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여간 육아일기를 쓸 수가 없었다.
아이의 낮잠 시간이 서너 타임에서 두 타임으로(한 타임에 자는 시간은 한 시간~한 시간 반 정도) 줄어들면서 낮 시간이 정말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육아의 난이도가 세졌고, 아이의 몸무게와 힘이 크게 늘어나면서 육아를 할 때 필요한 육체노동의 강도도 심해져서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통잠을 제대로 자는 것도 아니라서 밤에 두 번 정도는 꼭 깼고, 밤수를 끊기 위해서 최대한 젖을 안 물리고 안아서 어르고 재우느라 나는 피곤함이 극에 달해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침 5시에서 6시쯤 복주가 깨어나면 그때부터 육아 출근을 한 나는 저녁 7시~8시쯤 복주가 잠들 때까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육아를 해야 했고,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채로 "너무 힘들어서 기절할 것 같아.", "사람 살려.."와 같은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지금 이렇게 오랜만에 육아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지금 친정에 와서 육아 도움을 받으며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기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주는 것 외에는 딱히 육아에서 힐링이 될 만한 일은 더 이상 새롭게 쓸 만한 내용도 없는데, 육아로 지친 심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육아일기를 쓰는 것의 의미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내가 육아일기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출산과 육아라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세계에서 느낀 벅찬 감동과 행복, 놀라움, 경탄의 감정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였지만, 요즈음 나의 육아생활을 차지하는 커다란 비중의 감정은 '지침', '힘듦', '우울함'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이런 감정은 내가 쓰려던 육아일기의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나처럼 육아생활을 힘들게 하는 엄마들이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이런 행복하지 않은 감정에 대해 육아일기를 쓰는 것도 그런 엄마들에게는 '그래, 육아를 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라는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오랜만에 일기를 적어 보게 되었다.
새벽 다섯 시 반,
복주가 일어나 울기 시작한다.
벌써 또다시 고강도 노동을 해야 하는 오늘의 하루가 밝았다는 사실에,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두려운 마음으로 억지로 눈을 뜬다.
아기의 기저귀부터 확인해 본다. 요즈음 아기는 새벽에 똥을 싸는 일이 많았다.
역시나 기저귀에 똥이 흥건하다. 똥을 싼 지 얼마나 지난 걸까..? 아기가 똥을 싼 지 얼마 안 되었기를 바라본다.
복주는 똥을 싸도 좀처럼 울지 않을 때가 많았고, 똥을 싼 채로 울지도 않고 한참을 참고 있는 복주를 뒤늦게 발견하게 될 때면 차가운 똥을 지린 채로 한참 있었던 복주가 너무 가엾고 미안해지고는 했다.
복주의 몸무게가 9kg을 넘으면서 포프베베 아기 비데가 한번 무너졌고, 그 뒤로는 위험해서 비데를 쓰지 않고 똥을 닦을 때면 세면대에 복주를 일으켜 세워서 닦고는 했다. 이제 다리에 힘이 좀 생겨서 복주도 어느 정도 세면대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자세로 아기 비데 없이도 똥을 쉽게 닦을 수 있게 되었다.
(알고 보니 복주 정도 단계로 자라면 '프롬유 샤워 핸들'을 쓰면 편하다고 해서 조만간 구입해야겠다 싶다)
프롬유 샤워핸들 이미지
똥을 닦는 동안 아기는 배가 고파서 칭얼대며 운다.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기저귀를 채우고 냅다 수유를 한다.
아기는 오늘도 전투적으로 젖을 빤다.
아기가 오른쪽 젖을 빨자 왼쪽 가슴에서도 저절로 젖이 뚝뚝 떨어져 흐른다. (이상하게도 한쪽 가슴을 물리면 다른 가슴에서 자동으로 분수처럼 젖이 솟아 나오고는 한다.)
조금 흐르면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젖이 계속 흘러서 아기의 내복 바지와 내 잠옷을 점점 흠뻑 젖게 만들고 있었다.
자고 있는 남편에게 부탁을 해본다.
"여보, 수건 좀 갖다 줘."
자고 있던 남편은 귀찮아하며 투덜대며 말한다.
"아니, 매번 이렇게 다른 쪽 젖가슴이 흘러서 젖는 거 알면서 왜 수건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자꾸 날 시키는 거야? 수유하기 전에 미리 좀 챙겨라 쫌!"
"알겠어. 애기가 배고파하니까 빨리 젖을 주려다가 자꾸 잊어버려."
타박하는 남편에게 수건을 받아 다른 쪽 가슴에 수건을 대면서 슬픔을 느낀다.
아기가 태어난 지 170일이 될 때까지 매일 거르지 않고 하루에 다섯 번 이상 수유를 하는 나의 이 힘듦과 노고를 남편은 왜 알아주지 않을까..?
내 몸의 양분을 다 짜내서 아기를 먹이고 있는데.. 힘이 세진 아기가 수유하면서 손으로 꼬집고 할퀴어서 팔과 가슴에는 생채기가 수없이 많은데.. 매일 수유하면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김 당하고 아기의 발길질에 허벅지와 배를 퍽퍽 맞으면서 수유하고 있는데..
이런 나의 힘듦에 대해 남편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 준 적이 있을까?
그런 적이 있다면 수건 하나 갖다 주는 것에 이렇게 신경질을 내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고 슬퍼진다.
아기를 먹인 후, 잠이 깬 아기와 놀아주기 시작한다.
일단 아기체육관에 눕히고 매트 위에 놓인 방석을 접어 베개 삼아 나 역시 그 옆에 누워 아기가 노는 것을 바라본다.
아참, 젖병소독기에서 아기 체육관에 매다는 모빌들을 가지고 와서 달아야지..
요즘 아기는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에 가져다 대기 때문에, 모빌을 비롯한 장난감들은 매일 저녁 깨끗이 물로 씻은 후 젖병소독기에 넣어 둔다.
아기가 밤잠이 들면 매일 밤 나는, 아기가 노는 넓은 매트 위를 돌돌이를 이용해 먼지 제거를 하고 물티슈로 닦아 내고, 아기의 장난감들을 소독한다.
남편도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청소를 매일 하지만, 이렇게 아기용품을 세척하는 것까지는 남편의 생각이 잘 닿지 않기 때문에(남편은 매일 아기 입에 닿는 것들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것들은 나의 몫이다.
나 역시 그다지 세심한 성격은 아닌데, 이상하게 아기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남편보다는 아무래도 엄마인 내가 더 세심하게 이것저것 챙기게 된다.
예방접종을 언제 할 것인지 체크하기, 손톱 자를 때가 되면 잘라주기, 아기 장난감들 세척하기, 아기의 개월 수에 맞는 장난감을 구입하고 발달에 필요한 놀이가 무엇인지 찾아보기, 이유식은 언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공부하기 등등
이상하게도 이런 세밀한 육아 작업들은 언제부터인가 오롯이 내 몫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남편은 육아책 한 권 찾아 읽지 않았고 아기의 발달을 위해 어떻게 놀아주는 것이 좋을지 딱히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고민들을 언제나 나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외롭다.
'그래도 우리 남편 정도면 가사와 육아를 많이 도와주는 남편이지.. 남자들은 무심한 성격의 사람들이 많으니 남편들 중에 그렇게 세심한 육아 케어가 가능한 아빠는 많지 않을 거야.'라는 자기 위안적인 생각을 해보며 나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 본다.
아기가 아기체육관을 가지고 놀다가 뒤집기를 하고는 낑낑대며 칭얼댄다.
남편은 칭얼대는 아기를 뒤로 한 채 출근한다.
오전 7시, 또다시 나는 아기와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가지고 있는 장난감들을 다 사용해서 아기의 주의를 끌며 웃겨 주고 놀아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점퍼루, 쏘서, 바운서에 돌아가며 앉혀 보았다가 낮잠 시간이 가까워지면 유모차에 태우며 온 집안을 돌아다니고..
유모차에서 아기가 잠들어 주면 아주 땡큐하고 럭키한 날!
잠들지 못하고 앵앵대면 또다시 아기띠를 두르고 토닥토닥..
그래도 유모차를 쓰기 시작하면서 유모차 안에서 복주가 졸음을 많이 느끼게 되어 아기띠로 재워도 짧게 안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드디어 아기가 낮잠을 자면 나 역시 눈을 잠깐 붙이거나, 잠이 안 올 때에는 육아서적을 읽는다.
아기는 조금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고, 아기와 놀아주다가 네 시간 반 텀이 지나면 수유..
그리고 다시 놀아주고 재우고 수유하는 패턴의 무한 반복..
너무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은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 아기와 놀아주는 나는 남편이 돌아올 시간만을 기다리는데, 낮 시간은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고 더딘지 모르겠다.
아기가 크면 클수록 놀아주는 시간은 길어지고 아기가 자는 시간은 짧아져만 간다.
그러는 동안 허리와 어깨는 견딜 수 없이 시큰거리고 나의 피로도는 걷잡을 수 없이 쌓여만 간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에서도 신체에 누적된 피로도가 상당히 높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도 아기의 웃음만큼은 언제나 눈물 날 정도로 예쁘고 귀엽고ㅡ 또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천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아기의 너무 예쁜 미소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히 나는 지금의 이때를 힘들지만 너무나 그리웠던 시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기의 웃고 있는 이 얼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내가 지금의 이 순간을 먼 훗날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알고 있기에, 아기의 예쁜 미소를 잊지 않으려고 한 장 한 장 사진과 동영상으로 많이도 담아 둔다.
오후 다섯 시 반..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복주를 목욕시킨다.
원래 남편이 아기를 목욕시켰는데, 남편이 아기를 목욕시키면 아기가 너무 울어서 이제는 남편이 오기 전에 내가 목욕을 미리 시켜 버린다.
남편은 출장이 잦은 직업이었고 남편이 출장을 갔다 오고 나면 남편과 복주의 유대감은 0으로 리셋이 되어서 복주는 출장 갔다 온 아빠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마냥 낯설어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에게 안겨서 잠을 자려고 하지도 않았고 목욕할 때에도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슬프게 꺼이꺼이 울면서 "엄마ㅠㅠㅠㅠ"하고 부르짖는 복주가 가여워서 어느샌가 육아는 거의 나 혼자 전담하는 것에 가까워졌다.
남편은 엄마 껌딱지에 아빠 얼굴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복주에게 서운해서, 재울 때나 목욕할 때에 "울지 마!"라고 혼내면서 거칠게 대할 때가 많았고 복주는 그런 아빠 모습에 또 자지러지게 울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는 모습도 귀여운 복주ㅠㅠ 아기가 우는 것도, 보채는 것도, 출장 갔다 온 아빠를 기억하지 못하고 낯설어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모두 아기이기에 자연스러운 일인데, 남편은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저렇게 화를 낼까..
하지만 이걸로 뭐라고 하면 또 싸우게 되겠지.. 그냥 내가 아기를 보자..
이런 마음으로 나는 남편이 와도 아기와 놀아주는 것만 조금 맡길 뿐, 목욕이나 재우는 것은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남편이 아기와 놀아주는 모습도 마음에 차지 않을 때가 많았다.
좀 더 눈을 마주치면서 말도 걸어주고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면서 놀아주면 안 되는 걸까..?
아들이라 기운이 넘쳐나니까 좀 더 몸으로 놀아주면 안 되는 걸까..?
저렇게 그냥 엎드려 놓고 동요가 나오는 장난감 하나 틀어주고 옆에서 유튜브 보는 것 좀 안 했으면..!
말하면 싸우게 되니 말하지 말아야지, 하다가 어느 순간 또 터져 나올 때가 있다.
"핸드폰 좀 그만 보고 아기랑 열심히 놀아주면 안 돼?"
남편의 눈썹이 올라간다.
"내 육아방식에 대해 참견하지 않기로 했잖아..!"
(참견하지 않기로 합의된 게 아니라 참견하지 말라고 네가 통보한 거잖아!!)
"아기한테 다양한 자극을 주면서 놀아줘야 발달에 도움이 되니까 그렇지."
"그냥 놀아줘도 다 알아서 잘 커."
어차피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발달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놀이들과 책 읽어주기 등은 내가 낮에 실컷 했으니 남편은 그냥 편하게 놀아주게 내버려 둬야겠다. 남편도 회사에서 일하다 왔으니 여러모로 피곤하겠지..
"나 씻고 나올 테니 아기 좀 잘 부탁해."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머리를 감는데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 수채 구멍에 가발마냥 쌓인다.
출산 후에 머리카락이 너무나 많이 빠져서 꽤 많은 편이었던 머리숱은 자취를 감추었고, 나는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머리카락을 온 집안에 죄 흘리고 다녔다. 머리카락을 치우고 또 치워도 계속 집안에서 머리카락이 나와서 집이 지저분해 보이고는 했다.
하나로 묶으면 꽤 두꺼웠던 머리는 얇디 얇아졌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머리 말리는 데 예전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거..?
샤워를 할 때면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아기가 언제 울지 몰라 언제나 급한 마음으로 샤워를 한다.
"응애.. 응애.."
이 소리는 환청인가, 이웃집 아기인가, 복주가 내는 소리인가..?
귀 기울여 들어보니 복주가 내는 소리 같다.
서둘러서 머리를 헹구고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거실에 나와보니 남편이 울고 있는 복주를 엎드려 놓은 채로 등만 토닥이고 있다.
순간 짜증이 치민다.
아니, 아기가 울고 있으면 좀 안아서 정성껏 달래주면 안 되나? 왜 저렇게 엎드려 놓은 채로 내버려 두는 거지?
머리도 말리지 못한 내가 아기를 안아 올리자 남편이 말한다.
"머리 말리고 와. 내가 보고 있을게."
"아냐, 아기 울잖아. 내가 볼게."
남편의 눈썹이 또 찡긋 올라간다.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거야? 나는 필요 없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피곤하다... 아기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또 말 한마디에 꼬투리 잡아서 따지고 드는 남편...
너무 피곤하다..
남편과 싸우기 싫어서 아기를 남편에게 넘기고 머리를 말린다.
드라이기를 틀어도 아기 우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복주야, 미안해...ㅠㅠ
머리를 최대한 빨리 말리고 나와서 아기를 안고 어르고 달랜다.
졸려서 울었던 것 같다.
아기는 "엄마, 왜 이제 와~?"라고 말하는 듯한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올려다본다.
요즈음 복주는 엄마의 품 안에서 밤잠을 들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 같다. 마지막 밤잠만큼은 엄마 품 안이 아니면 절대로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내가 안아주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에도 자려고 들지 않았다.
아기띠를 두르고 "복주! 엄마 품으로 들어왓~!"라고 웃으며 말하니, 복주가 싱글벙글 웃으며 품 안으로 쏙 들어온다.
긴 속눈썹에 맺힌 아기의 눈물방울이 안쓰럽다.
복주를 안아서 15분 정도 아기띠로 흔들어주며 자장가를 불러준다. 요즈음 나는 아기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자장가를 들려주고 싶어서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만든 멜로디와 가사로 자장가를 불러주고는 한다.
긴 속눈썹이 예쁜 복주
"엄마는 복주를 너무너무 사랑하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복주죠~"
노래도 불러주고 말도 걸어주니 어느새 아기가 곤히 잠이 든다.
아기를 눕혀 놓고 오니 남편은 아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어느새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시작한다.
출산하면 끊기로 했던 게임..
하지만 게임돌이인 남편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기가 잠들기만 하면 게임에 몰입하고는 한다.
출산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모든 여가시간을 게임에만 쏟는 남편이 야속하다.
아기가 잠들고 나면 남편과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수다도 떨고 싶고,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닌 둘이 같이 하는 보드게임이라도 했으면 좋겠고, 같이 넷플릭스라도 보면서 웃으면 좋겠는데..
나는 남편과 같이 놀고 싶은데..
남편은 혼자 게임하는 게 좋단다. 같이 놀고 싶으면 나도 롤을 배워서 같이 롤을 하자고 말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여가시간이 생기면 육아책을 읽거나, 어떻게 재테크를 할지 찾아보거나, 부업을 찾아 소액이라도 집에서 벌어보려고 하는데..
남편은 그저 게임 유튜브 보기 아니면 게임하기뿐이다.
나에게는 가정과 육아가 전부이지만 남편은 아니다.
하지만 남편에게 나처럼 가정과 육아가 전부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남편도 충분히 가사와 육아일을 많이 하고 있고, 언제나 피곤에 젖은 남편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처는 게임뿐이니까..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왜 게임하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나는 이토록 외롭고 야속한 기분이 들고 마는 걸까..
남편은 자기가 밖으로 나다니는 취미가 없는 것이 어디냐면서, 자기가 게임 대신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면 좋겠냐고 말한다. 자기는 퇴근하면 재깍재깍 집에 바로 들어와서 가사를 하고 아이와 놀아주는데, 이런 남편 없다고 한다.
게임도 할 일 다 하고 아기가 잠 들고나서야 하는 건데 이것마저 못하게 하면 자기는 삶의 낙이 없다고 한다.
그럼 나의 삶의 낙은 뭘까..?
나도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고, 집에만 있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는데..
남편은 그나마 집에서 저녁 먹으면서 시원한 맥주라도 자주 마시지만 나는 모유수유한다고 맥주 한 방울 입에 대지도 못하고 사는데..
왜 엄마인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아빠인 남편의 희생은 치켜세움을 받을 만한 것이 된 걸까..?
육아를 하면서 체력이 후달리는 남편은 점점 예민한 쌈닭처럼 굴었고, 입버릇처럼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고맙게 여겨 달라고 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아기 똥 좀 치워줘.", "아기 물건 당근으로 좀 사다 줘."라고 말하면 화를 냈다.
"그렇게 시키지 좀 마. 말 좀 예쁘게 해. 꼭 네가 날 부려먹는 것 같잖아. 왜 내가 꼭 아기 똥을 치워야 하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왜 예민하게 화를 내고 그래?"
"네가 내가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니까 그렇지!"
그렇게 남편과 싸우고 나면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했다.
답답한 마음에 어느 날은 유튜브에 "부부싸움"이라고 검색해 보았다.
오은영 선생님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상담해 주는 한 프로그램이 유튜브에 있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청소기 좀 돌려달라고 하고 남편이 짜증을 내는 상황이었다. 우리 상황과 비슷했다.
갈등 해결책으로 "이렇게 말해 보세요."라면서 솔루션 영상을 보여주었다.
아내 - 여보, 내일 손님들 오시잖아. 내가 아까부터 청소해야 한다고 했는데 나 혼자 하려니까 너무 힘들다~ 당신이 거실 청소 좀 해주면 안 될까? (남편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 제시+자신의 감정 제시+해야 하는 일을 질문의 형태로 완곡하게 부탁하기)
남편- 그랬어? 아니, 난 뉴스 좀 보고 하려고 했지. 이것만 보고 하면 안 될까?
아내- 뉴스 보면서 청소하면 안 될까? 아... 청소기 때문에 TV 소리가 안 들리겠구나. 어떡하지? 지금 당신이 거실 청소를 해줘야 내가 빨래 널고 거실을 정리할 수 있는데.. ('지금' 해야 하는 이유 제시+ 지금 하라고 강요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어떡하지?'라고 질문하기) 우리, 청소 빨리 끝내고 같이 드라마 보자. (지금 남편이 하는 일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즐거운 대안 제시)
이걸 보면서 남편이 그토록 원하는 "예쁘게 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말을 예쁘게 해 보자.
남편이 내게 원하는 것은 결국 '인정'인 것 같았다.
어쩌면 게임에 늘 몰두하는 것도 게임 안에서 자신이 팀에 필요한 존재고 팀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확인받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편은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가사와 육아에 잘 참여하는 남편인지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화를 냈던 남편에게 유튜브에서 본 내용을 적용해서 말해본다.
"말 예쁘게 안 해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자기한테 뭐 부탁할 일 있으면 '미안한데 괜찮으면 아기 똥 좀 치워줄 수 있을까?'처럼 부탁하는 어조로 말하도록 할게. 그리고 자기가 뭐 해주는 거 당연하게 여긴 적 없어. 육아와 가사에 잘 참여해 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해. 어제 자기가 당근에서 사 온 아기그네도 복주가 오늘 얼마나 좋아하면서 잘 탔는지 몰라. 자기가 좋은 제품을 싸게 잘 사 와서 육아에 항상 잘 도움을 받고 있어. 고맙다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내가 못했네."
남편은 화가 누그러진다.
"오늘은 말 예쁘게 하네? 나도 미안해. 별것도 아닌 걸로 예민하게 화냈어."
남편이 누그러지며 나오자 이때다 싶어 내 감정도 얼른 토로해 본다.
"그래.. 좀 예민하긴 했어. 자기도 서운한 점 있어도 나한테 그렇게 갑자기 벌컥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기가 그렇게 화내면 상처 받게 돼. 좋은 말로 이렇게 저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러저러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라고만 해도 되는데, 비난조로 언성 높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앞으로는 안 그러게 노력할게. 너도 말 예쁘게 하도록 노력해 줬으면 좋겠어. 나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지."
그놈의 말 예쁘게 하라는 주문..
남편은 언제나 나의 사소한 말버릇을 지적했지만, 정작 자신은 내게 함부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심하게 굴 때가 많았다.
또 자존심 세고 방어적인 남편은 자신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해서 언제나 결론을 '너도 잘못했고 나도 ~~ 한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잘못했다'로 내고 싶어 했다.
그래도 처음 싸울 때 '너만 잘못했다'에서 변화한 태도라 오늘은 이 정도 변화에 만족해 보기로 한다.
그럭저럭 화해는 했는데.. 어째서 돌아선 나는 자꾸 눈물이 나고 외로운지 모르겠다.
남편과 육아를 하다 보면 견딜 수 없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아기를 더 잘 기르기 위해서, 부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외로움...
하지만 이런 생각을 너무 오래 하다 보면 우울하기만 하니까 마인드 컨트롤을 해본다.
"저 남자는 복주의 아빠가 아니다. 복주의 아빠는 따로 있고 저 남자는 룸메이트인데 나와 복주가 불쌍해서 같이 살면서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외간남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하나 도와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남편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듯이, 나 역시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겠지.
남편은 육아의 방법이나 부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먼저 사과하는 법이 없지만, 가사와 관련해서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먼저 챙기는 경우도 많았다. (쓰레기통이 찼을 때 쓰레기 비우기, 정수기 필터나 샤워기 필터가 더러워졌을 때 필터 교체하기, 건조기의 필터 청소하기, 음식물 쓰레기 치우기, 묵은 이불 빨래하기 등)
남편도 회사에서 고되게 일하고 돌아와서 육아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활력이 필요하고 인정에 목마른 것이다.
남편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칭찬해 주고, 남편이 우리 가정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확인시켜 줘야 남편도 더 힘을 내서 잘하겠지 싶다.
하지만.. 나의 고생에 대한 인정은 누가 해주나..?
외롭다.
나는 여태까지 남편에게 열심히 아기를 키워줘서 고맙다, 넌 정말 좋은 엄마다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육아가 힘들다고 말하면서 공감을 요구할 때면 남편은 "회사 갔다 와서 또 가사하고 육아하는 나는 더 힘들어."라고 냉랭하게 말할 뿐이었다.
육아일기를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남편이 내 생활을 더 자세하게 알고 공감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남편은 나의 육아일기를 브런치에서 구독하기는 했지만 거의 읽지 않았다. (남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글은 출산 당일날 막판 힘을 주었던 후기와 '남편의 육아참여'라는 글뿐이었다.)
남편아, 제발 내 말에 공감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아마 지금 이 글도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울한 마음을 던져 버리고 혼자 침대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따로 하기로 한다.
아들바보인 나는 아기가 밤잠에 들고나면 침대에 누워서 다시 그날 찍었던 사진과 동영상을 정주행 하면서 아기의 귀여운 웃음을 리플레이해서 보고 또 보며 미소 짓다가 자고는 한다.
아기가 꺄르르륵 웃는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우울하고 슬펐던 마음은 어느 순간 날아가고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우리 아들.. 엄마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집착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길 만큼 많이 사랑해.
나중에 네가 커서 성인이 되면 언젠가 곱게 키운 너를 독립시켜야 할 텐데, 그 독립이 엄마는 벌써부터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아서 최대한 늦게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단다..
이렇게 오늘도 고된 하루가 지나간다.
내일은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내일은 안 싸우기를.. 내일은 복주가 잘 자고 컨디션 좋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