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조안 Jun 18. 2024

사자자리

여름방학 숙제

고풍스러운 4인용 나무 식탁 위에 두 스테인리스 수저가 마주 놓였다. 수현은 따끈한 계란국 한 숟갈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이번 방학 숙제는 뭔데?" "아, 음.. 그게, 네 가게를 정해서, 직업 이.. 인터뷰를 하는, 거.. 야. 다른 애들은, 버.. 벌써 친한 애.. 들이랑 가.. 같.. 이 한대. 근.. 근데 나는 아는 애.. 들도 없고, 친.. 하지도.., " 민재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럼 꼭 조가 필요한 건 아니네! 형이랑 같이 하면 되잖아. 숙제는 언제까지야?" "9.. 9월. 그 첫.. 째 주에 검사하신대, 선.. 선생님이." 민재가 작게 대답했다. "고마.. 워, 형." "좋아. 그럼,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하고 싶은 가게도 생각해 봐." 수현은 이번에는 흰쌀밥을 떠 주홍빛 명란젓을 올렸다. "형, 나.. 난 딱.. 히 없어. 음... 지금 생각나는 건 피씨방..?" 민재의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민재에게는 형과 부모님이 가게 일로 늦으실 때마다 자주 가는 피씨방이 있다. 세븐스타 피씨방은 초등학생 때 수현이 처음 민재에게 피씨방의 존재를 알려준 곳이다. 자리를 정하는 것부터, 요금제를 결제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준 곳이라, 민재는 익숙한 그 가게만 간다. 하지만 거의 무인으로 운영되는 피씨방에 사장님이 언제 올지가 관건이었다. 수현이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거기, 사장님은 자주 와?" "그.. 글쎄, 그래도 수.. 수요일 저녁에는 오시는.. 것 가.. 같았어!" 민재가 대답했다. '좋아, 거기는 꼭 가야겠군.' 수현은 생각했다. "좋아, 그럼 다른 곳들은 천천히 생각해 보자. 그 피씨방 옆에 돌아보면서 가게들 보고, 괜찮은 곳으로 들어가 보자." 수현은 말했고, 민재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답했다.


식기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끝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름이 되니 해가 무척 길었다. 겨울에는 6시면 지던 해가, 여름이 되니 8시가 되어야 겨우 해가 저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요일이지.'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그냥 생각난 김에 오늘 해치워버릴까, ' 수현은 생각했다. "민재, 옷 입어. 우리 나가자. 오늘 당장 해보자." 민재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 지금?" "그래, 어차피 하는 거 없잖아, 피씨방 가보자. 오늘 수요일이잖아."


형제는 자전거를 끌고 문을 나섰다. 형제는 바닷가 바로 옆 단독주택에 살았고, 문 밖으로 나오면 바다와 마주 닿아있는 해안도로가 있었다. 여름밤공기를 가로지르며, 형제는 세븐스타 피씨방으로 향했다. 네온사인이 가득한 시내는 밤 산책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중고등학생 때, 수현은 자기가 관광지에 사는 게 퍽 정신 사납고 싫었으나, 오래간만에 다시 온 지금은 관광객의 시선에서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길 찰나, "저기 있다!" 민재의 목소리에 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투박한 간판이 형제를 반기고 있었다. 피씨방은 지하 1층이었다. 형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여긴 항상 그대로야." 수현은 말했다.


가게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아르바이트생 한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장님은 혹시 오늘 계신가요?" 수현은 물었다. 당황한 아르바이트생은 잠시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잠시만요, 안에 계세요." 하더니 자리를 비웠다. 수현은 고개를 돌려 민재를 바라봤다. "오 사장님 계신대, 잘됐다." 민재는 웬일인지 수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체구에 까맣고 탄탄한 피부, 그리고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아르바이트생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수현은 쑥스러워하는 민재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잠시 뒤, 사장이 형제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 굵고 강직한 목소리였다. 사장은 40대는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운동을 즐겨하는 탓인지 두꺼운 팔뚝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 저희 동생이 중학교에 다니는데요, 이번에 여름방학 숙제로 가게 사장님을 인터뷰하는 거라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긴장했지만, 수현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어보았다. 사장은 흔쾌히 웃으며 응답하였다. "오, 요즘 중학교에서는 그런 숙제를 내주나 보네요. 그럼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험악한 첫인상과 달리, 친절한 말투였다. 안내하는 사장을 따라서, 민재와 수현은 카운터 안으로 들어섰다. 3년 넘게 간 단골 피씨방이지만 카운터 안으로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수현과 민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사장은 깔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장과 직원들만의 공간은 사장의 세련된 취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로 앉으세요." 사장은 빨간색 소파를 가리켰다. 빨간색 가죽 소파 옆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있었다. 사장은 하얀색 플라스틱 간이 의자를 끌고 마주 보고 앉았다. "이제 인터뷰 시작할까요?" 사장이 수현을 보고 말했다. 사실, 급하게 온 탓이라 질문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수현이 고민하던 찰나, 민재가 입을 열었다. "사.. 사장님! 저 여기 3년 넘게 와.. 왔어요! 여기 너무 근사해요. 저도 사.. 사장님처럼 이런 방, 그.. 그러니까 아지트! 네, 이런 아지트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틈나면 컴퓨터로 게임도 할 수 있고, 이런 소파에서 쉴 수도 있고! 너무 조.. 좋아 보여요, 사장님!" 민재 덕분에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사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운데, 아니, 친구 이름이 뭐야? "민.. 재입니다! 중학교 1학년입니다." "좋아, 민재 친구. 씩씩한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근데, 이 가게는 내 가게가 아니야. 임대야. 그러니까, 빌린 거지. 나중에 네 가게를 차리고 싶다면 돈을 아주 많이 모아야 해. 나는 이 가게가 처음이 아니고, 그전에는 다른 곳에서 일했어." "어.. 어디서요?" "수산시장에서." 민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와, 대박! 우리 엄마아빠 수산시장에서 이.. 일해요! 그럼 아저씨, 아 죄송해요, 사장님, 예.. 예전에 막 회.. 회 뜨고, 그랬어요?" "회 뜨는 것까지는 아니고, 주방 보조? 뭐 그런 일 했는데.." 사장은 잠시 옛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동생들이랑 형들, 지금은 뭐 하나, 싶네. 친한 동네 사람들이랑 같이 일했거든. 좋았지, 근데, 처음에 같이 하자고 했던 동생이 나갔어." "왜.. 왜요? 뭐야.." "자기는 초밥집 하고 싶다나. 수산시장에서 일하는 거, 너무 힘들대. 가게 인테리어도 좀 그렇고, 요즘 세상에는 SNS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니까. 너희들도 알잖아, 이쁘게 세팅해서 음식 하는 거, 알지? 그런 거 해야 돈이 된다나. 그 친구 나가고 6개월 정도 같이 더 했는데, 전처럼 장사가 잘 안 되더라고. 걔가 잘했거든. 결국, 우리 다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 각자 하고 싶은 거 하고 있는 중이야. 난 옛날부터 컴퓨터 게임 좋아했으니까, 피씨방을 차린 거고. 사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한 5년 됐나? 난 아직 30대 초반이니까, 뭐, 내 목표는 40 전에는 자리 잡는 거야. 반응 뭐야, 왜 그래? 나 그렇게 안 보여?" 사장은 나이를 듣고 놀란 형제를 바라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고생해서 그래, 그러니까, 너희들 고생하기 싫고 멋지고 편한 사무실 갖고 싶으면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수현은 눈을 피하는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그럼, 그 나간 분 있잖아요, 거기 가게는 가 보셨어요?" 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걔가 한번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 어쨌든 뭐, 옛날 일이기는 해도, 우리 입장에서는 배신자? 그런 거니까.." 뭐, 너희들이라도 한 번 가 볼래? 아, 농담이야." 놓치지 않고 민재가 말했다. "저, 궁금해요! 가게 이름 알려주면 안 돼요? 저 초.. 초밥, 좋아하거든요, 맛없으면요, 바로 말씀드리러 올래요!" "야, 그래도 눈치가 있지, 거기 가서 우리가 뭐 해." "아니, 형, 그러니까, 우리 아무 티.. 티도 안 내고 그냥 손님인 척, 하면 되잖아!" 민재가 사장을 쳐다보고 말했다. "사장님, 저희가 가서 어떻게 지내나 물어보고 올게요! 저 이거 숙제, 가게 네 곳 들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가면 돼요! 가게 이름 좀 알려주세요!"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그래, 뭐 나도 그 친구 소식 궁금하긴 했으니까. 그 초밥 가게가 음, 요즘 애들이 많이 가던 오마카세, 그런 거였는데. 이름이 좀 특이했어. 기다려봐.." 사장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뒤졌다. "아, 찾았다. 여기. 해운대 쪽이었거든, '세이자 오마카세'."


형제는 캔 음료를 쥐어주는 사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너, 아까 질문 되게 잘하던데?" 수현이 말했다. "저.. 정말?" "그래, 내가 지금까지 알던 민재인가, 싶던데. 잘했어." "형, 고마워. 다행.. 이야. 시.. 실수했을까 봐, 좀, 걱정했거든. 아, 그리고, 우.. 우리 다음 가게도 같이 가줘, 형. 나 거.. 거기 가보고 싶어. 배신자 오마카세." "배신자 오마카세라니, 그 사람 얘기 들어보면, 다른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수현은 자전거에 올라타며 말했다. "일단, 지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니까, 집으로 가자." "그래, 형, 고마워." 형제는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형제는 집에 도착했다. 형제는 자전거를 세우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었다.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니, 부모님이 와 계신 듯했다. "우리, 뭐.. 뭐라고 하지?" "숙제하다 돌아왔다고 하지 뭐. 사실이잖아?" 문을 여니,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막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 늦은 밤에 어디 갔다 왔어?" "아, 민재 학교 방학숙제가 있어서, 도와주고 왔어요. 가게 사장님 인터뷰하는 거거든요." 수현이 말했다. "휴, 그래그래. 잘했다. 그래도 너무 밤늦게 다니지는 마. 우리는 방금 도착했어." "네, 알겠어요. 배고프진 않으시죠?" "어, 괜찮아. 수현이, 너는 철이 너무 일찍 들었어. 엄마아빠는 괜찮으니까, 너부터 챙겨." 방으로 쏙 들어가는 민재를 쓱 바라보고는, "동생 민재 챙겨줘서 너무 고맙다. 일 다니니까 봐 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어. 방학 동안이라도 좀 부탁한다. 민재는 말을 너무 더듬어서 걱정이야. 계속 혼자 있어서 그런가, 걱정되네."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래도 제가 있을 때 말 계속하니까, 갈수록 느는 것 같아요." 수현이 대답했다. "그래, 다행이지.. 다행이야.. 들어가서 자렴, 이제." "네, 안녕히 주무세요." 수현은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세이자 오마카세' 사장, 무슨 사정이 있어서 피씨방 사장이랑 같이 차린 가게를 떠났을까? 모두를 떠나고 올 만큼, 그렇게 간절했던 걸까? 아 그리고 민재는 말이 좀 늘었던데, 친구가 있으면 좀 나아지겠지? 활발하고 운동은 꽤 잘하는 애니까, 태권도를 배우게 하면 나을까? 수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잠에 빠져들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1화 쌍둥이자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