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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조안 Jul 02. 2024

천칭자리

차분함과 열정 사이

영태는 일어나려는 두 손님이 다시 자리에 앉는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수현과 민재는 영태의 알 수 없는 미소를 포착했다. "죄송하지만.." 민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삼십 분.. 정도 시간 괜찮으시면 인터뷰 해 주실 수 있어요..?" 영태는 당황한 표정으로 수현과 민재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무슨 인터뷰.. 이시죠?" 영태는 반쪽짜리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수현은 영태 눈길을 피하며 "아, 제 동생 방학 숙제가 가게 사장님 인터뷰하는 거거든요. 여기가 되게 맛있다고 들어서, 아, 그리고 너무 맛있었어요. 그래서 시간 되시면, 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영태의 눈이 커졌다. "아, 그렇군요. 근데, 어쩌죠 지금 바로 다음 예약 타임 손님이 있어서 다 끝나려면 9시는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이후는 괜찮아요." 다행히 인터뷰가 상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그때 다시 올게요. 감사합니다." 수현은 민재와 가게 문을 나섰다. 


가져온 자전거를 끌면서, 형제는 밤거리를 거닐었다. 거리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한 편의점 앞에서 민재가 발걸음을 멈췄다.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 2개와 파라솔 탁자가 있었다. 찌그러진 맥주캔이 몇 개 있었지만 치우면 그만이었다. "형, 우리, 저기 앉아 있자." "그래. 여기 앉아 있어, 내가 뭐라도 사 갈게." 수현은 오징어 두 마리랑 땅콩, 고구마, 사이다, 병 맥주 하나를 들고 왔다. "이런 날씨에는 맥주지." 수현은 맥주를 따며 말했다. 민재는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는 수현을 바라보았다. "혀.. 엉, 근데 그 사장님 잘생겼지?" 수현은 방금 한 모금 넘긴 맥주가 목에 턱 막혔다. 콜록대는 수현을 민재는 깔깔대며 웃었다. "형 완전 좋아하던데, 얼굴도.. 빨개지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좋.. 아하는 스, 스타일이지?" 수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거든." "나한테는 숨길 필요 없어. 어차.., 어차피 나밖에 모르지 않아..?" 민재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냐, 엄마아빠도 알기는 해." "그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장도 남자 좋아하는 거.. 일지도 몰라." 민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냥, 물어봐. '사장님 남자 좋아하세요?'" "아, 진짜, 미쳤냐." 수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수현은 초등학생 때 얻은 교훈으로 더 이상 일반 남자를 좋아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일반 남자를 좋아하는 건 게이만 힘든 일이라는 걸 느낀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분위기와 상황으로 그 사람이 게이인지 아닌지를 유추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형이 보기에는 어때, 그 사람." 근데, 이 사장님은 전혀 모르겠다는 말이지.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감이 안 잡혔다. "모르겠어. 완전 게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승산은 있기는 하네, 형, 그냥 이거 하지 말고., 아, 그냥 형 혼자, 들어가. 그냥." "이미 너 방학 숙제라고 했는데, 너가 안 들어가면 어떡해." "너무 피곤해서 못 참고 들어갔다고 해. 다음에 간다고 해. 즐겨." 민재는 오징어를 뜯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어디가?" "집에서 봐, 형!" 민재는 오징어 몸통을 입에 물고 자전거를 끌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9시. 수현은 자전거를 달달 끌면서 가게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맥주 한 병은 수현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데 충분했다. '어차피 다시 볼 것도 아니고. 까이면 안 가면 되잖아.' 도착해보니, 가게에 손님들이 짐을 챙겨 일어나고 있었다. 수현은 먼 발치에서 모두가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한 후, 수현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동생은요?" 사장은 졸린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피곤하다며 먼저 갔어요. 제가 알아보라네요. 전 괜찮아요." "아 그래요? 착한 형이네. 이제 손님 다 가서, 편하게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갑자기 질문을 생각하려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질어질한 술기운에 수현은 옆통수를 짚었다. "아니, 괜찮으세요?" 영태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수현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아, 아니에요." 술 마시고 왔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음, 그게, 저, 혹시 저기 사자 닮은 피씨방 사장님, 아세요?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들었어요." 수현은 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른채 수현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사장님, 여기는 얼마나 됐어요? 여기 인기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다 사장님이 잘생겨서 사장님 얼굴 보러 오겠어요.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방학 숙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한 거 물어보시는 거 아니에요?" 영태는 조금 전까지 하루를 잘 마무리하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취객이 들어와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내가 다시 오라고 했으니까. 그냥 이 상황을 즐겨야겠다, 싶었던 영태는 이 헤롱거리는 귀여운 취객을 놀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원래 아는 사이었고, 그랬는데, 생각이 안 맞아서, 제가 나와서 가게를 차린 거고요. 여자 친구는 없어요. 제가 사실 남자 좋아하거든요." 영태는 수현에게 너만 알고 있으란 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배신 아니에요, 왜 혼자만 먹고살겠다고 나왔어요, 나머지는 어쩌고요." 수현의 눈은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다 합의된 거였어요. 아니, 그 사장님이랑 친해요? 어떻게 알았어요." '아, 방학숙제. 그 사람도 인터뷰 한건가.' 영태는 생각했다. '다 잊고 있었는데. 그 때가 언제였지.' 수현은 의자를 끌고 바 끝에 앚았다. "사장님, 진짜, 잘생겼어요. 진짜 제 스타일이에요. 요리도 잘하고. 완전 내 이상형.." 수현의 머리 속이 붕 떠올랐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수현은 바에 엎드렸다. 영태는 이걸 어떡하나 싶었지만, 수현이 워낙 귀여웠기도 했고, 남자에게 오랜만에 들어본 외모 칭찬 때문에 어깨가 올라갔다. 이 친구 잘만 하면 동네방네 입소문 나기에도 좋아보였다. 단골 손님에게 서비스해준다고 생각하고, 영태는 남는 재료로 튀김이나 더 해줘서 먹여 보내기로 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영태는 잠든 수현을 깨웠다. "저기, 제가 튀김 좀 했거든요. 먹어볼래요." 파란색 사기 접시에 단호박, 가지, 생선살 튀김이 대여섯개 올려져 있었다. 수현은 비몽사몽한 눈을 떴다. 얼마나 잔 걸까. 여기 아직도 가게인건가. '설마, 여기에서 나, 잔건가?' 술기운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제가 이런 진상 짓을.. 튀김까지 해 주신 거에요?" "아까, 나보고, 계속 잘생겼다, 자기 스타일이다, 계속 그러길래, 서비스로 저도 드렸어요. 괜찮아요. 근데 고등학생이에요?" '결국 헛소리를 작렬했군,' 수현은 생각했다. "저 대학생이에요. 1학기 다녔는데, 고등학생 같아요?" "아 그렇구나, 그럼 아직 젊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다 그게 그거죠. 전 너무 한참 전이라." "사장님은 몇 살이신데요?" "저 스물아홉이에요. 그렇게 안 보이죠?" 어제 간 세븐스타 사장님과는 다른 의미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윤기나는 구릿빛 피부는 주름 하나 지지 않았다. 웃을때 눈가의 잔주름이 지긴 했는데, 웃을 때 같이 주름지는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다. 스물일곱 즈음 되어 보였는데, 곧 서른이라니. 수현과는 아홉살 차이가 났다. "그렇게 안 보여요." 수현은 대답했다. "형이라고 할래요, 그럼?" "그렇게 불러도 되나요?" "자주 놀러와요. 심심하니까. 저 아까 말했는데, 여자친구 없다고." 수현은 얼굴이 빨개졌다. 수현의 젓가락은 튀김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아, 왜 안 먹어요. 맛이 없어요?"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냥, 그냥.. 요." "그냥이 어딨어요." 영태는 말했다. "그냥은 없어요. 자, 아." 어미새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수현은 입을 벌렸다. 영태는 단호박 튀김을 소금에 찍고 간장에 살짝 담근 고추냉이를 올려 수현의 입에 집어넣었다. 영태는 연신 맛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10시가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었어요, 신세를 너무 많이 졌어요."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태는 허리를 폈다. "네, 이제 가실 때가 되긴 했죠. 손님, 너무 오래 있었어요." 영태는 웃으며 말했다. 영태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삼촌 같아.' 수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몰라. 남자 좋아한댔으니까.' "형, 근데, 전화번호 주면 안되요? 진짜 친해지고 싶어요." 수현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번호 좀 찍어주세요." 영태는 가게 번호를 찍어줘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갓 스무살이 뭘 할까 해서, 친해지면 좋겠다고 해서, 그리고, 나름 귀여웠으니까.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제 이름은 박수현이에요." "난 진영태.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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