 우리집에 놀러 온 친척들은 종종 내 일기를 보고 싶어 했고, 몇몇 어른들은 내 손에 천원, 이천원 씩 용돈을 쥐어 주며 일기를 읽어도 되냐고 물었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건 내 일기고, 내가 허락한 선에서 읽는 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게 싫어서 버렸단다.

  그렇게 내 허락도, 동의도 없이 내 몇 년치 어린 시절의 일기장은 사라졌고, 엄마는 20년, 30년이 거진 다 되어 그 딸이 결혼을 하고 나서야. 딸 앞에서 직접도 아닌, 딸의 사위 앞에서 고백한다. 미안하다고. 지금 와서 후회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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