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에서 놓치게 되는 것
미국 유학을 한참 준비하던 시절, 지금 내 브런치 글을 찾아 읽으실 분들처럼 나도 유학기를 많이 읽었다. 내가 모르는 나의 미래가 많이 궁금해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라도 엿보고 싶었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글들이 몇 개 있다. 시간이 지나 그 글들을 다시 찾을 수는 없지만, 미국 유학을 하면서 어려운 점 하나가 가까운 사람들의 인생 경조사를 놓치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내다 보니 그 말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됐다.
가까운 친구들의 결혼식을 놓치게 되고, 친한 친구들의 행복하고 중요한 순간에 축하를 해줄 수 없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의 결혼식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건 특장점이다.) 인생에 이렇게 경사만 있으면 좋겠지만, 더 마음이 힘든 순간은 애사가 있을 때다. 경사는 미리 사전에 계획되고 또 세상이 좋아져 보이스톡으로 혹은 라이브로 중계를 하면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애사는 계획되지 않은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속상하다.
나는 외할머니가 내가 미국 생활을 하는 동안 뇌출혈이 오셨고, 몇 년을 요양병원에서 버티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날 정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박사과정 마지막 해였고, 잡마켓에 원서를 한참 뿌리던 111월 초 이맘때였다. 이틀 뒤에 첫 줌 면접이 있었던 날이었다. 누군가는 내 마음이 부족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녀올 가난한 취준 박사과정생에겐 급작스럽게 미국에서 한국을 다녀올 돈도 시간도 없었다. 그저 울었다.
할머니는 내가 외가댁에 갈 때마다 늘 “딸아, 내 딸아,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박사가 교수가 뭐 훌륭한 사람이냐 싶지만, 교수가 되어서 할머니 말 덕에, 기도 덕에 내가 이렇게 되었노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쩌면 교수가 될 날도 (물론 여태 교수가 아니지만) 박사가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할머니가 떠난 게 참 속상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고 무겁고 힘들어 눈물이 많이 났다.
면접을 준비해야 해서 지도교수님과 미팅이 있었다. 울다 들어갔으니 눈이며 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교수님이 왜 그러냐고 물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노트북을 덮으며 “밥은 먹었냐”라고 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교수님이 밥 먹으러 가자며 나가서 밥을 사주셨다. 당시 교수님도 어머님을 보내드린 지 한 달 정도 된 시기였는데, 교수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교수님이 사주셨던 밥이 따듯한 위로가 됐다.
힘들었던 그 시간을 이렇게 주변 사람들 덕분에 버텼다. 내가 많이 힘들어하는 걸 안 발렌틴과 다니엘은 그 해 내 생일 선물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사진이 들어간 라켓 목걸이를 선물로 줬다. 동생 연락처 좀 달라길래 ‘왜 그러지?’ 싶었는데, 동생들한테 연락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사진을 구했던 거다. 말로도 표정으로도 다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외할머니의 장례를 겪으면서 외국생활에 대해, 갑작스러운 이별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다. 내 지도교수님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많고, 지도교수 와이프인 모니카는 6살 정도 많다. 그런데 나는 외조모 상이었지만 두 분 모두 그 해 부모님 상을 겪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나랑 엄마아빠한테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기대수명도 평균수명도 많이 올라가 6-70대도 청년이라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주변에서 들리는 부모 상이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이 아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10년이 남았다면, 그중에서 ’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 날이 1년에 1달 정도라고 해도 다 더하면 1년이 안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을 나오기 전에 한국에 나온 수학과 선배랑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우리 과 선배들은 다시 생각해도 천사다.) 선배가 밥을 먹으면서 한국에 오랜만에 들어왔다고, 그러면서 부모님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아직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속으로 ‘왜? 친구들은?’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선배의 말이 이해가 된다. 그때 이미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고 내가 미국에 머문 시간 정도 머물렀던 선배는 내가 하는 이 생각들을 그때 이미 했었겠구나.
그래서 이번에 한국에 들어오면서는 부모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들어왔다. 사실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자꾸 붙어있으니 짜증도 내게 되는 것이 사실이고, 마냥 착한 딸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몇 년 만에 외가댁이 아닌 곳으로 가족여행도 가보고,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할 때 엄마아빠랑 짧게 여행도 해봤다. 그리고 연말엔 또 다른 여행을 계획 중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 지난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력이 많이 안 좋아지시는 게 느껴졌는데, 결국 할머니를 찾아 떠나셨다. 임종을 지키러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발렌틴과 다니엘이 준 라켓을 붙잡고 할아버지, 우리가 임종에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다려달라고 기도했다. 다행히 임종을 지킬 수 있었고, 장례절차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상해서 아마 입원까지 했어야 했던 것 같지만, 그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음에 엄마를,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남은 시간을 더 소중히 써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