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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Nov 15. 2022

빼빼로데이 호구

"엄마, 엄마! 나 지금 편의점가야 돼."

다급하게 외치며 현관을 뛰어 들어오는 초등 3학년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며칠전에 새로 생긴 집 앞 편의점에서 벌써 두 어 차례 아이쇼핑을 마치며 진상고객 명단에 올랐음직한 아들 녀석이 작정을 하고 편의점에 가겠단다.

" 사게?"

"빼빼로! 내일 빼빼로데이잖아. 엄마, 나 카드 줘."


아직 10살이지만 두 누나와 엄마, 아빠의 잔심부름으로 아파트 앞 상가에 슈퍼며 편의점에 단골 고객이 되어서 나보다 더 가게 사정이 빠삭한 녀석이라 카드를 달라는 도 거침이 없다.

안 되겠는 걸. 이 좌~이식. 경제 개념을 좀 챙겨 봐야겠다.

"가자. 엄마랑 같이 가. " 하고 나도 나섰다.

이 참에 새로 생긴 편의점에 사장이나 직원이나 누구라도 얼굴 도장을 찍으며 저 정신머리없이 동네를 싸돌아 다니는 이 꼴통 자식에게도 나름 멀쩡한? 부모가 있다는 것을 뵈주어야겠다.

(쓰고 보니 참 우끼는 말이긴 하다. '멀쩡한 부모'라니... 멀쩡한 부모가 무엇인가, 있기나 한 걸까? 또 멀쩡하지 않은 부모는 또 무어란 말인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어휘지만, 또 요즘 세상이 하도 이치에 맞지가 않으니, 멀쩡한 부모가 되려고 애를 쓰는 부모쯤으로 하자. )


엄마와, 정확히는 엄마의 지갑을 동반한 녀석은 호기롭게 앞장을 선다. 집 앞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동건이도 부른다.

"야~ 빼빼로 사러 가는데, 같이 가자. 너도 사줄께."

3년째 같은 반인 저 녀석도 만만찬은 개구쟁이라서 익히 이름은 들어왔다. 또, 요사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불량식품 꽤나 얻어 먹고 다니면서 '동건이가 사줬어.'하는 소리를 몇 번 들은 기억이 나기에 '그래, 너도 가자. ' 하고 셋이서 편의점으로 들어선다. (아이를 키우면서 상대방의 이유없는 호의도 편치가 않은 세상이다. 내가 그렇기에 나 또한 아들 친구 녀석의 부모가 불편해할 이유 없는 호의는 조심하는 편이라 잠시 망설였다. 세상이 이러하니 '멀쩡한 부모'가 되기란 참 쉽지가 않다.)


그래도 저녀석은 우리집 꼴통 녀석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슬슬 내 눈치를 본다. 수학쌤이라는 나의 직업적 카리스마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착한 표정으로 이미지변신을 하는 것을 보니 동건이라는 저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이 해맑기만 한 내 아들과는 또 다른 결이다.



엄마를 등 뒤에 세워 놓고 한껏 들뜬 어깨의 10세 소년은 커다란 대왕 빼빼로를 두 개 든다. 정확히는 3개를 들으려는 것을 '너무 많다.두 개만 해라'는 엄마의 조언을 받아 들였다. 그러고는

'낱개 빼빼로를 한 8개정도 할까?' 하는 녀석에게

"빼빼로를 몇 명의 친구에게 나눠 줄 꺼니?"하고 지극히 이성적이며 지적으로 묻는다.

"당연히 동건이랑 나랑 먹게. " 하는 녀석이 참 어이없다.

"그럼 2개씩 먹어도 적당하지 않을까? 그리고 음료수를 하나씩 먹든지." 한껏 온화로운 표정으로 적정 수량을 알려준다. 내 온화한 미소의 속내를 눈치 챈 개념있는 동건이가 아들 녀석에게 말한다.

"야, 나는 빼빼로 2개면 돼. 2개도 많지. "

그제서야 대왕 빼빼로 2개를 안고서 손도 모자르면서 낱개 빼빼로까지 쓸어담으려던 아들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서,

"그래? 그럼, 2개씩 가지고. 자, 이제 음료수 고르러 가자으~" 신이 나서 외친다.

이 흥을 깰까, 말까.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오랜만에 아들의 기를 세워 줘보자.


삐삑, 삐비빅. 바코드 찍는 소리가 우렁차다.

"카드 꼽으세요. 35700원 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알바생의 목소리에 아무생각없이 카드를 기계에 넣다가... 잠깐, 머라고? 빼빼로 몇 개에 요구르트 2개에 얼마라고?이게 맞나 싶다.

"예? 이거, 이 큰 빼빼로, 이게 얼마예요?" 확인은 해야지 싶다. 혹시나 알바생이 경험이 부족하여 계산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까.

"대왕 빼빼로는 12800원이구요. 누드 대왕은 13500원입니다. "

어쩐지. 가격표가 없드라.

"아~ 네. 영수증은 필요없구요. 봉투도 됐어요."

적잖이 놀랐지만 자연스러운 척 계산을 했다.


대왕 빼빼로에 낱개 빼빼로가 8개가 들어 있다. 다이소에 가면 빼빼로 하나에 천 원이면 살 수 있는데 그럼 이것의 정확한 가격은 8000원이다. 그렇다면,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포켓몬 그림을 하나씩 커다랗게 그려 놓은 종이 박스의 값이 5800원이라는 셈이다.

평소에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아들에게 나는 호구짓을 당했다. 

 자리에서 이것은 너무 합리적이지 못 하니 대왕 빼빼로는 냅두고 낱개 빼빼로를 사러 다이소로 가자고 했어야 했지만,

친구 앞에서 한껏 기분이 들뜬 아들에게 이성의 끈은 벌써 저 멀리에 가 있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대화를 다시 시도해보아야겠다.



"이 거 큰 빼빼로 이거는 누구 줄 꺼냐?"

"이서형이~"

"몇 개?"

"? 이거 큰 거 하나지."

"엥? 이 큰 거를 다?"

"응~ 당연하지."

아들은 단짝 친구들 중 한 명에게 대왕 빼빼로를 주기로 약속을 했단다.


"이렇게 큰 것을 서형이한테만 주면 준영이랑 성진이랑 남기랑... 다른 친구들은 어쩌냐? 안 주냐?"

"어. 어차피 내일 학교에 빼빼로 못 들고 가. 선생님이 절대 들고 오지 마래. 그냥 태권도 가서 주려고."

"그래도 다른 친구들은 섭섭할텐데, 그냥 이것을 까서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게 어때?"

그렇게 제안을 하고는 나는 일터로 떠났고 아들도 다시 놀이터로 뛰쳐 나갔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아들도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에 서둘러 저녁밥을 챙겨먹고 맥이고 앉으니,  문득 낮에 호구당한 대왕 빼빼로가 기억났다.

"대왕 빼빼로가 없네? 어쨌어?" 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어. 태권도에서 서형이 줬지. "

아~ 이 좌이식이 이럴 때는 동작도 빠르다. 잔소리가 폭풍처럼 밀고 올라왔지만 한 숨 참았다.

"서형이가 좋아하디?"

"어~ 엄청 좋아하고 고맙다고 지." 하며 흡족하게 웃는다.

"그럼 너도 빼빼로 받았어? "

"아니. 내일 주겠지. 내일 자기집에 오라는데?"


적당한 선물의 개념이 없고 눈치도 없는 아들녀석에게 살짝 역정을 내며,

"엄마는 가 그렇게 큰 빼빼로를 친구한테 받아 오면 좀 부담스러울 거 같은데, 친구한테 선물을 할 때도 적당히가 있는거야. 빼빼로데이가 머라고, 적당히 기분좋게 친구들과 과자를 나누어 먹는 거지. 한 친구만 그렇게 큰 거를 받으면 받지 못하는 친구는 보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

우선은 좋게 말해 본다.


그래도 만화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건성인 아들 녀석에게 내 인내심은 무너지고 더 단호해진다.

"서형이도 잠깐은 기분이 좋을 지 몰라도 분명히 부담스러워 할 꺼야. 지금은 괜히 받았다고 후회할 지도 몰라. 엄마말 듣고 있어? 생일도 아니고 특별한 날도 아닌데, 원치도 않는 과한 선물은 하는 게 아니라고. ? 그러다가 너 진짜 호구돼! 이자식아~"

이런 극단적인 표현까지는 쓰지않으려고 했는데, 이러지 않으면 인풋이 안 되는 자극 수준의 아들녀석이다. 휴~


대충 내막을 옆에서 듣고 있던 누나들까지 한마디씩 거든다.

"호구 맞지. 그건 완전 호구지."

"야! 따녀기! 너 밖에서 호구짓하고 다니는 거야?

저래 큰 거를 주고 너는 받지도 못 했다고? 호구맞네. " 이럴 때, 누나들의 쿵짝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그제서야 만화에서 눈길을 거둔 아들이 격하게 반응한다.

"나 호구아니거든. 우리 엄청 친한 사이라고!"


이 누나들은 무슨 날이 돌아오면 서로 명단까지 만들어 가며 정확하게 'give&take'를 한다.

생각치도 못한 친구에게 선물을 받고 당황하며 다음날 준비해 가곤 했다. 그런 딸들도 정이 없어 보이고 저렇게까지 치밀해야 하는지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아들 녀석도 이 험난한 세상에 참 걱정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친하니까 하는 얘기야.

니가 대왕 빼빼로를 주든 안주든 서형이는 너랑 친한 친구야. 맞지? 그게 중요하다고." 아들 녀석에게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는 잔소리를 늘어 놓는다.

"만약에 너가 맨날 싸우는 서빈이가 너한테 갑자기 대왕 빼빼로를 준다그러면 갑자기 너가 그애랑 베프가 될꺼야?"

"아니. 기분은 좋겠지만. 나는 걔가 자꼬 시비를 걸어서 싫어. "

"그럼 서형이가 너한테 빼빼로를 안 주면 너는 절교할꺼야?"

"그건 더 아니지. 그런거 안 줘도 나는 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꺼야."

"그래, 그거야. 큰 선물을 하든 안하든 친구는 친구야. 그런 선물로 친구를 삼으려고 하다 보호구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진짜 친구사이에는 과한 선물보다 서로 배려하고 같이 사이좋게 재밌게 놀고 그런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알았어?"

내 말이 길어질수록 건성건성으로 영혼없는 대답을 하는 아들이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리라 나는 꼭 믿는다. 믿고 싶다.

"물론, 친구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니 맘도 알고 선물을 줄 때의 기쁨도 알게 되어서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좀 과했어. 여기서 더하면 진짜 호구가 될지도 몰라."

너란 녀석은 정말 중간이 없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가만보니 너만이 아니구나.

오늘은 너도 나도 호구가 된 날이다.

아니지. 호구가 될 뻔한 날이라 하자.

이렇게 하나씩 배워 나가너는, 아니 우리는 호구가 아니라 내 일상의 진짜 주인이 되어 있을 거야.

배움이 부족한 아들아.

같이 배워가자.

 

내가 과연 호구가 될 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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