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 Apr 08. 2024

심리평가 보고서

의뢰 사유:
수검자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중력이 저하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5년 전 즈음에는 몇 차례 상담을 받았으나 개선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채 지내다가 업무가 바빠지면서
괜찮아지는 것처럼 지나갔고, 현재 큰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진 않으나 무감정, 무감각한 상태가 길었고
시간이 지나자 다시 막막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나의 심리평가 보고서 중>


작은 오피스텔 방안. 뜨거운 노트북을 잠시 밀어두고, 점심으로 시킨 포케 비닐봉지를 열면서 넷플릭스를 켠다. 점심 시간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다른 곳에 가 있고 싶다. 혼자 있는 방이지만 간절하게 더 혼자 있고 싶다. 멍하니 드라마를 하나 틀어놓고, 스파이시 소스를 잔뜩 넣은 포케를 한 입 하려는데 어김없이 알림이 울린다. 


회사 메신저다. 시계를 보니 이제 12시 반. 확인하고 답장을 할까, 점심시간이라고 우겨도 되는 시간이니 이거 한 편 보고 조금만 더 누워있다가 확인할까. 한 번 더 윙— 윙윙. 결국 포케를 몇 술 뜨다 불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눌러보고 만다. ‘OO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다시 업무 시작. 


몇 분이나 지났다고 식을 것도 없는 포케가 갑자기 노트북 옆에선 맛이 없다. 꾸역꾸역 몇 술 더 넣어보지만 정말 이상하게 아무 맛이 없어졌다. 저녁이 지나도 메신저는 쉬지 않았고 나는 몇 번이고 노트북을 닫았다가 넷플릭스를 켰다가 또 메신저를 열기를 반복했고, 한참을 노트북 불빛 아래 일하다 어두워진 방에 불을 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답답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뭐 하나도 제대로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하면 되는데 계속 매달려도 일의 진도가 나지 않았다. 하는 법을 모르는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인데 빈 화면을 보면 손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큰일이다.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끝내는 일의 양은 몇 시간 치가 되지 않아서 더 늦게까지 매달렸다. 그렇게 매달리고 나면 진이 빠졌다. 밖에 나갈 기분도 좋아하는 걸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넷플릭스를 켜놓고 잠들었고, 다시 메신저 소리에 잠이 깼다. 약속이 잡혀도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남아 있는 일이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바쁜 날이 계속됐다. 끝나지 않는 일 속에서 힘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맡은 일을 무사히 끝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진짜 큰일이지. 


언젠가 산책하면서 카페인 줄 알고 들어가 봤던 심리상담센터가 생각났다. 밝고 깔끔한 공간에 마음이 끌렸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걸 보니 ADHD일 수도 있다. 진단받아 약을 먹든 행동치료를 하든 빨리 고쳐서 일을 끝내고 편안해지고 싶었다. 전화로 상황을 이야기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종합 심리평가와 주의력 검사 일정을 잡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일을 하는데 집중이 안 돼서요.’


이십 대의 전부를 함께 했던 사람과 헤어져서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날도. 그 외에 수없이 많은 부침이 버거워 울던 날들도 있었지만 정말 다 괜찮았다. 괜찮다고 믿었고 그래서인지 사회적으로 나는 잘 기능해 왔다. 오히려 좋아 보인다거나 걱정 없어 보인다는 말도 제법 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회사에 갔고, 웃으며 커피를 마셨고, 신나게 술을 마시고, 또 일을 했다. 직장인의 당연한 숙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날을 지날 때도 이렇게 견딜 수 없진 않았다. 그리고 정말 잘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눈물은 마르고 감정은 지나가는 거니까.


근데 일이 잘 안된다? 일을 하나도 끝내기 어렵다? 이건 문제가 심각하다. 이번 건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수없이 많은 우울한 날들이 아니라 내가 기능하지 못하는 순간이 되서야 나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01화 의미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