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조안 Jun 24. 2024

궁수자리

세이자 오마카세

"민재, 일어나. 아침 먹자."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부터 수현 민재 부모님은 어시장에 가신 터라 집안이 조용했다. 거실 한쪽 벽의 흰색 타일은 뜨거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거실 마룻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된장찌개였다. 방학 동안, 수현은 사실 은근히 식사 준비를 즐기고 있었다. 요리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압력 밥솥 위 신호추가 팽이처럼 돌아가며 딸랑거렸다. 수현은 바스락거리는 이불 아래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는 남동생의 궁둥이를 찰싹, 때렸다. "고만, 일어나." 민재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떴다. "지금, 몇 시인데, 벌써 밥을, 머.. 먹어..?" "11시 반이야." "워.. 원래.. 이렇게.. 일찍.." "원래는 없어. 어제 사장님 보고 느낀 거 없어? 평생 일하면서 치열하게 사신 분이야. 우리 지금 일어나서, 하루 시작하는 거, 행복한 거야. 다른 사람들은 벌써 하루 다 시작했다고. 우리 엄마 아빠도 새벽부터 가셨잖아." "혀.. 형, 그만.. " 민재 방학 숙제인데 방학 숙제의 효과는 수현이가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민재는 식탁 의자에 다리 한쪽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거기, 초밥집, 언제 갈까? 형. 나.. 거기 궁금해." 수현은 압력 밥솥에서 현미와 보리가 섞인 밥 두 공기를 고봉으로 떴다."그러게, 그냥 빨리 가 버릴까?" "형, 빠.. 빨리 가보자." "그럼 그냥 오늘 가볼래?" "조.. 좋아!" "그럼 우리 좀 준비를 하고 가자. 어제 너무 무턱대고 아무 준비도 안 하고 가니까 이상한 질문이나 했잖아. 처음치고는 나름 괜찮긴 했는데, 그래도 어떤 질문할지 생각하고 가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그냥 갔다가, 질문 거리 놓치고, 후회할 수 있잖아." "좋아. 형. 그럼, 생각 좀.." "그래, 밥 먹으면서 생각해 보자." 부엌엔 달그락 거리는 수저 소리와 선풍기 소리만 가득했다. 적막을 먼저 깬 건 민재였다. "그거 물어봐야지, 형, 왜 호.. 혼자만 나왔냐고." "야, 그건 싸우자는 소리랑 똑같은 거 아니냐?" "그래도, 형, 난, 그게 가.. 가장 궁금한데. 예전에 수산 시장에서 같이 일했다며. 그.. 그럼 다들 잘했을 거 아니야? 근데, 왜 혼자, 나왔는지.. 난.. 그.. 그게 너무 궁금해." 수현은 눈을 반짝거리는 민재가 새삼 놀라웠다. 나무늘보처럼 꿈벅 꿈벅 거리고 말도 느린 동생이었는데, 이렇게 호기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매사 의욕이 없던 애였는데. '좋아, 태권도는 갈 필요 없겠군.' 수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 나도 그게 가장 궁금하긴 해.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지." "사.. 사정? 그게 중요해?" 민재가 발끈했다. "아니, 오랫동안, 같이 했다며. 그리고 자기가 같이 하자고 했다며..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떡하고? 왜.. 다 잘라버렸냐는 말이야.. 나는." "얘기를 들어보자. 같이. 우리가 모르는 얘기가 있을 수 있잖아. 그 얘기를 하기 전에, 그래도 무난한 질문부터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아!" 민재와 수현의 눈이 마주쳤다. "그럼 횟감을 어디서 구해오는지 물어보자. 음식이 너무 신선해서,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하다고. 칭찬은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거든. 그리고 찰랑찰랑한 회," 수현은 방금 만든 따끈한 계란 말이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회가 너무 탱글탱글하고 쫀쫀해서 직접 회를 뜨냐고, 언제부터 회를 떴는지 말해달라고 하자. 그 사람이 말을 할 때, 그 때 혼자 일했냐고 물어보고, 같이 일했다고 그 사람이 말하면," 민재가 형의 반짝거리는 동공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지금 뭐하시는지 알아요?' 이렇게 물어보는거지. 어때?" "형, 아니, 연기까지, 알았어. 그.. 그럼 형만 믿을게." "좋아. 그럼 일단 거기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그건 내가 살게. 음, 요즘에 인기 많은 데는 예약 해야하니까. 어디 보자. 좋아, 오늘은 좀 늦게 남아 있긴 하네. 8시. 나는 가게 일 도와드리고 바로 가게로 갈게. 위치 알려줄 테니까 바로 식당 앞에서 보자. 어때, 혼자 찾아갈 수 있지? 해운대 쪽." 민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음.. 해.. 해운대 쪽이니까 금방, 갈 것 같은데, 괜찮아." "좋아. 꼭 시간 맞춰 와야 해." 빈 식기들을 집어든 수현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 그리고 인터뷰 연습 혼자 하고 있어. 그, 사장님 앞에 있는 것처럼, 나 어차피 곧 나갈 테니까. 부끄러워 안해도 돼." 민재는 분주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수세미에 퐁퐁을 문지르는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다리 삼십오 마리, 전갱이는 이십 마리 되려나? 오늘은 박가네 생선가게에 유난히 사람이 붐비는 날이었다. 오래되고 커다란 할아버지 벽걸이 시계를 볼 틈도 없이 수현은 바지런히 물고기를 잡고, 어머니를 도와 쉴새 없이 밀려 들어오는 손님 음식상을 차렸다. "아이고, 수현아, 오늘 무슨 날이다냐." 땀방울이 송골송골하게 맺힌 어머니 얼굴에는 아들만이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러게요. 아직 초복은 아닌데."잠시 생긴 틈을 타, 수현은 손님 방 위에 있는 전자 시계를 올려다봤다. 19시 10분. 토요일. 가장 손님이 몰리는 때였다. 아, 젠장. 오늘이 토요일이었구나. 그럼 오늘은 무조건 밤 늦게까지 끝날 터였다. 그래도 하루, 딱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저, 오늘 민재랑 방학 숙제하러 잠시 해운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수현은 눈치를 살폈다. "아유, 그래. 어쩔 수 없지. 민재 돌봐주는거,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조심히 다녀와. 여보, 수현이 먼저 간대." 수현의 어머니는 잠시 음식 상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는 둥, 마는 둥, 했다. '익숙해, 괜찮아. 받아들이는 건 아버지 몫이었어. 수현은 앞치마를 벽 걸이에 널고 가게 문을 나와 서둘러 자전거 안장에 앉았다.  

열 한 살 때였나, 수현은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유치원 때, 종종 엄마 옷장으로 기어들어가 원피스를 입고 핑크색 립스틱을 바르는 놀이를 몰래하다가 들켜 엄마를 놀래킨 적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게 된 건 초등학생 때부터였다. 같은 반에서 수현의 눈길을 끄는 남자애가 있었다. 현수. 현수는 바다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옆에 바로 바다여서, 방과 후면 바로 수영할 수 있도록 늘 수영복을 가방에 챙겨다녔다. 몇 번은 수영하고 젖은 수영복을 그대로 가방에 두고 등교한 적도 있어서, 가방에서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날도 많았다. 그런 현수를 수현은 동경했다. 고동색 눈에 긴 속눈썹, 호리호리한 몸매. 어느 날은 학교 끝나고 남자애들끼리 삼삼오오 '좋은 걸' 보러 한 아이의 집에 갔다. 그때 깨달았다. 살색 빛이 가득한 컴퓨터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친구들을 수현은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랑 하면 어떨지 궁금했다. 수현은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현수를 떠올렸다.


"그랬었지." 수현은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혼잣말했다. 열두 살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현은 참지 못하고 현수에게 고백했다. 돌아온 답변은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너 계속 나 이상하게 쳐다봤잖아. 근데. 나는 연주 좋아해. 미안." 현수는 등을 돌렸다. 그렇게 현수의 1년 짝사랑은 끝이 났다. 그로부터 이주일 간 수현은 마음을 달래려 여기저기 자전거를 타고 바닷거리를 쏘다녔다. 초등학생이 퉁퉁 부은 얼굴로 맨날 밤 10시가 넘게 집에 들어오니 수현 엄마는 걱정되기 일쑤였다. 대체 뭐하다 늦게 들어오는지 물어보면 맨날 숙제한다고, 친구들이랑 놀다 들어왔다고 핑계를 대는 수현에게, 엄마는, 갓난쟁이 민재를 재우고 대체 왜 며칠 늦게 들어오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현수한테 고백했는데 까였어. 걔는 여자 좋아한대." 첫 커밍아웃이었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 동안, 수현 엄마는 가게도 나가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성실했던 수현 엄마가 가게를 쉰 날이 딱 두 번인데, 첫 번째가 수현의 커밍아웃이었고, 두 번째가 민재의 ADHD 진단 이후였다. 수현의 첫 고백, 첫사랑, 커밍아웃은 그렇게 초등학교 때 모두 끝났다.


가게는 시끄러운 번화가 뒤쪽, 한산한 시내에 위치해 있었다. 가게 간판에는 일어로 'せいざ', 그 옆엔 자그만 글씨로 '세이자 오마카세'라고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일까, 특이하긴 하네.' 수현은 생각했다. 가게 귀퉁이엔 민재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제발, 이상한 질문은 하고 있지 않길 바라면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에는 조용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본 고급스러운 일식당에 기가 눌린 수현은 사람들 속 자신을 보며 손 흔드는 민재를 보고 안심했다. "형, 왔어?" 기다란 바에는 높은 나무 스툴이 열댓개 놓여있었다. "우리, 8시잖아. 그 때, 딱, 나.. 오는 것 같더라구. 곧 나오겠다." 주방 안 쪽에서는 칼 가는 소리와 토치 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 근데 여기 사장님, 꽤 잘생겼나봐. 옆에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날씬한 체형에 까만 피부, 어깨가 겨우 닿는 파마 머리, 낙타같은 긴 속눈썹과 깊은 눈매를 가진 사장이 들어왔다. 눈동자는 검으면서도 푸른 빛이 돌았고, 수현의 고동색 눈동자를 보고 놀란듯 몇 초간 응시했다.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장은 시선을 거두고는 자기를 소개했다. "세이자 오마카세를 운영하고 있는 진영태입니다. 식전 죽 먼저 올리겠습니다." 잠시 뒤, 바에 따끈한 게살죽이 한 그릇식 올라왔다. 식당에 앉은 사람은 여덟 명, 형제 빼고는 모두 남녀 연인들이었다. 수현은 뒤돌아선 사장을 보고 저렇게 잘생긴 사람에게는 여자들이 물에 깨붙듯 달라붙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 대학교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으니까. 좋은 방학숙제라고 생각했다. 인터뷰 질문도 해야 하는데, 정신없었던 가게 일 때문인지, 수현은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먹기 바빴다. 진영태씨는 맛있게 먹는 수현을 바라보았고, 다음 요리를 준비했다. "다음은 감태를 두른 명태알 초밥입니다. 간장에 찍어드세요." 음미하는 옆 테이블과 달리, 수현과 민재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만 연발하는 형제였다. 세상의 모든 단어를 잊어버리고 맛있다는 단어 밖에는 생각나지가 않았다. 이어 토치로 구운 한치 초밥, 연어 초밥, 메로 구이, 새우 튀김, 매운탕, 줄줄이 음식이 나왔고, 형제는 매번 음식을 재빠르게 먹어치웠다.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까. 마지막으로 나온 망고 샤베트를 끝으로 손님들이 하나 둘씩 짐을 챙겨 일어났다. "아, 잘 먹었다." 배부르게 내뱉으며 일어나려는 수현을 민재가 잡아끌었다. "형, 우리, 질문해야지." "아, 그렇지. 참." 모두가 나가고 난 뒤, 형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 사자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