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가 박사과정 중에 제일 힘들었던 시기? 망설임 없이 졸업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하던 때라고 꼽을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졸업논문의 주제를 정하던 2021년 가을학기다.
학문 분야마다 분위기가 다르니 설명을 조금 더 덧붙이자면, 내 지도교수님은 본인의 프로젝트에서 일부를 떼어 졸업논문을 쓰는 것을 반대하셨다. (실험이 많은 이공계에서는 이런 일이 흔한 것 같기도 하다.) 교수님은 연구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스스로 다 겪어보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졸업논문 주제의 자유도가 엄청 컸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했다.
수학교육이 전공이니, 내가 학생으로 했던 경험들 그리고 내가 강사로서, 조교로서 했던 경험들을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내가 해결하지 못했던 의문 그리고 불편함들이 생각났다.
‘영어를 외국어로 사용하는 학생들.’
나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여러 의문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우리 학교는 중국인 학생들이 많았다. 수업시간에 중국인 학생들이 중국어를 사용해 소통하는 경우도 있었고, 학교 내부의 튜터링센터에서 그 학생들이 중국인 튜터만을 찾고 중국어로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물어봤을 때 학교 측에서는 그 학생들에게 영어를 사용하게 지도하라고 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위화감이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이유였다. 그 기저에는 ‘영어로 공부하려고 이 학교에 왔으면, 그 언어를 사용해야지. 나중에 여기서 일할 거면 영어로 소통하는 법도 알아야지’이런 생각도 있었을 거다. 그런 관점도 이해는 하지만 나는 혼란스러웠다. ‘수학’을 배우는 게 목적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심지어 더 잘할 수 있는 언어를 두고 영어만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은 페널티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점점 더 모둠활동을 많이 시키는 추세에서 언어적인 이유로 학생들 사이에 위계가 생기기도 했다.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 속에 혼자 영어가 외국어인 학생이 섞이면 그 학생이 위축되고 참여를 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학생 한 명이
“같은 조 친구들이 내가 말했었는데도 못 알아듣더니,
원어민 학생이 말하니까 바로 알아듣더라고요.
그 뒤로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내가 기다리면 어차피 다른 애들이 말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라고 본인의 서럽고 지친 감정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게 본인의 부족한 영어 탓이라고 했다.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어서 그날 한참을 울었다. 내가 수학 수업에서, 수학 교육 토론 수업들에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걸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지?’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다른 말들이 더 오가고, 그러면 내 머릿속은 그 말들을 해석하느라 내가 할 말을 잊고 타이밍을 놓쳤다. 그러다 보면 ‘미국에서는 말없이 앉아있으면 바보라고 생각한다던데.’라는 말이 떠올라 초조하지만 내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영어를 못하는 나를 탓하는 그 마음. 그 학생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속상했다.
그 학생의 경험과 나의 경험처럼, 영어라는 외국어로 수학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그 학생들의 힘든 경험과 마음이 오롯이 그 아이들의 영어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그 학생들의 목소리를 학계에 그리고 사회에 들려줘야 하고,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위, 미국에서 당시 트렌디했던 “equity” 관련 연구 주제가 자꾸 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 토픽을 하는 게 두려웠다.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내 성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학생들이 수학을 어떻게 공부하고 이해하나, 어떻게 증명하나 이런 조금 더 중립적인 문제를 보는 연구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커리큘럼도 그렇게 짜서 공부를 했었다.
무엇보다, 수학교육의 문제에서 ‘아시안’이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equity”문제라 하면 전통적인 소수인 흑인과 라틴계 이야기를 많이 한다. People of Color라는 용어로 요새는 소수들을 일컫지만, 여기에 아시안, 그것도 동아시안이 포함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더더구나, 수학에서는 워낙 “아시안은 수학을 잘해”라는 편견이 만연하고, “model minority”라는 인식 때문에 마이너리티로 사람들이 인식을 못하기도 한다.
아는 한국인 선생님도 미국에서 현장 경험을 토대로 흑인과 라틴계에 관한 equity관련한 연구를 하려고 하시다가 ‘그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결론으로 연구주제를 다른 쪽으로 바꾸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내가 ‘이 주제를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내가 이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정말 이 학생들의 어려움이 영어 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까?’
‘내가 그렇게 사람들이 해석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역량이 내게 있을까?’
누군가 내가 연구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보고 ‘이건 걔네가 영어가 부족하니까 그런 거지.’ ‘Just language barrier’ ‘이게 왜 특별한데? 이게 왜 문제인데?’ 이렇게 말하면, 내게도 상처가 될 것 같았고 나를 믿고 본인의 생각과 경험을 어렵게 나누어줄 예비 연구 참가자들에게도 미안할 것 같았다. 이런 고민으로 내 마음이 이 주제를 향하고 있음에도 고민했다. 다른 주제를 할까, 좀 더 사회적으로 예민하지 않을 그런 문제없을까.
고민이 길어지던 때 커미티 중에 한 분인, Jack교수님과 대화를 했다.
내 고민을 가만히 들으시고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지혜야, 너는 네가 하는 최선을 다하는 거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예상할 수가 없어. 그 사람의 경험이 다르고 너의 경험이 다른데, 네가 아무리 예측을 하고 방어를 하려고 해도 그건 네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야. 그런 걱정으로 너의 마음이 가는 주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20년 넘게 학계에 계셨던 본인의 논문 중에 가장 유명하고 인용이 많이 된 논문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그 논문을 교수님이 생각하던 대로 바라던 대로 해석하고 인용하지 않는다는 경험을 덧붙여 이야기해 주셨다. 세상에 내어놓으면 이제 그 연구는 내 손을 떠난 거고,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맞다.
다른 사람의 해석과 마음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사람과 내가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쌓아온 경험이 다르다. 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렌즈는 그 사람이 쌓아온 경험들을 토대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글의 독자가 될 사람들이 어떤 렌즈를 가지고 있을지 내가 알 수는 없다. 그들의 렌즈를 내가 갑자기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내 글이 또 하나의 간접경험이 되어 그 사람들의 렌즈에 작은 흔적이라도 내길 바랐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내 욕심이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 같았다.
이 대화 후에도 나는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결국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졸업논문을 썼다. 그 뒤로 학술지에 한 번 제출했었는데, 내가 우려하던 리뷰 하나와 함께 리젝이 날아왔다. 그게 내 논문 디펜스 전 날이었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또 생각보단 괜찮았다. 좀 더 보강해서 다른 데 내면 되지 뭐. 어차피 리뷰는 복불복이니까.
Jack 교수님이 해준 말씀은 졸업논문을 정하던 나의 고민뿐만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취하는 자세들에 대한 조언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반응할까 지레짐작으로 걱정과 불안에 갇힐 때가 있었다. 심지어 내가 걱정하는 반응이 실제로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나타나더라도 내게 사실 큰 타격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만족하는 것, 내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 남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게 중요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의 기준이자 동기라서 나는 더 불안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책임질 내 삶인데, 실체도 분명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반응이 우리의 삶의 조종석에 앉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