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정말로 그랬었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일만 하고, 아이디어만 쥐어짰다. 사무실 아니면 현장, 그리고 회식 자리만 왔다 갔다 했다. 사무실 내에서는 페이퍼 작업의 연속이었고, 외근을 나오거나 하면 미팅의 연속 혹은 현장 지휘(라고 쓰고 대기라고 읽는다)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나는 차도 없고 당시에는 운전도 할 줄 몰랐기에, 한번 나가면 선배들의 줄줄이 잡힌 모든 일정을 오롯이 함께 참석해야 했다. 덕분에 배운 것도 많았지만, 업무시간의 2/3 이상을 선배들 따라다니는데 쓰다 보니 야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방금 미팅 다녀온 것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정리하면 30분 내로도 정리가 가능한데, 외근을 한번 따라 나갔다는 이유로 회사 관련 모든 미팅을 다 참석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머릿속을 재정비하는 데에만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곧 저녁 시간이니(퇴근 시간이 뭐죠?) 선배들은 밥 메뉴를 고민한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니, 찬찬히 각 잡고 기획서 뜯어보면서 정리해야지- 가 그냥 기본 업무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신나게 술 먹고 다니느라 야근 핑계를 댄다고 생각한 엄마가 아빠를 시켜 나한테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분명 엄마 번호였는데 받으니까 아빠였다. "너 뭐해, 어디야", "아직까지 정말 회사라고?"
어쩌다 한번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도 늦게 퇴근하니 내가 참석을 할 수 있는 시간대의 약속은 죄다 술자리뿐이었고, 거기서도 나는 계속 일 이야기만 했다. 친구들의 고민은, 당시 내 귀엔 들리지도 않았다. 정말로 미안했던 적도 있다. 몇 달간 못 본 친구들이 어떻게든 얼굴 좀 보고 헤어지자고 새벽 2시까지 나만 기다렸다. 나는 사무실에서 기획서를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또다시 불려가서 수정하고를 무한반복 하다가 참지 못하고 팀장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기다린다고. 우리 팀장은 시계를 보더니 집에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면서 나를 보내줬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과 만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효율적으로 분업을 하고 작업 프로세스를 수정하면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회사가 잘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문제는 들어온 지 고작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입인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주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내 선에서 다음 팀에게 넘어갈 작업 요소들을 빠르게 정리해서 딜레이 없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윗선에서 갑자기 엎어버리면 소용이 없었고.
그렇게 먼저 처리해야 하는 것들을 처리해나가는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친했던 친구들이 점점 뒤편으로 밀려나더니, 그다음은 가족이었다. 일은 좋은 핑계가 되었다. 모든 귀찮은 가족행사들을 일을 핑계로 피해갈 수 있었다. 바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바빠서 만사가 힘들어지니, 단순 안부로 쿡쿡 연락하는 사람들이 귀찮아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나 바쁘니까 빨리 말해", "잘 지내냐고? 야이씨, 바빠 죽겠는데. 나중에 연락해."
분명 잘 먹고 잘 살려고 일을 하는 걸텐데, 일을 하느라 밥 굶기가 일쑤였다. 사람들의 연락과 약속자리가 귀찮아지고 피곤해졌다. 나는 일 때문에 바빴고, 바쁘다 보니 까칠해졌고, 까칠해지다 보니 혼자가 편해졌다. 이대로 살아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그렇다고 치자. 나는 결혼은 하고 싶은데, 아이도 낳고 싶은데, 내 아이 학교 입학식, 졸업식은 갈 수 있을까? 행사가 겹치는 날이면 어떡하지? 아니, 내가 키울 수라도 있나? 아이의 요구도 칭얼거림도 벌써부터 드는 상상만으로도 귀찮은데, 항상 바쁜 척 일이라는 방패 뒤에 지금처럼 숨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체력과 마음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