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닫아버리진 말자
참 슬프게도, 해외에 나간다고 할 때 초반에 듣는 말 중 하나가 ‘해외에 있는 한국인이 제일 무섭대. 조심해’라는 말이었다. 요새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서 스쳐 지나가는 말을 보면 여전히 어느 정도 전해지는 말 같다. 씁쓸하게도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어느 정도 조심하는 게 좋은 것 같긴 하다. 전 세계 사람들을 여섯 다리 건너면 다 안다는데, 그 좁은 한인 사회에서는 두세 다리만 건너도 (내가 있던 곳은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경험상 말이 쉽게 돌고, 나쁜 소문은 더 빨리 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이상하게 와전되어 나는 소문도 생기고,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갓 유학 나가는 혹은 유학을 나온 대학원생들이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이런 소문이 아니더라도 영어를 늘리기 위해 최대한 한인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본다. 개인적인 선택이고 선호의 문제이니 무엇이 옳다 틀리다의 영역은 아니지만, 나는 좋은 한인들을 만날 가능성을 너무 꾹 닫아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인 사회도 결국 작은 사회라, 그냥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들이 해외의 그 한인 사회에도 존재한다. 좋은 분들도 있고, 이상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비율이 좀 다르다. 커뮤니티가 작아서 그런지, 좋은 분들의 비율도 이상한 사람의 비율도 높다. 대도시가 아니라면 서로 너무 많은 시간과 동선을 공유하게 되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이 차마 본인을 다 숨기지 못하고 발견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일 년에 몇 번 밥 먹고 카페에서 2-3시간 수다 떠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밀도 높은 교류를 하게 되는 거 같다.
내가 있었던 중서부의 중소도시는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8시-9시면 식당들이 다 닫기 시작했다. 늦게까지 하는 술집조차 많지 않았거니와, 대부분 펀딩에 의존해서 사는 대학원생들에게 외식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중에 포닥을 가게 된 곳은 꽤나 큰 도시였지만 그래도 밤에는 갈 곳이 인 앤 아웃이라고 했다. 그렇게 갈 곳이 없는 우리 대학원생들은 누군가의 집을 아지트 삼아 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원생이 아니더라도 내가 겪은 미국은 서로의 집에 초대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게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는 일이다. 그 사람의 취향과 삶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만나는 것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가 된다고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라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되기도 하고, 눈치를 보지 않고 모임 자리가 길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이십여 년 동안 쌓아온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는 한국과는 다르게, 만나는 사람들이 훨씬 한정적이게 된다. 같은 사람들을 보고 또 보고,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초반에는 커뮤니티의 성격을 좀 파악해 보는 것도 좋은 자세다.)
나는 내 박사과정 유학생활 동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의 9할은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게도 한인들 중에서도 좋은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위에 쓴 것처럼 오다가다 만나서 스몰톡을 하고, 힘들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도와주면서 살다 보니 친한 사람들끼리 정말 똘똘 뭉쳐서 지냈다. 멀리 사는 사촌보다 이웃이 낫다는 말을 정말 체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도와주지 못하는 순간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함께 해주지 못하는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 생기는 유대감이 아직도 특별하게 남아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간 첫 해 가을, 평소에는 심하게 걸리지 않던 감기가 된통 왔다. (환경이 달라지고 감기 바이러스가 다른 종류가 있기 때문에 첫 해가 제일 아프기 쉽다고 한다.) 미국에 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이라 약도 잘 몰랐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때, 아는 언니네 부부가 가져다준 판콜 S와 식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감기에 걸리면 판콜을 찾게 되었다.) 내가 갑자기 장염에 걸렸을 때는 언니들이 죽과 이온음료들을 사다 주었고,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자기 집에 있는 냉장고를 탈탈 털어 내가 2주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나도 받기만 한 건 아니다. 친한 언니가 입덧할 때 먹고 싶었다던 갈비찜도 하고, 그 아이가 첫 돌을 맞았을 때에 설탕이 적은 케이크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언니가 갑자기 출산을 하게 되었을 때 친한 언니랑 갑자기 큰 아이 베이비시팅을 하기도 하고, 언니들이 힘들어할 때는 내가 밥을 해서 먹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 총기사건이 생겨서 내가 힘들어할 때,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언니가 혼자 있지 말고 비행기만 끊어서 내려와서 있으라며 방을 내어주기도 했다.그 외에도 겨울철 난로 앞에서 힘들어서 서로 앞에서 울던 그 순간들, 그 특별한 시간을 같이 보냈다는 끈끈함이 있다.
내가 새로운 곳으로 포닥을 가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분들이 현장에 와서 나를 데려가주셨고 병원에도 데려가주셨다. 게다가 힘들까 봐 집에 며칠 와 있으라며 방을 내어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폐차가 되어 차가 없는 나를 몇몇 분이 번갈아가면서 라이드도 해주시고 병원도 데려가주셨다. 차마 여기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의 도움과 걱정을 받았다. 늘,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야지 하면서도 나의 보답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도 뒤에서 내 흉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인 사회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실망을 하게 된 경우도 있지만, 내가 얻은 소중한 사람들이 더 귀하다. 그 시절 만났던 그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입을 모아 그 시간이 정말 특별했다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 맺을 수 없는 신기한 인연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는 분들에게도 조심은 하되 가능성을 닫아두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