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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람 May 04. 2023

30대가 되어도 철이 없다

아이고 인간아

2023년 5월 3일

인터넷 서핑을 조금만 하다가 일기를 쓰려고 했는데 벌써 2시가 되었다. 정신이 몽롱하니 빠르고 짧게 일기를 쓰고 잠에 들어야겠다. 


나는 아직까지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다. 솔직히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부모님이 독립을 부추길 때면 '집에서 사는 게 꿀인데 내가 왜 나감~'하고 말해왔다. 그런데 오늘 부끄러운 일이 있다 보니 왜 부모님이 내게 독립을 권유했는지 알 것 같다. 


자세하게 말하기는 구구절절해서 생략하지만 결국 나의 미숙한 정신상태의 문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약간 자격지심이 있는 편이었는데 나의 태생적인 성향과 환경의 콜라보로 지금까지도 그렇다. 밖에 나가서 내 속을 드러내면 찌질이 인증만 하는 것이니 밖에서는 최대한 그 모습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숨길 수 없어서 그런 나쁜 모습들이 때때로 새어 나오곤 한다. 문제는 밖에선 나름 참고 있던 거라고, 집에서는 빗장이 풀려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생각하던 우리 엄마는 되게 엄한 사람이었다. 내가 첫째였으니 엄마도 엄마가 된 것이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익숙지 않은 상황이니 당황스러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맞벌이기도 했는데 집안일도 전적으로 엄마가 했기 때문에 얼마나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을지. 나도 자식으로 태어난 게 처음이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서로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생이던 내게 무섭고 엄격한 부모님이었던 우리 엄마가 동생에게는 왜 이렇게 유하게 보였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가 나라는 첫 아이와 겪은 시행착오를 동생 때에는 답습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지만 당시에는 그 모습에 내게 굉장히 충격이었다. 내가 딸이고 첫 아이였기 때문에 더 엄했고 더 과잉보호하기도 했던 우리 엄마. 왠지 내게는 더 자유로워 보였던 초등학생 시절의 남동생.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이면, 은근하게 느껴졌던 은근한 조부모님의 남동생 선호.(물론 나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전혀 직접적이지 않았고 당시 내게는 은근하게 느껴졌던 어떤 것들이 어린 내게 뿌리내려 나는 뒤틀린 열등감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 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란 내 말에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네가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이지.'라는 말을 들었는데, 들은 당시에는 욱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곱씹어보니 그 말이 딱이다. 


엄마가 내게 해준 그 모든 좋은 것들. 내가 흔들릴 때면 단단히 붇잡아주고 용기가 없을 때면 등을 떠밀어줬던 그 모든 것들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지치기를 할 시기가 지나 제멋대로 자라 버린 나무처럼. 내가 깜빡 잊었던 사이에 지지대를 꽂을 시간이 지나 휘어진 채 자라 버린 어린 시절의 방울토마토처럼. 몸을 불리며 나와 함께 자라 버린 뒤틀린 열등감은 그 모든 좋은 것들은 '정보'로 나쁜 것들은 '감정'으로 기억해 버린다. 감정은 언제나 이성보다 더 강렬하기에, 엄마와 다툴 때면 어릴 적부터 쌓아온 일방적인 울분이 툭툭 튀어나와 엄마를 다치게 한다. 팩트폭행도 폭행이라고. 다른 사람 입에 서면 몰라도 엄마의 입에서 '그거 네 자격지심 아니야?'라는 뉘앙스가 풍기는 말만 나오면 정말 감정이 폭발해 버린다. 진짜 파국이다. 


그나마 나이가 들며 조금이라도 나아진 점이라면, 가족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일까? 이십 대 때의 내가 '내가 분명히 겪었고 그래서 생긴 감정이다. 그러니 나의 이 감정을 옳다'란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 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세월의 흐름을 타고 증폭된 감정이다'까지 진행되곤 하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일 밖에 보지 못한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배가 불러 배 터지는 소리만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동생은 고등학생 시절 자유로웠던 나와는 부모님이 부모님이 자신을 구속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내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심지어 입시 루트가 예체능 쪽이라 부모님이 도울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지만 동생의 입장에서 그런 건 볼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동생이 말하지 않았다면 동생의 입장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나를 이렇게 키운(?) 과거의 씨앗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그저 내 피해망상일 뿐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같은 환경을 가지고 똑같은 선에 서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듯이 사람들은 가끔 부당한 일을 겪는다. 환경에 따라 그걸 더 많이 겪는 사람도 있고, 더 적게 겪는 사람도 있다. 개인을 둘러싼 환경도 있고, 집단으로서 겪게 되는 환경도 있기에 같은 집에서 자라도 정확히 같은 환경이라곤 볼 수 없다. 100명이 있다면 100명의 환경이 다 다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환경만을 명확히 볼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의 환경을 똑같이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사람의 환경을 볼 수 없으니 내 환경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행운이고 또는 불행인지 판단할 수도 없다. 결국 공정하니 부당하니 말하는 모든 것의 디폴트는 내가 겪은 바로 그 환경이고, 타인이 겪은 부당함을 내가 겪은 것처럼 느끼는 건 불가능하니 내가 받은 상처만이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고 타인의 상처는 일개 정보로 습득된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감정은 정보보다 강렬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남의 커다란 상처가 나의 손가락 베임만 못하다. 부모님이 객관적으로 훌륭한 부모군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최선을 다해 나를 양육했다고 생각하는 나조차 부모님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일로 가끔씩 울분을 쏟아낸다. 부모님은 어리둥절해 하지만 그건 내 화를 돋울 뿐이다.


비이성적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가 거품처럼 빠져나가면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 밀려온다. 그럴 때면 '타인의 상황에 공감해 보려고' 노력해 본다. 잘 안된다. 특히 가족. 애와 증이 양념으로 뿌려지고, 한 지붕 한 가족이라 나랑 비빔밥처럼 섞인 이 존재들을 마주할 때면 그게 더 안된다. 어쩔 때는 생판 남보다 가족과의 관계가 더 복잡하다. 타인의 상처는 나와 무관하지만 가족에서의 상처는 서로 물고 뜯었거나 본의 아니게 내가 가진 무언가가 가족 구성원의 몸을 푹 찔렀거나, 아니면 가족 구성원이 가진 무언가가 또 본의 아니게 내 몸을 푹 찌른 상관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손가락 베인 게 너무 아픈' 인간인데 내 손가락을 벤 사람과의 관계가 쉬울 리 없다.


좋으면서 싫은 이 긴밀한 구성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게 어쩌면 어른이 되는 첫걸음은 아닐까? 나이만 먹은 헛어른으로서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너무 어렵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찾은 방법은 약간은 역설적인 면이 있다.


사람마다 맞는 방법이 있겠지만 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이 입은 부상이 아무리 심각하여도 사람은 모두 제 상처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타인의 상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원래 인간은 자기 상처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걸 내 경험에 비춰 납득하는 것이다. 물론 일부러 타인의 상처를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러 그런 짓거리를 하는 특히나 자기중심적인 사람과는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겠지만 아주 평범한 사람도 자기 방어로 타인의 상처를 과소평가할 때가 있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만약 어떤 사람이 '네가 날 아프게 찔렀어'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어? 아닌데?' 하고 내 결백을 증명하려 '내가 언제 푹 찔렀냐, 페이퍼 나이프로 체조를 하고 있었는데 네가 지나가다 손가락이 베인 거다!'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확률이 있다.


타인의 상처가 얼마나 아플지에 대해 우리는 짐작밖에 할 수 없다. 내가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상처뿐이다. 그러니 내가 이만큼이나 다쳤는데 타인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 타인의 상처를 그렇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끝나면 타인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고 내 상처만 중요한 소시오패스 같은 사람, 타인과 교류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가 전부인 사람이 될 것이기에 한 단계가 더 필요하다. '타인의 상처를 심각하게 여기는 건 힘들 일이다'라는 걸 인식하고 그 힘든 것을 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 훈련을 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내 상처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남을 봐야 한다. 엄청나게 힘들다. 하지만 그 '남'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관계를 계속하고 싶다면 반드시 남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아무런 사심 없이 그냥, 내가 내 상처가 아픈 만큼 저 사람도 저 사람의 상처가 아프구나 하는 마음으로.


원래 오늘의 일기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나를 포함해서 본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독립한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미숙한 것 같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나만의 뇌피셜이었는데 의식의 흐름으로 또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가족과 잘 지내고 싶다. 그런데 왜 내 감정을 무기처럼 쥐고 휘둘러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상처 입히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울분이 들 때면 내게 속으로 되뇌어야겠다. '네 감정은 사실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며 증폭되었다. 나의 울분, 슬픔을 과소평가하는 듯한 태도는 자기 방어일 수 있다.' 그렇게 되뇌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삼십 대가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겪어 보니 나는 아직도 멀었다. 아이고 인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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