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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Sep 21. 2023

언제나 깨어 있을 것

신체강탈자의 침입

언제나 깨어 있을 것.

그리고 다음 차례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 잊지 말 것.


<신체강탈자의 침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옛날 전래동화 속 손톱 먹은 쥐처럼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어느날 '산타 미라'라는 작은 마을에 이상 징후가 포착된다. 어린 소년은 어머니에게서 달아나고, 자신을 딸처럼 키워준 삼촌이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는 여자의 히스테리 증상이 의사에게 전달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전에 그들이 느꼈던 사랑과 감정이 어머니와 삼촌에게서 영영 사라진 것 같다는 기민한 상실감만이 증거라는 것이다.


달라진 '삼촌'은 외형부터 목소리, 기억까지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단 하나, 이전처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상 증상은 점점 온 마을로 퍼진 끝에 의사인 주인공의 '마일즈'에게 진료 예약이 구조 요청처럼 들이닥쳤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모든 예약이 취소되며, 로맨틱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은 텅텅 비어버리기까지 한다. 마을이 변한 것이다.


'마일즈'는 애인 베키와 식사를 하러 간, 항상 만석인 레스토랑에서 그 이상한 점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더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고요한 레스토랑에 그를 찾는 친구의 전화가 걸려오고, 다급하게 레스토랑에서 친구의 집에 간 '마일즈'는 이상한 존재를 목격한다. 그것은 인간처럼 보이지만 손의 지문을 찍어봐도 둥근 자국만 남을 뿐 지문조차 없고, 이목구비는 흐리멍텅해 틀에서 찍어내다 만 비누 같은 어떤 몸이다.

새벽 사이 그 이상한 몸은 마일즈를 부른 친구의 몸으로 변한다. 그와 함께 원본을 따라 완성되는 몸을 베키의 집 지하실에서도 찾아낸 마일즈는 베키를 구해 친구의 집으로 향한다.

대피소처럼 이용하던 친구의 정원에는 친구 역시 본 적 없는 거대한 외계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거품과 함께 '몸'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몸들이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비로소 알게 된 마일즈는 친구와 친구의 부인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몸을 찔러 죽인다.


영화의 후반에는 초반부의 마을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던 마일즈는 온데간데 사라진다. 대신 친구마저 복제된 몸으로 변한 뒤 쫓기기 시작한 마일즈가 모두를 의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의심에서 제외된 존재는 오직 모든 장면에서 함께인 베키뿐이다.


복제된 몸들은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원래 몸 주인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감정은 문제를 만든다. 감정은 사람을 해치고 괴롭게 만든다. 감정은 또한 분란을 만든다. 사랑, 욕망, 야심, 분노, 그러한 모든 것들이 거세된 개량종이 바로 대체되고 복제된 몸이다. 그러나 마일즈의 친구가 발견한 '몸', 흐리멍텅하고 완전하지 않은 단계의 형상이 바로 본질이다. 감정이 사라진 인간은 바로 그러한 미완성 상태나 다름없다.


영화에서는 원래의 사람들이 복제된 후 어디로 가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마일즈를 씨앗에서 나온 '몸'으로 바꾸려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한다.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조금도 괴롭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잠든 사람을 뒤바꾼다. 그러니까 인간이 감정을 가졌음을, 그리고 사랑을 하는 존재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깨어 있으라. 그리고 사고하고 의심하라.


잠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마일즈가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자리를 비운 사이 깜빡 잠든 베키는 마일즈가 다시 입을 맞추었을 때 이전과 다른 얼굴을 한다. 이전의 베키는 입을 맞출 때 수줍어하기도 했고 사랑이 담긴 눈으로 마일즈를 보았다. 그러나 마네킹처럼 차고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뜨는 순간 마일즈는 잠이 그의 사랑을 빼앗아갔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결말은 원래 도로에서 '다음은 당신 차례'라고 울부짖는 마일즈의 절망 어린 얼굴로 끝이었다. 해피엔딩과 상업성의 법칙으로 지금의 결말이 되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깨어 있으라. 논리를 갖추고 남들의 말을 몽유병 환자처럼 따르지 말라.


영화의 인간관 또한 명료한데, 인간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육신이나 기억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가 아끼던 곰인형이 너절하게 낡아 똑같이 생긴 인형을 사준 후 원래의 것을 버릴 때에 아이가 우는 것은 그것이 조금도 자신의 인형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몸'들은 똑같이 생긴 새 인형이다. 그곳에는 사랑이 부재한다.


우리는 기억을 잃을 수 있다. 알츠하이머나 치매로 나에 대한 기억과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직장에서 일했는지, 지금의 나이는 몇이고 합창단에서 알파였는지 소프라노였는지 따윈 잊어버릴 수 있다. <신체강탈자의 침입>에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감정의 소멸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에게서 슬픔을 느끼는 데에는 이 또한 하나의 원인이리라.

그러나 기억을 잃는 것으로, 신체를 잃거나 인공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자아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것에 기뻐하고 애정을 느끼는지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삶에 있어 우리는 기쁠 것이며 슬플 것이다. 때로는 다툼의 원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감정으로 고통받는다. 그러나 아무도 사랑에 빠지지 않는 마을, 사랑과 책임감과 기쁨을 느낄 감정이 거세되어 아이가 우는 소리가 성가시다고 생각해 더는 돌보지 않는 부모들이 가득한 마을, 입을 맞춰도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지 않는 마을은 아름답지 않다. 그 누구도 영화관을 찾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영화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삶을 찬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상은 즐겁지 않다. 우리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상실감과 우울감에 빠지면 우리는 감정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거추장스럽게 나를 동요케 하는 감정을 때로는 영영 꺼내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구성하는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아야 한다. 잠의 세계로 밀어넣고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도피하다가 어느날 전염병처럼 커지기 전에.


<서스페리아>처럼 <신체강탈자의 침입>은 현대 리메이크판이 존재한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인베이젼>인데, 만일 인베이젼을 보지 않았다면 <신체강탈자의 침입>을 먼저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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