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감정소모, 그리고 보람과 한계,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
12년간 같은 업계에서 커머셜로만 업무를 해온 나에게도, 번아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3,6,9,12 3년에 한 번 온다는 커리어의 허들 모두가 우스개 소리로 이야기하지만, 10년 차가 넘어가면 마음 한편에서 이제 이 업계를 떠나긴 쉽지 않겠구나, 이 보상과 처우를 포기하고 내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동시에 " 아 너무 일하기 싫다 " "반복적인 일상이 지루하다"라는 번아웃도 함께 오기 마련이다.
작년부터 연말 연초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걸 내년에 또 해야 하나?" "이걸 왜 또 하고 있지?” "앞으로 내 업무에서 달라질 게 있을까?"
번아웃은 사실 갑자기 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 때문도 아니고, 야근 때문도 아니다. 한 때 일을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때는 새벽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해도 괜찮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의약품 마케팅과 헬스케어업계의 특성일 수 있을 것 같다.
질환 환자 프로모션 메시지등은 업무에서 중요하지만, 헬스케어 마케팅, 커머셜 파트의 업무는 하루하루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그 이유가 의료 업계는 단기간에 소비재처럼 어떤 사건으로 확확 바뀌는 경우가 잘 없다. 그러므로 브랜드 전략이 다음 해라고 갑자기 완전 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경우가 잘 없어, 디테일을 바꾸거나 내부 방식을 바꾸는 경우가 많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성취보다 관리가 많아진다. 이는 신약보다 론칭한 지 오래된 약제브랜드를 담당할수록 더 그렇다.
그때부터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 이게 의미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항상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비전과 동기부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생명을 다루고, 우리의 일은 의료 현장을 바꾸고 환자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의 의미의 중요성을 이해하면서도 실무에서는, 프로모션을 위해 메시지를 만들고 글자 하나하나 승인을 받기 위해 여러 부서와 싸우고, 경쟁사를 대비한 자료를 정리하고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그러다 보면, 주니어 때는 영업과 마케팅이 이 업계에선 뭐가 다른 거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이 일을 하고 있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실제로 내가 지난 회사에서 일할 때, 내가 담당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를 진행했다고 하면서 천만다행이라는 고객의 피드백을 듣고, 나의 활동이 진짜로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번 수정한 슬라이드 자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의사의 설명 방식을 바꾸고, 어떤 환자의 치료 선택에 영향을 줬다면 그건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AI의 출연으로 업계에선 마케팅은 대부분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제약 마케팅은 규제가 많고, 나라마다 다르고, 자유도가 낮고, 의사라는 특정집단의 다이내믹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제품을 프로모션 하기 위해서는 질환과 약제의 과학적인 지식도 갖춰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문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직무는 많지 않기에 전문성이 있는 직업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당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부에서 정한 모든 전략이나 아이디어가 가능하지 않고, 창의적인 당신에게 이 직무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외국계 제약회사의 약들은 특허가 있는 오리지널 제품들로 시장상황만 맞다면 프로모션의 여부없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기에, 마케터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그러기에, 브랜드는 남지만 업계에서 이걸 누가 담당했는지에 대해 사람의 가치와 역량은 과소평가된다. CJ 비비고 하면 떠오르는 노희영 같은 마케터는 이 업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한계를 견디지 못하면 이 일은 오래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 업계에 오래 남아 있는 사람들은 쌓여가는 경험과, 스스로의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사람이 남아있다.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명감 때문도 아니고 안정적인 업계구조와 연봉 때문만도 아니다
이 일을 통해 분명 단계별로, 내가 나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고 배우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을 통해 시장을 다시 보게 만들고
사람의 선택과 조직정치 조직관계등을 고민하게 하고
내가 만든 전략이 현실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 혹은 어떤 부분이 내외부 부딪치는지를 보면서 배우는 점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서 의학과 약이라는 분야가 우리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너무나 느끼지 않는가? 그 업계 한복판에 있는 건 재미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