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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빨강 Sep 16. 2021

# 하마터면 이대로 성공하는 줄 알았지 뭐야

  나는 행동파였다. 처음 일을 시작해 배운 것들도 얼추 그런 것들이었다. 내가 앞장서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정리해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 상황들이 많았다. 내가 뭐라고,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해야하는 일이 그런 류의 것들이었다.

  첫 회사의 사장은 신입을 뽑으면 그 사람에게만 1년간 평균 2억 정도의 투자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엔 신입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그 이상의 수익을 가져와야 한다고. 그 전까진 회사에서 손해지만, 순전히 사람의 미래를 보며 키우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1년간 손해를 보며 키운다는 신입에게 떠맡기는 업무의 스케일은 사장이 말한 2억 규모를 금세 훌쩍 넘었고, 겨우 들어온 지 3달 된 신입이 하루 월차를 내자 시간 단위로 전화를 하며 기획서 작성을 맡기거나, 소소하게는 관련 파일의 저장 위치를 파일별로 프로젝트별로 다 따로따로 묻곤 했다. 새벽 1시고 7시고 대신 기억해달라며 보내놓는 카톡이 너무 잦았고, 새벽 2시에 퇴근했기에 아침 출근 시간까지 맞춰 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는 내게 사장은, 새벽 6시 수영반을 등록하라고- 아침 운동을 다녀와서 출근하면 절대로 지각하지 않는다고 진지한 조언을 해줬다. 야근을 줄여달라는 말임을 절대로 모를리가 없을 것 같은데, 사장은 오히려 아침에 더 열심히 살면 된다고 나를 채찍질했다. 당시의 난, 여기서 얼마나 더 열심히 살 수 있는지 가늠도 채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걸 물어본 것도 아니었다. 

  첫 입사를 중소가 아닌 대기업으로 잘 했어야 했을까-라고 후회하기엔 그 회사는 업계에서 (지역 한정이긴 하지만) 꽤나 명망 있는 회사였다. 월급통장을 만들러 은행에 갔을 때 은행 창구 직원분이 말해주었다. “우와, 굉장히 좋은 회사에 입사하셨네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업계 선배인 동생은 그랬다. “언니, 그 회사 굉장히 크고 좋은 회사예요. 부러워요.”

  선배들이 ‘너는 정말 천직을 만난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떨 땐 현장에서 억울하게 쌍시옷이 들어간 욕을 먹기도 했지만, 잘한다고 칭찬을 듣고 능력을 인정받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아서 일이 힘들지가 않았다. 

  나이도 어린 사회 초년생, 게다가 여자인 내겐, 심지어 우리가 갑이고 저쪽이 을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어려움이 종종 있었다. 나를 담당자가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툭하면 아가씨가 뭘 알아- 소리를 들으면서 일했다. 이 구역 담당자는 나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현장에 나와서 완장만 차고 있는 우리 회사 본부장이 내게 “우쭈쭈쭈 잘했어요~ 으구 귀여워~”하고 있으니, 우리 쪽에서 돈 주고 ‘고용’한 현장진행요원들도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툭하면 "누나는 몇살이예요? 몇년생이야?" 같은 소리, 남자친구가 있네 없네 하는 시덥잖은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디펜스는 가만히 지켜보다 스피커로 보이는 친구에게 가서 '나 결혼했고 벌써 애가 둘이야' 같은 소리나 스리슬쩍 흘리고 오는 것 뿐이었다. 유독 현장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지시하면 일이 빠릿빠릿하게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우리 팀장이 현장에서 소리 질렀다. “김피디, 정신 차리고 나한테 빨리 시켜!”

  바로 눈치를 챘다. 팀장에게 테이블 위치부터 알려주며 세팅을 지시했다. 테이블을 이렇게 두고 진행용품들은 각 테이블마다 이 구성으로, 이 안내판은 여기, 행사 진행 동선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하나하나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팀장님이 직접 나서서 테이블을 끌고 와 각을 맞추고 진행용품을 테이블 위에 쏟고 테이블 수 대로 배분해 정리했다. 우리 팀장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니, 멀뚱멀뚱 서 있던 현장 사람들도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마치 빨리 감기라도 한 듯한 속도로 현장 세팅을 끝냈다. 팀장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다음은?” 

  그렇게 내 머릿속 상상에서만 존재하던 현장이 실현되고 있었고, 모두가 힘이 되어 움직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프로그램이 완성되고 있었고, 내가 생각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고 뭔가가 되고 있었다. 그걸 앞서서 진두지휘하는 것이 정말로 좋았다. 이 맛에 일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무슨 일 하냐 물으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초록색 화면에서 'XX축제', 'XX페스티벌' 같은 키워드만 치면 기사가 떴으니까, 링크로 보내주기만 하면 설명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승승장구만 하는 줄 알았다. 이대로 커리어를 쌓다가 이 회사에서 한 자리를 해도 되고, 혹은 여기서 열심히 배운 것으로 나중엔 내 회사를 차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즐거웠고 자신이 있었고 뿌듯했다. 나는 정말로 이대로 성공하는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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