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궂은 장난꾸러기, 도깨비
제가 어렸을 적 도깨비 하면 <은비까비의 옛날옛적에> 속 '까비'를 떠올렸습니다. 머리엔 뿔이 있고 뾰족한 귀에 선사시대 사람과 같은 복장을 한 어린아이의 모습.
한국의 민속에 대한 이런저런 공부를 한 지금, 저에게 이것이 한국의 도깨비냐고 하면 제 대답은 '아니요'. 그보다는 여러분들이 <파묘>에서 본 오니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나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귀신, 이물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이 변했습니다. '까비' 또한 그 결과인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에게 '도깨비'를 떠올려 보라 말씀드리면 아마 까비가 아닌 다른 존재가 떠오를 겁니다. 찬란한 그, '공유'.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한 神 도깨비>로 전 국민이 다시 한번 도깨비에 친숙해졌지요. 그러나 이 드라마의 도깨비는 도깨비인가?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가 도깨비였던가? 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젓습니다.
옛날이야기 속 도깨비에게는 '짓궂다'는 표현이 딱입니다.
어두운 밤 한 남자가 비척비척 집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앞에서 수상한 검은 물체가 다가옵니다.
수상한 검은 물체, 도깨비는 사람에게 계속 말합니다.
나랑 씨름합시다. 네? 응? 제발?
사람은 도깨비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끝끝내 수락합니다. 그런데 밤은 늦었고 도깨비와의 씨름은 도무지 승부가 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씨름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래서 이야기 속 사람은 종종 도깨비를 때려 쓰러뜨리고 도망을 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사람이 아닌 존재와 씨름을 하는 게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귀신을 본다고 생각만 해도 두려운데, 그런 존재와 살을 맞대고 귓가에서 숨소리가 뿜어져 나오고. 어쩐지 소름이 돋을 것만 같습니다. 또 도깨비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상상만으로도 긴장하는 저와 달리 이야기 속 사람은 용감하고 똑똑합니다. 도깨비가 하는 말을 듣고 "아 이 녀석! 다리가 하나뿐이구나!"를 깨닫고 다리를 걸어 쓰러뜨리기도 하거든요. 두려움을 뚫고 상대를 파악하고 제압하는 용기!
옛날이야기에서 씨름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사람이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다는 점이에요. 왜냐고요?
중요한 건 바로 다음 날 아침이니까요.
전날 밤 도깨비와 씨름을 했던 그 사람은 꼭, 도깨비를 만난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곳엔 도깨비가 있었을까요?
그곳엔 아무것도 없기도 하고, 피가 묻는 빗자루와 같은 물건이 놓여 있기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건에 피가 묻으면 그것이 도깨비로 변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도깨비는 빛을 싫어하고, 빛 앞에선 무력합니다. 그래서 도깨비를 만나는 것은 늘 밤이고, 도깨비는 낮엔 사라지거나 빗자루 따위로 변해버려요.
흥미로운 것은 도깨비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는 마냥 ’허구‘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상상해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경험담‘이라는 거예요. 시쳇말로 하자면 ”도깨비랑 씨름한 썰 푼다. “같은 거죠.
“우리 오빠 친구가 한번 술을 먹고 밤늦게 길을 걷고 있었어”와 같은 말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1980년대에 한국의 옛날이야기를 수집할 때만 해도 도깨비에 관한 경험담이 심심치 않게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도깨비를 본 적 있나요?
도깨비를 봤다는 사람을 만난 적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왜냐면 지금 우리들의 밤은 너무 밝거든요.
이능화가 쓴 <조선무속고>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서울에 전등을 밝히고 나서부터 이른바 도깨비라는 것이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둡고 음지를 좋아하는 귀신이 광명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전 서울의 밤하늘을 볼 때면 불빛들에 별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별뿐만은 아니었던 거죠. 짓궂은 도깨비는 영영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과 씨름을 할 때의 냄새, 촉감과 같은 감각은 영원히 상상만 해야겠지요.
사라져 버린 도깨비는 여전히 밤이 밤답게 어두운 곳에서 짓궂을까요? 아니면 이 땅에 더 이상 충분히 어두운 곳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