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연결고리: 아픔이 가르쳐준 것들
가을 낮, 온도가 22도인데 얇은 모직 코트를 입었는데도 한겨울처럼 달달 떨렸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3시간이 채 가지 않고 다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응급실에 한 번 다녀왔는데도 다시 열이 올라서 응급실에 다시 갔다. 응급실 밖에서 열을 재더니 간호사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열이 39.7도라고 알려주셨다. 바로 엑스레이와 CT를 찍으러 가라고 하셨고, 그 길로 입원을 하게 됐다. 이게 벌써 아득한 일요일의 일인데, 나는 그 후로 금요일인 오늘까지 병원에 붙잡혀있다. 오늘 퇴원하고 이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안 되겠다고 주말 지나고 가라고 하셨다.
하루 꼬박을 38도가 넘는 열과 함께 보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 제일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다.
이렇게 아팠던 게 미국이라면? 한국에 있어서 다행이다.
운이 좋게도 마지막 교통사고를 제외하고는 나는 미국에서 크게 아픈 적이 없다. 아프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세뇌시켰던 거 같기도 하고.
처음 미국에 간 가을, 사는 곳이 바뀌었기도 하고 아마 유행하는 바이러스가 달랐었기 때문인지 감기에 된통 걸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국에서 감기 걸렸다고 병원 가봤자 비타민 먹으라고 했을 거 같긴 하지만, 그때 열이 나는 거 같긴 한데 잘 되지도 않는 영어에, 이해도 제대로 하지 못한 미국 의료 시스템이 다 너무 머리가 아파서 그저 집에서 버텼다. 그러다가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듣고 상비약을 나눠주셔서 그 약을 먹고 살아난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최대한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코로나 유행기간에는 정말 많이 몸을 사렸다. 증상이 심각하고 치사율이 높던 초반에는 정말 무서웠다. 혼자 살던 내가 아프면 나를 간호해 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상황이 나빠져 무슨 일이 생겨도 정말 아무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늘 긴장을 하고 살았던 거 같다. 낯선 땅에서 나를 지키고 챙길 수 있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나의 보호자여야 했다. (그래서 여러모로 나는 좀 뾰족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내게 잘해주었던 주변 분들에게 새삼 또 감사하다.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알던 지인들이 한국에서의 나는 가시가 걷어지고 목소리부터 생기가 다르다고 했다.)
해외에 혼자 처음 나가는 분들 중에 이 글이 닿은 분들이 있다면, 아플 때는 특히 가족이나 친구가 더더욱 카톡이나 전화 등으로라도 나를 자주자주 체크해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놓길 권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좋은 거 같다. 인생 정말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미국 약이 더 좋다는 이유로 상비약을 처음에 하나도 안 들고 가는 분들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적어도 본인이 그곳 약을 좀 알게 될 때까지는 급할 때 먹는 내게 잘 듣는 약들을 가져가는 게 중요하고 생각하게 됐다.
여튼, 미국 생활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느낀 건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한다는 거다. 몸도 마음도.
‘쉬는 것도 용기다’라고 썼던 전 글과 다르게 나는 이번에 그 말을 잘 지키지 못했다. 일을 안 하고 있으니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조부 상을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그걸 내가 잘 돌보아주지 못했다. 추석 때 할아버지를 뵙고 왔을 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느껴서 긴장상태로 일상을 지냈다. 결국은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시게 되셨고,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는 과정에서 소진되었던 나의 체력과 감정들을 채 추스르지 못한 채로 몸살 약들을 먹어가며 미뤄둔 일정들을 수행하다가 결국 탈이 난 거라고 생각한다. 의사 선생님마저 이 걸로 이렇게 길게 아픈 게 의아하다고 느낄 정도로 면역력이 떨어져 버렸던 거다.
의사 선생님한테 2주 전에 상이 있었다고 그랬더니,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반응을 해주셨다. 몇 주 전에도 그런 분이 있으셨다고. 그런 걸 보면 몸과 마음은 정말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나 싶다. 마음이 아플 때, 몸도 아파지기 쉽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우울해지고 쳐지기 쉽다. 어쩌면 악순환일 수도 있는 사이클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끊어내는 방법도 앞의 저 사이클에 있다. 몸이 좋아하는 걸 해주게 하거나, 아니면 마음이 행복해질 일을 하거나.
내가 힘들어할 때 지도교수님이 해준 말이 있다.
Do something that you enjoy. When you are depressed or feeling down, you might not enjoy even the things that you used to like. However, try once, twice, and so on. Then, you will start enjoying it again, and your mind will come along eventually.
좋아하는 일을 해봐. 네가 우울할 때, 기분이 좀 처질 때는 평소에 즐겨하던 취미들조차 원래만큼 즐겁지 않을 거야. 하지만, 한 번, 두 번 해봐. 그러면 다시 그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하고, 너의 마음도 결국 따라오기 시작할 거야.
덧붙여서 교수님은 “너 내가 요리하는 거 좋아하는 거 알지? 우울할 땐 나도 요리조차 재미가 없어. 그래도 꾹 참고 몇 번을 하다 보면 내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껴. 좋아하는 걸 해봐.”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게 이번에 필요했던 것은 휴식이었던 거 같지만, 때때로 나의 취미가 나의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힘들 때는 좋아하는 오일파스텔을 들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들어보곤 한다. 내가 그렇게 나를 놓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을 만들어 둔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챙기는 방법을 조금씩 배운다.
(물론,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 땐 병원에 가야한다. 이건 예방법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