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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Nov 22. 2024

작은 것들도 축하하기

노력과 결과

길지 않은 인생동안, 늘 하나의 과제를 끝내면 또 다른 과제가 눈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수행평가가 있고, 그다음엔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교를 지나면서는 모의고사가 더해지고 수능이 기다렸다. 수능을 전후로는 수시, 정시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고, 모든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일들을 하나씩 해내며 살았다.


미국에 와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사과정에선 Qualifying exam이나 practicum을 통과하고 나면 comprehensive exam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것을 마치자마자 Dissertation proposal을 준비해야 했다. Dissertation proposal을 통과하면 Job market 준비와 Dissertation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이런 큰 과제들 외에도 학회 발표와 논문 준비 같은 작은 과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하나의 과제를 끝내고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다음 과제가 눈앞에 쿵!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하나를 마치자마자 다음 과제를 걱정했다. 때로는 진행 중인 과제도 끝내지 못한 채 다음 과제를 미리 걱정하곤 했다. 결과를 얻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에 오니 주변 사람들이 작은 성취에도 서로를 축하해주는 모습이 새로웠다. 첫 학회 포스터 발표를 준비했을 때도, 첫 학회에 다녀왔을 때도 축하를 받았다. 나는 '이런 것까지 축하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그러한 일들을 사소하게 여겼다.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에, 축하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잘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축하를 받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다.매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Thank you"를 건네며 지냈다.


어느 날, 친한 친구인 발렌틴이 물었다. 그날은 내가 comprehensive exam 1차 제출본을 제출한 날이었다.

"How are you gonna celebrate today?"


글쎄다. 그냥 인사를 적당히 넘기려 했는데 뜻밖의 질문이었다. 아직 시험 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합격 여부도 모르는데 뭘 축하하나 싶었다. 게다가 앞으로 2차, 3차도 남아있었다.


"뭘 celebrate까지 해~
아직 시험 과정이 한참 남았고,
통과할지 안할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라고 내가 말하자, 발렌틴이 이렇게 답했다.

"Ok, even though we don't know if your paper will get passed, you have put so much effort into the paper. No matter what the result is, you finished and submitted the work. That is worth to celebrate!"
그래, 우리가 네 페이퍼가 통과될지 아닐지 모른다고 해도, 너는 엄청 많은 열정과 노력을 그 페이퍼에 쏟아부었어. 결과가 어떠하든, 너는 그 일을 해냈고, 제출했어. 그걸로도 충분히 축하할만해.


그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여태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었구나.'


결과가 어떻든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하고 기념할 만한 일이라는 걸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교육학 수업에서, 이런저런 방송에서, 그렇게 ‘결과만 중요한 게 아니다, 과정도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잘 한 것 말고 열심히 한 것을 칭찬해줘야한다.’라고 들어놓고선, 정작 내게는 그런 조언을 하나도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친구들과 교수님들이 많아 내가 축하하는 것을 까먹더라도 옆에서 자꾸 축하를 해주니 나도 ‘아, 이게 축하할 일이지!’라고 내게 자주 일깨워주게 됐다. (그러다보니, Comps를 보는 동안에만 친구들하고 축하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제출하고 축하하고, 결과 나왔다고 축하하고, 다음 단계 하고 또 축하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보면 해야할 일들에 압도당하는 느낌도 들고, 막막해지는 느낌도 들기 쉽다. 게다가 할 일이 끝없는 것 같아 기분이 다운되는 일도 생기는데, 주변에서 계속 이렇게 ‘축하해! 같이 축하하자!’이렇게 말하니 기운이 났다.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케이크나 파이, 쿠키를 구워 나누어 먹고. 그렇게 소소하게 축하하는 시간들이 박사과정의 여러 마일스톤을 뚫고 지나는 데 힘이 됐다.


그리고, 나도 주변 사람들의 노력을 축하를 해주기 시작했다. 내 동기들이 후배들이 비슷한 시기를 거칠 때, 결과가 나오기 전에 같이 축하해줬다. 그 전까지는, 나는 ‘고생했어. 잘 쉬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꼭꼭 씹어보니 ‘축하해’는 '고생했어, 쉬어'랑은 느낌이 좀 달랐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지는 모르겠지만 잘 쉬라고 하는 말은 어쩐지 결과를 기다려보자, 라는 의미가 더 있다고 느껴진다면, 축하는 내가 한 노력을 오롯이 인정해주는 느낌이 더 들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축하를 종용했다. 온전히 그들의 노력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사실 내 축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보다 남들의 노력을 축하하는 일이 훨씬 쉬웠다. 왜 그럴까? 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일은 내가 어느 정도의 노력을 쏟았는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스스로 ‘아, 더 할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이 드는 날도 있고, 가끔은 내가 만들어 둔 결과물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나 혼자 내가 축하받을, 축하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마음 속 깊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노력을 축하한다고 축하받는다고 무슨 손해가 생기나? ’


아무 일도, 누구에게도 어떤 손해도 발생하지 않는다. 혹시 내 노력이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걸로, You deserve it.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 미련이 남을 수 있지만, 그건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그 때에 미련이 덜 남게 더 노력하면 되는 일이다. 내가 가졌던 그런 의문을 품을 시간에, 하나의 일을 끝냈다는 기쁜 마음으로 소소한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끝이 없이 미션들이 있는 마라톤인 대학원 생활에선 더 좋지 않을까?


내 우리의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소진되지 않도록, 그 에너지를 다시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축하는 그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친구와의 산책, 소중한 사람들과 케이크 한 조각, 커피 한 잔도 충분한 축하가 된다. 심지어 ‘축하해’라는 말에도 에너지가 있고, 내가 나에게 하는 축하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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